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의 무의식: 반에세이적 태도에 대하여」
권시우
내러티브와 서사는 동의어가 아니다.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러티브는 서사를 발생시키기 위해, 특정한 매체 차원에서 재/배치된 일련의 ‘장치’들이 형성하는 구도다. 시몽동에게 있어서 ‘장치’가 지배 체제의 권력 기제를 구성하고, 심지어 (철학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현실의 텍스트로 드러내는 개념적 수단이었다면, 내가 상정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장치’는 이데올로기적 기계와는 무관하다. 이때의 ‘장치’는 앞서 서술했듯 일련의 매체들에 귀속돼 있거나, 그것들로부터 각기 다르게 파생된다. 그렇다. 내가 임의대로 구상한 ‘장치’에 관한 가설에서, 매체라는 비/물리적인 단위는 ‘장치’로 대변되는 무수한 세부들로 구성돼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칙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애초의 (매체를 규정하던) 구도는 매번 달라진다.
그렇다면 ‘장치’를 설명하기 위해, 왜 굳이 내러티브가 필요한가? 앞선 질문은 틀렸다. 나에게 있어서 ‘장치’는 단순히 매체 이론을 숙고하던 과정에서 떠오른 게 아니라, 내러티브를 서사와 동의어로 착각하는 통념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펼치기 위해 고안된 개념적 수단이다. 그 과정에서 매체는 내러티브라는 보다 광범위한 범주, 혹은 시몽동의 맥락과는 또 다른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기계를 작동시키는 데 동원된다. 내러티브가 이데올로기적 기계인 이유는, 그것이 서사를 발생시키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서사는 그 이전에 간략한 메모나, 스크립트, 구어, 그 이외의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했건, 실제로 존재한 게 아니고, 오로지 내러티브에게 호명 받은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성스러운 세례식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앞서 굳이 이데올로기적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내러티브가 서사를 호명하는 과정은, 단순히 ‘이름’을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바로 그 ‘이름’에 부합하는 복합적인 구조체를, 온갖 ‘장치’들을 동원하여 생산하고, 마침내 작동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로써 서사는 내러티브에 의해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소한 서사와 관련해서는) 형식보다 정체성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서사가 내러티브의 무의식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서사물들, 특히나 국내 미술계에서 생산된 무빙 이미지 작업들 대다수가 에세이 영화를 표방하거나, 그것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상황의 기저에는, 그렇게 구현될 수 밖에 없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당대는 더 이상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웹상에 산개한 무수한 데이터들, 혹은 데이터라는 다소 중립적인 표현을 빌어 선뜻 자신을 합리화하는 가상의 컨텐츠들은, 신자유주의의 맥락에 걸맞게 그저 스스로를 판촉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컨텐츠는 곧 재화라는 오래된 격언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됐던 전자 민주주의라는 표어를 앞질러, 혹은 그것과 제휴한 채, 너무도 노골적으로 실현되는 중인 것이다. 일련의 사용자들은 자신의 재화, 즉 가상의 컨텐츠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지어 현실의 리얼리티에 호소하기까지 한다. 단적인 예로 최근 사용자들 사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유통되는 유튜브 컨텐츠 중 하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인해 발생한 전쟁의 참화를 거의 실시간으로 담아낸 영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해당 영상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를 토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것이 손쉽게 컨텐츠로 구실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새삼 사유의 가치를 재고하고 싶을 뿐이다. 즉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반드시 미디어 통제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증언하는 영상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사유를 정지한다.
