변형되거나, 뒤섞였거나, 상상으로 만들어진 풍경의 요소들을 질감을 완전히 없애거나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그려내어 회화의 내제적 요소인 2차원성과 외부적 요소인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캔버스의 부분을 구성하는 색/질감이 두드러지는 도형으로, 전체 풍경의 일부로 작용하는 형태로, 두 가지의 역할을 해내도록 작품을 구상합니다.
교육
2010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8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회화과(복수전공) 졸업
작가노트
시각예술을 구성하는 여러 매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회화이다. 회화는 예술에 편승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인간의 표현 욕구 중 하나다. 책의 모퉁이에 작은 그림을 그려 넣는 것, 화장실 벽에 이상하고 우스운 그림을 남겨 놓는 것, 사인에 캐릭터를 삽입하는 것 등등. 회화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아우르는 교집합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회화는 관객에게도 아주 가까웠던 것으로 다양한 판단의 근거를 만들어 내며 존재했을 것이다. 미술사가들에 의해 라스코 벽화부터 기록된 예술로서 회화의 역사는 목적과 의도, 기능과 용도, 판단과 확신, 감각과 감정에 의해 긴 역사의 흐름으로 남겨졌다. 만약 그 다양한 회화를 관통하는 유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보편적인 진리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화가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그 하나를 좇았을 것이다.
쓰인 재료를 통해 작품이 제작된 시대를 알 수 있고, 그려진 이미지를 통해 그려진 시기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시기의 정치, 종교 인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기에 회화는 기록으로서 역할도 충실히 해왔다. 모더니스트 페인팅에 다다라 자유를 찾기 전까지. 그렇다면 그 이후 회화는 예술 안에서 어떠한 감각으로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 수많은 예로 음악과의, 영상과의, 조각과의 협업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매체 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체성을 부정하는 작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회화는 사실 회화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매체로 변신을 거듭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회화를 버리지 못하는 작가와 관객과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회화로의 사랑은 작품의 어떤 요소일까. 그것이 내가 궁금해하고, 좇고, 찾고 싶은 회화, 회화라는 것이다.
회화는 그 자체로 본인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판단하게 하는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지워왔다. 하지만, 어떠한 환영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대성을 가지지 않는 이미지들. 예를 들어 우주나 풍경 같은, 오래전에도, 먼 미래에도 존재할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박제된 수많은 장면 중 어느 시기로 편승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회화의 감각, 회화만 가능한 감각을 심어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의 감상을 다르게 한다면, 광활한 장면 안에서 개별 주체들이 느낄 수많은 푼크툼에 더해 모더니스트 페인팅이 말하고자 했던 것. 예를 들어 작가의 손길, 작은 자국, 겹쳐진 물감의 층에서 느끼는 인간과 인간을 잇는 감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평한 평면 위에 얇게 입혀진, 그러나 충분한 작가의 제스처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물성을 지닌 질감에서 관객은 회화를 읽고, 그 안에서 감동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한 시기의 회화는 과거와 반대되는 지점에서 읽혀야 한다. 이미지가 아닌 기법으로 시대성을 말하고, 오히려 이미지 그 자체는 시대 초월적으로 선택되어 역사에 남겨지되 시기를 특정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회화의 평평함을 말하되 어떤 것을 모사하는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하고, 매체 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지의 서사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전영진 Jun Youngjin
작품설명
변형되거나, 뒤섞였거나, 상상으로 만들어진 풍경의 요소들을 질감을 완전히 없애거나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그려내어 회화의 내제적 요소인 2차원성과 외부적 요소인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이 캔버스의 부분을 구성하는 색/질감이 두드러지는 도형으로, 전체 풍경의 일부로 작용하는 형태로, 두 가지의 역할을 해내도록 작품을 구상합니다.
교육
2010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8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회화과(복수전공) 졸업
작가노트
시각예술을 구성하는 여러 매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회화이다. 회화는 예술에 편승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흔한 인간의 표현 욕구 중 하나다. 책의 모퉁이에 작은 그림을 그려 넣는 것, 화장실 벽에 이상하고 우스운 그림을 남겨 놓는 것, 사인에 캐릭터를 삽입하는 것 등등. 회화는 어쩌면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아우르는 교집합에 들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회화는 관객에게도 아주 가까웠던 것으로 다양한 판단의 근거를 만들어 내며 존재했을 것이다. 미술사가들에 의해 라스코 벽화부터 기록된 예술로서 회화의 역사는 목적과 의도, 기능과 용도, 판단과 확신, 감각과 감정에 의해 긴 역사의 흐름으로 남겨졌다. 만약 그 다양한 회화를 관통하는 유일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보편적인 진리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화가들은 여러 방법을 통해 그 하나를 좇았을 것이다.
쓰인 재료를 통해 작품이 제작된 시대를 알 수 있고, 그려진 이미지를 통해 그려진 시기의 역사를 알 수 있고, 그 시기의 정치, 종교 인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기에 회화는 기록으로서 역할도 충실히 해왔다. 모더니스트 페인팅에 다다라 자유를 찾기 전까지. 그렇다면 그 이후 회화는 예술 안에서 어떠한 감각으로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그 수많은 예로 음악과의, 영상과의, 조각과의 협업을 들 수 있을 것이고, 매체 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체성을 부정하는 작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회화는 사실 회화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매체로 변신을 거듭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회화를 버리지 못하는 작가와 관객과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회화로의 사랑은 작품의 어떤 요소일까. 그것이 내가 궁금해하고, 좇고, 찾고 싶은 회화, 회화라는 것이다.
회화는 그 자체로 본인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판단하게 하는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지워왔다. 하지만, 어떠한 환영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시대성을 가지지 않는 이미지들. 예를 들어 우주나 풍경 같은, 오래전에도, 먼 미래에도 존재할 이미지를 사용한다면, 박제된 수많은 장면 중 어느 시기로 편승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회화의 감각, 회화만 가능한 감각을 심어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의 감상을 다르게 한다면, 광활한 장면 안에서 개별 주체들이 느낄 수많은 푼크툼에 더해 모더니스트 페인팅이 말하고자 했던 것. 예를 들어 작가의 손길, 작은 자국, 겹쳐진 물감의 층에서 느끼는 인간과 인간을 잇는 감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평평한 평면 위에 얇게 입혀진, 그러나 충분한 작가의 제스처를 느끼기에는 충분한 물성을 지닌 질감에서 관객은 회화를 읽고, 그 안에서 감동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한 시기의 회화는 과거와 반대되는 지점에서 읽혀야 한다. 이미지가 아닌 기법으로 시대성을 말하고, 오히려 이미지 그 자체는 시대 초월적으로 선택되어 역사에 남겨지되 시기를 특정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회화의 평평함을 말하되 어떤 것을 모사하는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하고, 매체 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미지의 서사에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