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박스 이후》 리뷰: 사용자로부터 (하루하루) 탈출하기」
권시우
“가난한 이미지는 과하게 압축되고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가난하다. 물질을 잃고 속도를 얻은 것이다.”1
디지털 기술이 현대미술 차원에서 통용되는 매체라는 개념을 재편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는 앞선 질문을 자연스레 ‘가상성’의 문제와 대응시킬 수 있지만, 사실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특정한 작업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반드시 디지털 기술에서 연원하지 않는다. 즉 ‘가상성’은 무엇보다 현상학적인 경험의 맥락에서 풍부한 논의의 장을 발생시키며, 이는 물질로서의 작업(들)이 형성하고 있는 구도 내외에서 관객이 맞닥뜨리는 (한때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의 문제와 연루시킨) 사건을 포함한다. 관객은 해당 사건에서 특정한 작업에 내재된 물질의 속성에 일일이 주목하는 대신, 작업들의 상호 관계에 의해 연출된 무대로서의 장소를 가늠한다.
무대로서의 장소.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자주 거론되는 ‘가상성’의 문제를 은연중에 위반하는데, 왜냐하면 이때의 ‘가상성’은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달리 오히려 물질 자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즉 이제 물질 혹은 물질로서의 작업은 현실에서 “사건”을 연출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소위 디지털 세계에 편입됨으로써 비물리적으로 용해되는 과정, 엄밀히 말하자면 코드화된 채 저장되고, 그 이후에 스크린 상에 ‘이미지’로 출력되는 일련의 과정을 암시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오히려 사용자 개인을 전방위하게 둘러싼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인 욕구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즉 ‘이미지’는 어느덧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으며, 결국 관건은 ‘이미지’를 그것에 상응하는 조형적인 방법론을 통해 물질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앞선 질문은 다소 무용하다. 즉 지금 시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매체라는 개념을 재편한다기보다, 오로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자동화된 프로세스를 통해 위축시킨다. 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이 손쉽게 ‘이미지’로 대체되는 시대에, 최소한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매체를 규정하는 다양한 관습들에 의해 발생한 교차적인 감각은 무뎌졌다. 결국 물질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그러한 감각을 재고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단순히 현실 상에 출력하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의 비물리적인 현존을 재/구성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자체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이미지’가 대체로 오픈소스로 제공되거나, 그에 기반해 유통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즉 ‘이미지’는 무엇보다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된 이후, 소셜 네트워크를 포함한 가상의 유통망을 급속도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무한히 증식시킨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무대로서의 장소와 관련된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가상의 유통망에 산개한 ‘이미지’를 단일한 대상으로 식별하는 데 의도적으로 실패하면서, 그것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 ‘이미지’는 그것이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종의 재화로서 끊임없이 유통되면서 “사건”을 무마시킨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장소는 무대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자체는 자신의 존재를 물리적인 차원에서 등재하기를 포기한 채, 그저 불특정한 관계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주지하듯 사용자 개인은 ‘이미지’ 자체를 (단일한 대상으로든 관계 모델에 의거해서든) 식별할 수있는 권한이 없으며, 그러므로 애초에 그것을 어떻게 조형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물질로 복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침내 새로운 매체를 창안해야 하는가? 이는 마치 뉴미디어 아트가 등장했을 즈음에 자주 거론됐던 매체의 혼종성에 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혼종성은 온갖 기술적 매체들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뒤섞은 다소 기괴한 설치 미술의 양상으로 발현된 채, 성급하게 막을 내렸다. 2 앞서 언급했듯 매체는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된 다양한 관습들을 운용하는 과정에 의해 활성화되며,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한 일련의 매체들은 서로 호환될 수 없다. 어찌됐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매체의 창안이 아니라, 이제 사용자라는 모델을 기꺼이 폐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즉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게끔 물질을 재/창안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미지’를 주체가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해야한다. 혹은 ‘이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무관한 새로운 주체의 관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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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역, 워크룸 프레스, 2016, p48
안타깝게도 사용자는 더 이상 주체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4월 15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에서 김희천의 <썰매>(2016)를 재상연한 선택은 괄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본 작업은 ‘이미지’와 동기화된 자아(상)이 분열된 상황을 다소 장황하게 서술하는데,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서사의 개요는 아직까지 분열될 여지가 남아있는 주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웹 3.0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한때 사용자로 대변됐던 디지털 세계에서의 능동적인 주체라는 가설은 완전히 파산했다. <썰매>의 1인칭 화자가 맥북과 아이폰을 분실함으로써 유출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면, 시맨틱 웹에 기반한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유출한 ‘나’에 대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그것에 부합하는 서비스를 자동화된 방식으로 제공한다. 물론 우리에겐 그러한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빅데이터가 사용자 개인을 무려 일상 차원에서 관리 유지하면서, 사용자의 주체성을 무효화시키는 전략은 지속된다.