사유를 정지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리얼리티’에 경도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리얼리티’에 경도된 스스로를 윤리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생각보다 손쉽다.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실제로 목격한 이미지에 그토록 열광할 수 있는가? 이는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대상화를 전제한 채, ‘그들’이 체감하는 폭력을 일종의 게임 임팩트(game impact)로 소비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가 앞서 언급한 이미지를 컨텐츠로 소비하는 행위를 멈춘다고 해서, 자연스레 그의 사유가 정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단 불매를 실행에 옮긴 이후에도 누군가는 충분히 이미지와 관련된 사유, 이를테면 이미지가 나에게 의사-다큐멘터리로서 증언하는 ‘사실’을 섣불리 외면한 것은 아닌지, 그러한 ‘사실’이 연대의 촉매가 되지는 않을지, 계속 머리를 싸맬 수 있다. 그리고 종내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한 과정을 과연 사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사적인 고민의 무작위한 파편들일 뿐, 사유의 맥락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토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의 파편들을 온전히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사유는 맥락을 통해서든, 엄청나게 장황한 언어를 통해서든, 개인이 독해 가능한 범주로 제시돼야만 한다. 그러한 전제는 어떤 변증법을 구사하든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유일한 판단에 의해, 마침내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사유를 정지하기에 이른다. 달리 말해 그는 더 이상 고민의 파편들을 특정한 사유로 맥락화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지금의 에세이 영화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에세이 영화라는 장르는 본래 사유의 맥락 속에서, 단순히 사적인 고민에 제한되지 않는 다양한 생각의 파편들을 영상 차원에서 운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에세이 영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사유의 맥락과 무관한 파편들, 그리고 그것들을 반영하는 이미지다. 달리 말해 이때의 이미지는 파편의 속성을 빌어 무/의식적으로 영상 내외에서 혼란을 유발한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한 논의로 되돌아 오자면, 그러한 에세이 영화의 기저에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 혹은 그것의 무의식에서 사유는 복원되어야 할 어떤 개념적 대상에 가깝다. 즉 일련의 개인들은 사유를 자발적으로 정지시켰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와 무관한) 파편의 역학은 지속되며, 그러한 혼란 속에서 은연 중에 사유를 재개할 여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파편의 역학은 지금 시점에서 너무나 보편적이다. 물론 나는 앞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예시로 들면서, 어찌됐든 그것을 컨텐츠로 소비하는 개인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갔지만, 사실상 대다수는 그러한 표본적 개인과 달리 자신이 미디어 차원에서 행사하는 폭력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 즉 사유를 복원하려는 무의식적 욕구는 그나마 ‘진보적’이라 할 만한, 혹은 점차 (컨텐츠 소비에 최적화되지 않은) 구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부가된 집단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의 에세이 영화의 경향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에세이 영화, 혹은 그에 기반한 영상 작업들은 사유의 맥락으로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각기 다른 파편들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정여름의 <그라이아이>(2020)는 용산 미군 기지라는 특정한 장소의 역사성을 의도적으로 유예시킨다. 작중에서 그곳은 화자와 같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그저 지도 인터페이스를 통해 말 그대로 조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발생하는 조감의 시점은 (마치 군사용 드론처럼) 어떤 감시-권력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일종의 오픈 소스 이미지와 마주하는, 지금으로써는 너무도 흔한 경험을 초래할 뿐이다. 즉 화자는 그곳이 오로지 이미지를 매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어쩌면 그러한 과정이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서사를 주도하고 있는)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지는 않는지 자문한다. 미지의 영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다. 혹은 그렇게 체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권한에 따라, 해당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이를테면 용산 미군 기지에서 촬영된 브이로그와 같은 허황된 데이터 파편들로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로써 우리는 미지의 영역, 혹은 그것이 제기하는 의문에 파편들로 답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파편들이 초래한 혼란 속에서 사유는 다시금 정지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반드시 윤리성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즉 파편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내러티브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단지 끊임없이 경합하면서 사유로 거듭나기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무빙 이미지 작가들은 에세이 영화를 은연 중에 오독하고 있다. 즉 기존의 에세이 영화가 특정한 사유를 제기하기 위해 파편들을 능동적으로 운용한다면, 그에 대한 오독의 과정은 사회적 내러티브의 무의식 그 자체를 재현하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마침내 현실로 호명하기를 의도한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당대에 부합하게끔 호명된 서사의 정체성이다.
이때의 ‘에세이’를 내용 차원에서 독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심지어 그것은 정신분석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주지하듯 ‘에세이’가 담보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현실로 호명하려는 내적인 욕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사회에서 무의식은 더 이상 은폐된 기억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실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손쉽게 사회의 병폐로 치부하는, 그러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온갖 부조리한 이해 관계들은 다름아닌 무의식의 소산이다. 혹은 그간 (후기 자본주의 이후에 축적된) 기억의 더께에 덮여있던 무의식이 마침내 현실의 지반 위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그러한 재난적 상황에서 섣불리 탈출하려는 대신, 오히려 그것에 과도하게 적응함으로써 재난을 거듭 일상화한다. 이를테면 전방위한 미디어 환경에서 유통되는 온갖 재난 영상의 대다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재/생산한 이미지에서 비롯하며, 이때의 이미지는 단순히 윤리적으로 왜곡된 대상이라기보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심상’이다. 그리고 ‘심상’은 기어코 현실로 분출하고, 재난을 조장하고, 우리는 또 다시 재난과 마주하기를 반복한다, 기타 등등. 만약 그것이 진정 윤리적으로 왜곡됐다면, 세계는 이미 한 번쯤 멸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복적으로 엄습하는 재난은, 그러한 가정에 대한 거부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은 한 개인에게 내재된 무의식 차원의 지옥도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분명 지금의 세계는 한 개인으로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무려 정신의학적으로 진료해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외상에 대한 플래시백, 즉 파편으로 현전하는 무수한 이미지들만으로 세계의 트라우마를 완화시킬 수는 없다. 물론 ‘에세이’에겐 진료에 대한 의무가 없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치료를 유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으로부터 재차 서사를 호명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와 무관한 진료의 수순들은 현실 정치에서 모색하기로 하자.) 그러한 맥락에서 이제 ‘에세이’에 기반한 일련의 작업들은, 나를 포함한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을, 순전히 내러티브의 방식으로 재편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장치’들이 소환된다. 즉 ‘에세이’는 일련의 ‘장치’들로 어떤 구도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 순전히 형식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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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영화에 대한 오독의 과정은 점차 끝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엄연히 공적인 사안으로 등재됐으며, 그에 따라 그것을 무의식 차원에서 환기하기 위한 플래시백의 유효기간도 자연스레 만료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우리는 여전히 재난을 되풀이하고, 세계는 그 과정에 병리적으로 반응한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나는 미래를 섣불리 낙관하고 싶지 않다. 아마도 당분간 효과적인 처방은 없을 것이다.
송다슬 개인전 《Random Play》(2021)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다. 작가는 자신의 ‘심상’이 반영된 이미지, 즉 서사에 대한 호명에 온갖 파편들로 답한 결과물을 전시장에 산개시킨다. 물론 일련의 이미지들은 시각적인 차원에서 미묘하게 다르지만, 앞서 언급했듯 (더 이상 사유로 귀결되지 않는) 파편을 최소 단위로 삼는다는 점에서 모두 유사한 맥락 속으로 편입된다. 이때의 맥락이란 결국 ‘에세이’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에세이’는 서사의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만 ‘설치’라는 다소 모호한 매체를 구현하기 위한 각기 다른 요소들, 이를테면 라이트 박스나 프로젝션, 커튼과 같은 비/물리적인 ‘장치’들이 형성하는 구도로 현전할 뿐이다. 그러한 구도는 내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내러티브의 정의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해당 내러티브를 스크린에 국한되지 않는 실제 경험의 차원에서 제시하기에 이른다. 즉 우리는 스크린의 전경으로부터 탈출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포함한 일련의 ‘장치’들을 빌어 발생시킨 서사의 현장 속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송다슬, 《Random Play》, 전시 전경, 2021 (사진 촬영: 생동 스튜디오)
그러나 그곳은 서사 자체를 누설하지 않는다. 혹은 애초에 누설할 필요가 없다. 주지하듯 내러티브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호명한 결과로서의 서사만을 재/생산한다. 설사 특정한 ‘장치’가 구체적인 대상으로 발견되더라도, 그것과 동기화된 이미지는 또 다시 무의식을 호명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사를 가늠하려는 시도를 그만둬야 한다. 사실 서사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심지어 서사에 대한 사유는, 그로부터 발생한 파편들에 휩쓸린 채, 언젠가 자발적으로 중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만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현실로 드러난 무의식을 토대로, 혹은 그러한 무의식의 지평 위에 내러티브라는 유사 플랫폼을 가설하는 일이다. 이때의 플랫폼이 마침내 오/작동하기 시작할 때, 무의식은 다시금 기억의 더께 아래 파묻힌다. 무엇보다 《Random Play》의 사례가 암시하듯, 그 과정에서 무수한 파편들은 ‘장치’들의 구도를 빌어 나름의 조형성을 획득한다. 혹은 그러기 위한 매체 차원의 실험을 계속한다. 설사 이때의 실험이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기계가 초래한 무의식의 지옥도를 유보한 채, 우리가 파편이라는 단위 자체에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물론 그 이후에 작업 차원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소 무책임한 결론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새롭게 호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서술할 의도가 없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내러티브의 무의식: 반에세이적 태도에 대하여」
권시우
내러티브와 서사는 동의어가 아니다. 혹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내러티브는 서사를 발생시키기 위해, 특정한 매체 차원에서 재/배치된 일련의 ‘장치’들이 형성하는 구도다. 시몽동에게 있어서 ‘장치’가 지배 체제의 권력 기제를 구성하고, 심지어 (철학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현실의 텍스트로 드러내는 개념적 수단이었다면, 내가 상정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장치’는 이데올로기적 기계와는 무관하다. 이때의 ‘장치’는 앞서 서술했듯 일련의 매체들에 귀속돼 있거나, 그것들로부터 각기 다르게 파생된다. 그렇다. 내가 임의대로 구상한 ‘장치’에 관한 가설에서, 매체라는 비/물리적인 단위는 ‘장치’로 대변되는 무수한 세부들로 구성돼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칙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애초의 (매체를 규정하던) 구도는 매번 달라진다.