김희천, <썰매>, 2016
‘이미지’가 일종의 클리셰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 (빅데이터가 규정한) 우리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로서, 언제나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비로소 ‘이미지’ 자체를 식별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미지’는 각자가 예상 가능한 범위들에 도달하기 위해 여전히 가상의 유통망을 순환하는 중이며, 빅데이터는 그러한 과정에서 거듭 확장되는 ‘이미지’의 지형도를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삼는다. 히토 슈타이얼과 같은 디지털 행동주의자라면, 민중들이 그러한 사유 재산을 일종의 정치적 거점으로 전유할 필요성을 역설하겠지만, 이는 빅데이터의 절대적인 권한에 종속된 나와 같은 개인의 입장에선 그저 불가능한 무용담처럼 들린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빅데이터와 무관한, 혹은 그것의 바깥에서 ‘이미지’를 기입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대안적인 플랫폼이다. 이때의 ‘거점’은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고립을 자처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미지’는 마침내 특정한 객체로 제시된다.
물론 빅데이터의 바깥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완전한 자율성을 지향하는 대신, 사용자와 무관한 새로운 주체 혹은 그것의 관점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모의 실험을 전개할 뿐이다.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에서 공개된 ‘수장고’의 프로젝트는 그러한 맥락에 얼마간 부응하는데, ‘수장고’가 선별한 일련의 작가들의 (대체로 조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업은 3D스캔된 채 자체 개발한 웹사이트에 업로드된다. 특히나 최하늘의 <스트래칭 하는 애>(2019)의 경우, 작가가 염두하고 있는 ‘가벼운 조각’이라는 지침에 따라 여타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폐기됐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수장고’가 의도한 데이터로서의 작업에 부합한다. 데이터로서의 작업은 오픈소스로 제공되고, 심지어 그것을 임의대로 출력해 다시금 현실에 기입할 수 있다. 그 과정은 3D프린터가 상용화된 시점에서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논의한 ‘이미지’가 마침내 물질로 거듭남으로써,현실 상에서 그것과 마주하는 관객을 다름 아닌 주체로 호명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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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러한 양상 속에서 드러난 작업들은 대체로 뉴미디어에 경도된 사용자 개인의 정동을 유사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매체는 ‘표현’이라는 고루한 기치 아래 말 그대로 융합된다. 이는 매체의 다중성을 희석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새롭지 않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다소 생소한 물질 자체에 의해, 새롭게 호명됐을 뿐이다. 즉 포스트 미니멀리즘이 “무대로서의 장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현상학을 탐구했다면, 이제 주체는 무엇보다 ‘이미지’로 분산된 자아(상)을 수습하기 위해, 물질의 관점에서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거듭나기를 자처한다. 이를테면 최하늘의 최근 작업들은 퀴어적 주체의 퍼포먼스를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혹 조각을 인간의 형상과 유비하는데, 이는 물질로서의 조각이 자신과 마주한 관객에게 주체성을 부과하는 주요한 사례다. 즉 이때의 조각이 유비하는 인간의 형상은, 스스로를 미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물질로 현전함으로써, 디지털 세계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주체성의 문제를 동결시킨다. (물론 이는 작가가 굳이 공적인 차원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그러므로 “주체성”과 마찬가지로 유동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의 맥락에서 동결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최하늘의 조각은 현실의 토대 위에 직립한 채, 본 전시에서는 무려 허공에 매달린 채, 관객을 포함한 불확실한 개인들을 기꺼이 환대한다.