그렇다면 ‘장치’를 설명하기 위해, 왜 굳이 내러티브가 필요한가? 앞선 질문은 틀렸다. 나에게 있어서 ‘장치’는 단순히 매체 이론을 숙고하던 과정에서 떠오른 게 아니라, 내러티브를 서사와 동의어로 착각하는 통념에 대한 나름의 반론을 펼치기 위해 고안된 개념적 수단이다. 그 과정에서 매체는 내러티브라는 보다 광범위한 범주, 혹은 시몽동의 맥락과는 또 다른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기계를 작동시키는 데 동원된다. 내러티브가 이데올로기적 기계인 이유는, 그것이 서사를 발생시키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명하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서사는 그 이전에 간략한 메모나, 스크립트, 구어, 그 이외의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했건, 실제로 존재한 게 아니고, 오로지 내러티브에게 호명 받은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성스러운 세례식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앞서 굳이 이데올로기적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내러티브가 서사를 호명하는 과정은, 단순히 ‘이름’을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바로 그 ‘이름’에 부합하는 복합적인 구조체를, 온갖 ‘장치’들을 동원하여 생산하고, 마침내 작동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로써 서사는 내러티브에 의해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소한 서사와 관련해서는) 형식보다 정체성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서사가 내러티브의 무의식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서사물들, 특히나 국내 미술계에서 생산된 무빙 이미지 작업들 대다수가 에세이 영화를 표방하거나, 그것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는 상황의 기저에는, 그렇게 구현될 수 밖에 없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당대는 더 이상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웹상에 산개한 무수한 데이터들, 혹은 데이터라는 다소 중립적인 표현을 빌어 선뜻 자신을 합리화하는 가상의 컨텐츠들은, 신자유주의의 맥락에 걸맞게 그저 스스로를 판촉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컨텐츠는 곧 재화라는 오래된 격언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통용됐던 전자 민주주의라는 표어를 앞질러, 혹은 그것과 제휴한 채, 너무도 노골적으로 실현되는 중인 것이다. 일련의 사용자들은 자신의 재화, 즉 가상의 컨텐츠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수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지어 현실의 리얼리티에 호소하기까지 한다. 단적인 예로 최근 사용자들 사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유통되는 유튜브 컨텐츠 중 하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인해 발생한 전쟁의 참화를 거의 실시간으로 담아낸 영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해당 영상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를 토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것이 손쉽게 컨텐츠로 구실할 수 있는 상황에서, 새삼 사유의 가치를 재고하고 싶을 뿐이다. 즉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반드시 미디어 통제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증언하는 영상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사유를 정지한다.