최하늘, <스트래칭 하는 애>, 2022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가 <스트리칭 하는 애>를 포함한 자신의 작업들을 선뜻 폐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 이는 ‘수장고’의 맥락에 따르자면, 결국 물질로서의 조각이 관객에게 부과했던 주체성을 다시금 가상으로 회수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가상은 빅데이터가 사유화한 ‘이미지’의 지형도가 아니라, ‘수장고’라는 (일련의 개인들이 ‘거점’으로 삼은) 플랫폼에 귀속됨으로써 스스로를 제한한다. 3 즉 가상으로 회수된 주체성은 더 이상 쉽사리 무효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장고’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작업 차원에서 물질과 ‘이미지’를 재/매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침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주체가 새로운 이유는 바로 물질에 의해 호명된 주체성을 토대로 ‘이미지’를 식별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과도하게 몰입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의 관점에서 ‘이미지’가 출력된 스크린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얼핏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하기 이전의 과거로 회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서 성사된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소격 효과다. 그로 인해 스크린 상에서 현전하는 ‘이미지’는 객체가 되고, 객체로서의 ‘이미지’는 언제든지 다시금 물질로 거듭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사실상 ‘수장고’가 활용하는 3D프린팅과 같은 기술은 부차적인 문제다. 즉 ‘이미지’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그러한 자동화된 프로세스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주체의 관점에서 ‘이미지’를 조형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련의 매체들은 점차 각자에게 내재된 관습들을 서로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는 주지하듯 새로운 매체의 창안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매체들은 ‘이미지’를 일종의 프로토콜로 삼아, 디지털 기술에 의해 재편된 세계(상)에 대응하고 있다. 혹은 우리는 새로운 주체로서 그러한 과정을 촉진해야만 한다. 그러나 (히토 슈타이얼의 사례처럼) 사용자 개인을 착취하는 빅데이터의 사악한 면모를 폭로하려는 시도만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에 편승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떠한 메타적인 관점도 보장하지 못한다. 즉 폭로는 재차 빅데이터로 수렴되고, 그에 걸맞는 서비스 차원에서의 의사-담론으로 가공된 채 당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정체된 시공을 기회 삼아, 매체의 역량을 보다 능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용자라는 모델로부터 도약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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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장고’가 구축한 플랫폼이 지금 시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대안적인 이유는 오픈소스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각보다 웹상에서 활성화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의도치 않게 ‘이미지’의 불특정한 관계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때 히토 슈타이얼이 제안한 “포스트-재현”이라는 가설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상의 유통망으로 수렴됨으로써 일종의 다중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체감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다중성은 다시금 ‘이미지’ 자체를 식별하기 위한 원근법의 체계 속으로 소멸하는 중이다. 물론 근대적인 재현의 맥락에서 형성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은 여전히 고루하다. 다만 새로운 주체는 자신이 식별한 ‘이미지’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원근법을 언제나 (때로는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 즉 이제 원근법은 우리의 주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가까우며, 우리는 그로 인해 대상화된 ‘이미지’가 자신의 비물리적인 현존을 유지한 채 물질로 드러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후자의 상황은 결국 가상과 현실이 재/매개된 상태에서 (불)가능한 조형의 방법론을 추구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다. 혹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그레이박스 이후》 리뷰: 사용자로부터 (하루하루) 탈출하기」
권시우
“가난한 이미지는 과하게 압축되고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가난하다. 물질을 잃고 속도를 얻은 것이다.”1
디지털 기술이 현대미술 차원에서 통용되는 매체라는 개념을 재편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한가? 우리는 앞선 질문을 자연스레 ‘가상성’의 문제와 대응시킬 수 있지만, 사실 포스트 미니멀리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특정한 작업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반드시 디지털 기술에서 연원하지 않는다. 즉 ‘가상성’은 무엇보다 현상학적인 경험의 맥락에서 풍부한 논의의 장을 발생시키며, 이는 물질로서의 작업(들)이 형성하고 있는 구도 내외에서 관객이 맞닥뜨리는 (한때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의 문제와 연루시킨) 사건을 포함한다. 관객은 해당 사건에서 특정한 작업에 내재된 물질의 속성에 일일이 주목하는 대신, 작업들의 상호 관계에 의해 연출된 무대로서의 장소를 가늠한다.
무대로서의 장소.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자주 거론되는 ‘가상성’의 문제를 은연중에 위반하는데, 왜냐하면 이때의 ‘가상성’은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달리 오히려 물질 자체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즉 이제 물질 혹은 물질로서의 작업은 현실에서 “사건”을 연출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이 아니라, 소위 디지털 세계에 편입됨으로써 비물리적으로 용해되는 과정, 엄밀히 말하자면 코드화된 채 저장되고, 그 이후에 스크린 상에 ‘이미지’로 출력되는 일련의 과정을 암시한다. 문제는 그 과정이 오히려 사용자 개인을 전방위하게 둘러싼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인 욕구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즉 ‘이미지’는 어느덧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으며, 결국 관건은 ‘이미지’를 그것에 상응하는 조형적인 방법론을 통해 물질로 복원하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앞선 질문은 다소 무용하다. 즉 지금 시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매체라는 개념을 재편한다기보다, 오로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자동화된 프로세스를 통해 위축시킨다. 물질을 포함한 모든 것이 손쉽게 ‘이미지’로 대체되는 시대에, 최소한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매체를 규정하는 다양한 관습들에 의해 발생한 교차적인 감각은 무뎌졌다. 결국 물질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그러한 감각을 재고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단순히 현실 상에 출력하는 게 아니라, 그것 자체의 비물리적인 현존을 재/구성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미지’ 자체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이미지’가 대체로 오픈소스로 제공되거나, 그에 기반해 유통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즉 ‘이미지’는 무엇보다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된 이후, 소셜 네트워크를 포함한 가상의 유통망을 급속도로 순환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무한히 증식시킨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무대로서의 장소와 관련된 문제와 맞닥뜨리는데, 이를테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가상의 유통망에 산개한 ‘이미지’를 단일한 대상으로 식별하는 데 의도적으로 실패하면서, 그것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 ‘이미지’는 그것이 가난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종의 재화로서 끊임없이 유통되면서 “사건”을 무마시킨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장소는 무대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 자체는 자신의 존재를 물리적인 차원에서 등재하기를 포기한 채, 그저 불특정한 관계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주지하듯 사용자 개인은 ‘이미지’ 자체를 (단일한 대상으로든 관계 모델에 의거해서든) 식별할 수있는 권한이 없으며, 그러므로 애초에 그것을 어떻게 조형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물질로 복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침내 새로운 매체를 창안해야 하는가? 이는 마치 뉴미디어 아트가 등장했을 즈음에 자주 거론됐던 매체의 혼종성에 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 결과적으로 이때의 혼종성은 온갖 기술적 매체들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뒤섞은 다소 기괴한 설치 미술의 양상으로 발현된 채, 성급하게 막을 내렸다. 2 앞서 언급했듯 매체는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그것에 내재된 다양한 관습들을 운용하는 과정에 의해 활성화되며,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한 일련의 매체들은 서로 호환될 수 없다. 어찌됐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매체의 창안이 아니라, 이제 사용자라는 모델을 기꺼이 폐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즉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게끔 물질을 재/창안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미지’를 주체가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해야한다. 혹은 ‘이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모더니즘과 무관한 새로운 주체의 관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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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역, 워크룸 프레스, 2016, p48
안타깝게도 사용자는 더 이상 주체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4월 15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에서 김희천의 <썰매>(2016)를 재상연한 선택은 괄목할 만하다. 이를테면 본 작업은 ‘이미지’와 동기화된 자아(상)이 분열된 상황을 다소 장황하게 서술하는데,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서사의 개요는 아직까지 분열될 여지가 남아있는 주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웹 3.0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한때 사용자로 대변됐던 디지털 세계에서의 능동적인 주체라는 가설은 완전히 파산했다. <썰매>의 1인칭 화자가 맥북과 아이폰을 분실함으로써 유출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면, 시맨틱 웹에 기반한 지금의 세계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유출한 ‘나’에 대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그것에 부합하는 서비스를 자동화된 방식으로 제공한다. 물론 우리에겐 그러한 서비스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와 별개로 빅데이터가 사용자 개인을 무려 일상 차원에서 관리 유지하면서, 사용자의 주체성을 무효화시키는 전략은 지속된다.