사유를 정지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리얼리티’에 경도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리얼리티’에 경도된 스스로를 윤리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은 생각보다 손쉽다. 어떻게 전쟁의 참화를 실제로 목격한 이미지에 그토록 열광할 수 있는가? 이는 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대상화를 전제한 채, ‘그들’이 체감하는 폭력을 일종의 게임 임팩트(game impact)로 소비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누군가가 앞서 언급한 이미지를 컨텐츠로 소비하는 행위를 멈춘다고 해서, 자연스레 그의 사유가 정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단 불매를 실행에 옮긴 이후에도 누군가는 충분히 이미지와 관련된 사유, 이를테면 이미지가 나에게 의사-다큐멘터리로서 증언하는 ‘사실’을 섣불리 외면한 것은 아닌지, 그러한 ‘사실’이 연대의 촉매가 되지는 않을지, 계속 머리를 싸맬 수 있다. 그리고 종내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한 과정을 과연 사유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사적인 고민의 무작위한 파편들일 뿐, 사유의 맥락을 형성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토록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민의 파편들을 온전히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사유는 맥락을 통해서든, 엄청나게 장황한 언어를 통해서든, 개인이 독해 가능한 범주로 제시돼야만 한다. 그러한 전제는 어떤 변증법을 구사하든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유일한 판단에 의해, 마침내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사유를 정지하기에 이른다. 달리 말해 그는 더 이상 고민의 파편들을 특정한 사유로 맥락화할 의지를 잃어버렸다.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지금의 에세이 영화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에세이 영화라는 장르는 본래 사유의 맥락 속에서, 단순히 사적인 고민에 제한되지 않는 다양한 생각의 파편들을 영상 차원에서 운용한다. 그러나 지금의 에세이 영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사유의 맥락과 무관한 파편들, 그리고 그것들을 반영하는 이미지다. 달리 말해 이때의 이미지는 파편의 속성을 빌어 무/의식적으로 영상 내외에서 혼란을 유발한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한 논의로 되돌아 오자면, 그러한 에세이 영화의 기저에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 혹은 그것의 무의식에서 사유는 복원되어야 할 어떤 개념적 대상에 가깝다. 즉 일련의 개인들은 사유를 자발적으로 정지시켰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와 무관한) 파편의 역학은 지속되며, 그러한 혼란 속에서 은연 중에 사유를 재개할 여지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파편의 역학은 지금 시점에서 너무나 보편적이다. 물론 나는 앞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예시로 들면서, 어찌됐든 그것을 컨텐츠로 소비하는 개인의 윤리성에 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갔지만, 사실상 대다수는 그러한 표본적 개인과 달리 자신이 미디어 차원에서 행사하는 폭력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 즉 사유를 복원하려는 무의식적 욕구는 그나마 ‘진보적’이라 할 만한, 혹은 점차 (컨텐츠 소비에 최적화되지 않은) 구세대로 분류되는 이들에게 부가된 집단적인 트라우마에서 비롯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지금의 에세이 영화의 경향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에세이 영화, 혹은 그에 기반한 영상 작업들은 사유의 맥락으로 도저히 봉합할 수 없는 각기 다른 파편들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정여름의 <그라이아이>(2020)는 용산 미군 기지라는 특정한 장소의 역사성을 의도적으로 유예시킨다. 작중에서 그곳은 화자와 같은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그저 지도 인터페이스를 통해 말 그대로 조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 발생하는 조감의 시점은 (마치 군사용 드론처럼) 어떤 감시-권력을 전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일종의 오픈 소스 이미지와 마주하는, 지금으로써는 너무도 흔한 경험을 초래할 뿐이다. 즉 화자는 그곳이 오로지 이미지를 매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 어쩌면 그러한 과정이 특정한 장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서사를 주도하고 있는)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지는 않는지 자문한다. 미지의 영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미지다. 혹은 그렇게 체감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권한에 따라, 해당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이를테면 용산 미군 기지에서 촬영된 브이로그와 같은 허황된 데이터 파편들로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로써 우리는 미지의 영역, 혹은 그것이 제기하는 의문에 파편들로 답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파편들이 초래한 혼란 속에서 사유는 다시금 정지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반드시 윤리성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즉 파편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내러티브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단지 끊임없이 경합하면서 사유로 거듭나기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무빙 이미지 작가들은 에세이 영화를 은연 중에 오독하고 있다. 즉 기존의 에세이 영화가 특정한 사유를 제기하기 위해 파편들을 능동적으로 운용한다면, 그에 대한 오독의 과정은 사회적 내러티브의 무의식 그 자체를 재현하거나,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마침내 현실로 호명하기를 의도한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당대에 부합하게끔 호명된 서사의 정체성이다.