김희천, <썰매>, 2016
‘이미지’가 일종의 클리셰가 된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이제 (빅데이터가 규정한) 우리에게 최적화된 서비스로서, 언제나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비로소 ‘이미지’ 자체를 식별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미지’는 각자가 예상 가능한 범위들에 도달하기 위해 여전히 가상의 유통망을 순환하는 중이며, 빅데이터는 그러한 과정에서 거듭 확장되는 ‘이미지’의 지형도를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삼는다. 히토 슈타이얼과 같은 디지털 행동주의자라면, 민중들이 그러한 사유 재산을 일종의 정치적 거점으로 전유할 필요성을 역설하겠지만, 이는 빅데이터의 절대적인 권한에 종속된 나와 같은 개인의 입장에선 그저 불가능한 무용담처럼 들린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빅데이터와 무관한, 혹은 그것의 바깥에서 ‘이미지’를 기입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대안적인 플랫폼이다. 이때의 ‘거점’은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고립을 자처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미지’는 마침내 특정한 객체로 제시된다.
물론 빅데이터의 바깥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완전한 자율성을 지향하는 대신, 사용자와 무관한 새로운 주체 혹은 그것의 관점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모의 실험을 전개할 뿐이다.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에서 공개된 ‘수장고’의 프로젝트는 그러한 맥락에 얼마간 부응하는데, ‘수장고’가 선별한 일련의 작가들의 (대체로 조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업은 3D스캔된 채 자체 개발한 웹사이트에 업로드된다. 특히나 최하늘의 <스트래칭 하는 애>(2019)의 경우, 작가가 염두하고 있는 ‘가벼운 조각’이라는 지침에 따라 여타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폐기됐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수장고’가 의도한 데이터로서의 작업에 부합한다. 데이터로서의 작업은 오픈소스로 제공되고, 심지어 그것을 임의대로 출력해 다시금 현실에 기입할 수 있다. 그 과정은 3D프린터가 상용화된 시점에서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논의한 ‘이미지’가 마침내 물질로 거듭남으로써,현실 상에서 그것과 마주하는 관객을 다름 아닌 주체로 호명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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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그러한 양상 속에서 드러난 작업들은 대체로 뉴미디어에 경도된 사용자 개인의 정동을 유사 표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매체는 ‘표현’이라는 고루한 기치 아래 말 그대로 융합된다. 이는 매체의 다중성을 희석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의 주체는 새롭지 않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다소 생소한 물질 자체에 의해, 새롭게 호명됐을 뿐이다. 즉 포스트 미니멀리즘이 “무대로서의 장소”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주체의 현상학을 탐구했다면, 이제 주체는 무엇보다 ‘이미지’로 분산된 자아(상)을 수습하기 위해, 물질의 관점에서 식별 가능한 대상으로 거듭나기를 자처한다. 이를테면 최하늘의 최근 작업들은 퀴어적 주체의 퍼포먼스를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혹 조각을 인간의 형상과 유비하는데, 이는 물질로서의 조각이 자신과 마주한 관객에게 주체성을 부과하는 주요한 사례다. 즉 이때의 조각이 유비하는 인간의 형상은, 스스로를 미처 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에게 물질로 현전함으로써, 디지털 세계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주체성의 문제를 동결시킨다. (물론 이는 작가가 굳이 공적인 차원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그러므로 “주체성”과 마찬가지로 유동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의 맥락에서 동결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됐든 최하늘의 조각은 현실의 토대 위에 직립한 채, 본 전시에서는 무려 허공에 매달린 채, 관객을 포함한 불확실한 개인들을 기꺼이 환대한다.
최하늘, <스트래칭 하는 애>, 2022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작가가 <스트리칭 하는 애>를 포함한 자신의 작업들을 선뜻 폐기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왜냐하면 이는 ‘수장고’의 맥락에 따르자면, 결국 물질로서의 조각이 관객에게 부과했던 주체성을 다시금 가상으로 회수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가상은 빅데이터가 사유화한 ‘이미지’의 지형도가 아니라, ‘수장고’라는 (일련의 개인들이 ‘거점’으로 삼은) 플랫폼에 귀속됨으로써 스스로를 제한한다. 3 즉 가상으로 회수된 주체성은 더 이상 쉽사리 무효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장고’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작업 차원에서 물질과 ‘이미지’를 재/매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양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마침내 새로운 주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주체가 새로운 이유는 바로 물질에 의해 호명된 주체성을 토대로 ‘이미지’를 식별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과도하게 몰입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실의 관점에서 ‘이미지’가 출력된 스크린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얼핏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하기 이전의 과거로 회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지금 현재에서 성사된 ‘이미지’에 대한 일종의 소격 효과다. 그로 인해 스크린 상에서 현전하는 ‘이미지’는 객체가 되고, 객체로서의 ‘이미지’는 언제든지 다시금 물질로 거듭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사실상 ‘수장고’가 활용하는 3D프린팅과 같은 기술은 부차적인 문제다. 즉 ‘이미지’의 비물리적인 현존은 그러한 자동화된 프로세스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주체의 관점에서 ‘이미지’를 조형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련의 매체들은 점차 각자에게 내재된 관습들을 서로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는 주지하듯 새로운 매체의 창안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만 일련의 매체들은 ‘이미지’를 일종의 프로토콜로 삼아, 디지털 기술에 의해 재편된 세계(상)에 대응하고 있다. 혹은 우리는 새로운 주체로서 그러한 과정을 촉진해야만 한다. 그러나 (히토 슈타이얼의 사례처럼) 사용자 개인을 착취하는 빅데이터의 사악한 면모를 폭로하려는 시도만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에 편승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떠한 메타적인 관점도 보장하지 못한다. 즉 폭로는 재차 빅데이터로 수렴되고, 그에 걸맞는 서비스 차원에서의 의사-담론으로 가공된 채 당사자에게 도착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정체된 시공을 기회 삼아, 매체의 역량을 보다 능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용자라는 모델로부터 도약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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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장고’가 구축한 플랫폼이 지금 시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대안적인 이유는 오픈소스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생각보다 웹상에서 활성화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의도치 않게 ‘이미지’의 불특정한 관계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때 히토 슈타이얼이 제안한 “포스트-재현”이라는 가설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상의 유통망으로 수렴됨으로써 일종의 다중성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말 그대로 체감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다중성은 다시금 ‘이미지’ 자체를 식별하기 위한 원근법의 체계 속으로 소멸하는 중이다. 물론 근대적인 재현의 맥락에서 형성된,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이분법은 여전히 고루하다. 다만 새로운 주체는 자신이 식별한 ‘이미지’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원근법을 언제나 (때로는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 즉 이제 원근법은 우리의 주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에 가까우며, 우리는 그로 인해 대상화된 ‘이미지’가 자신의 비물리적인 현존을 유지한 채 물질로 드러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후자의 상황은 결국 가상과 현실이 재/매개된 상태에서 (불)가능한 조형의 방법론을 추구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다. 혹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