이때의 ‘에세이’를 내용 차원에서 독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심지어 그것은 정신분석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주지하듯 ‘에세이’가 담보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현실로 호명하려는 내적인 욕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사회에서 무의식은 더 이상 은폐된 기억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드러난 사실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손쉽게 사회의 병폐로 치부하는, 그러나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온갖 부조리한 이해 관계들은 다름아닌 무의식의 소산이다. 혹은 그간 (후기 자본주의 이후에 축적된) 기억의 더께에 덮여있던 무의식이 마침내 현실의 지반 위로 드러난 결과다. 우리는 그러한 재난적 상황에서 섣불리 탈출하려는 대신, 오히려 그것에 과도하게 적응함으로써 재난을 거듭 일상화한다. 이를테면 전방위한 미디어 환경에서 유통되는 온갖 재난 영상의 대다수는, 바로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재/생산한 이미지에서 비롯하며, 이때의 이미지는 단순히 윤리적으로 왜곡된 대상이라기보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심상’이다. 그리고 ‘심상’은 기어코 현실로 분출하고, 재난을 조장하고, 우리는 또 다시 재난과 마주하기를 반복한다, 기타 등등. 만약 그것이 진정 윤리적으로 왜곡됐다면, 세계는 이미 한 번쯤 멸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반복적으로 엄습하는 재난은, 그러한 가정에 대한 거부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이 모든 과정은 한 개인에게 내재된 무의식 차원의 지옥도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분명 지금의 세계는 한 개인으로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무려 정신의학적으로 진료해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외상에 대한 플래시백, 즉 파편으로 현전하는 무수한 이미지들만으로 세계의 트라우마를 완화시킬 수는 없다. 물론 ‘에세이’에겐 진료에 대한 의무가 없지만,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치료를 유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단지 무의식으로부터 재차 서사를 호명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와 무관한 진료의 수순들은 현실 정치에서 모색하기로 하자.) 그러한 맥락에서 이제 ‘에세이’에 기반한 일련의 작업들은, 나를 포함한 모두가 목격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무의식을, 순전히 내러티브의 방식으로 재편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장치’들이 소환된다. 즉 ‘에세이’는 일련의 ‘장치’들로 어떤 구도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은 유지한 채, 순전히 형식적인 차원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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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영화에 대한 오독의 과정은 점차 끝나가고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엄연히 공적인 사안으로 등재됐으며, 그에 따라 그것을 무의식 차원에서 환기하기 위한 플래시백의 유효기간도 자연스레 만료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우리는 여전히 재난을 되풀이하고, 세계는 그 과정에 병리적으로 반응한다. 본문에서 언급했듯, 나는 미래를 섣불리 낙관하고 싶지 않다. 아마도 당분간 효과적인 처방은 없을 것이다.
송다슬 개인전 《Random Play》(2021)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다. 작가는 자신의 ‘심상’이 반영된 이미지, 즉 서사에 대한 호명에 온갖 파편들로 답한 결과물을 전시장에 산개시킨다. 물론 일련의 이미지들은 시각적인 차원에서 미묘하게 다르지만, 앞서 언급했듯 (더 이상 사유로 귀결되지 않는) 파편을 최소 단위로 삼는다는 점에서 모두 유사한 맥락 속으로 편입된다. 이때의 맥락이란 결국 ‘에세이’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에세이’는 서사의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만 ‘설치’라는 다소 모호한 매체를 구현하기 위한 각기 다른 요소들, 이를테면 라이트 박스나 프로젝션, 커튼과 같은 비/물리적인 ‘장치’들이 형성하는 구도로 현전할 뿐이다. 그러한 구도는 내가 서두에서 언급했던 내러티브의 정의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해당 내러티브를 스크린에 국한되지 않는 실제 경험의 차원에서 제시하기에 이른다. 즉 우리는 스크린의 전경으로부터 탈출한 이미지가, 스크린을 포함한 일련의 ‘장치’들을 빌어 발생시킨 서사의 현장 속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송다슬, 《Random Play》, 전시 전경, 2021 (사진 촬영: 생동 스튜디오)
그러나 그곳은 서사 자체를 누설하지 않는다. 혹은 애초에 누설할 필요가 없다. 주지하듯 내러티브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호명한 결과로서의 서사만을 재/생산한다. 설사 특정한 ‘장치’가 구체적인 대상으로 발견되더라도, 그것과 동기화된 이미지는 또 다시 무의식을 호명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사를 가늠하려는 시도를 그만둬야 한다. 사실 서사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심지어 서사에 대한 사유는, 그로부터 발생한 파편들에 휩쓸린 채, 언젠가 자발적으로 중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만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현실로 드러난 무의식을 토대로, 혹은 그러한 무의식의 지평 위에 내러티브라는 유사 플랫폼을 가설하는 일이다. 이때의 플랫폼이 마침내 오/작동하기 시작할 때, 무의식은 다시금 기억의 더께 아래 파묻힌다. 무엇보다 《Random Play》의 사례가 암시하듯, 그 과정에서 무수한 파편들은 ‘장치’들의 구도를 빌어 나름의 조형성을 획득한다. 혹은 그러기 위한 매체 차원의 실험을 계속한다. 설사 이때의 실험이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은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기계가 초래한 무의식의 지옥도를 유보한 채, 우리가 파편이라는 단위 자체에 주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물론 그 이후에 작업 차원의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소 무책임한 결론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새롭게 호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서술할 의도가 없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