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에 대한 여담: 서사의 외부를 지향하며」
권시우
현대미술 차원에서 통용되는 텍스트는 ‘실험적 글쓰기’의 맥락과는 다르다. 그것은 형식의 변주라기보다, 텍스트 차원에서 서술된 내용에 주목한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를 섣불리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와 별개로 현대미술이 텍스트를 전용할 때, 앞서 언급한 제휴는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지난 2010년대의 국내 미술계와 거의 제휴하다시피 했던 텍스트가 딱히 작업 차원에서의 실험을 추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의의는 그 당시에 새롭게 형성된 (신생공간을 발단으로 삼는) 미술의 지형을 둘러싼 주관적인 경험들을 내용으로 소화했다는 데 있다. 즉 <시청각 문서>로 대변되는 일련의 텍스트들은 대체로 에세이라는 형식을 고수한 채, 혹은 그러한 형식 내에서, 필자가 일상 차원에서 체감한 일종의 시대적 정황에 대해 토로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미술의 지형은 전지적으로 조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얽혀있는 무수한 개인들의 정황을 토대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비평적으로 재/구성될 만한 대상이라기보다, 그 당시에 광범위하게 공유됐던 일종의 에세이적 태도를 증언할 뿐이다. 이는 자연스레 인칭의 문제를 재고하게끔 만든다. 즉 에세이적 태도가 1인칭 시점에서 비롯한다는 다소 고루한 발상은, 우리가 국내 미술계의 특정한 국면에서 에세이라는 형식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기꺼이 승인된다. 애초에 에세이는, 특히나 그것을 영화적인 의미에서 추론했을 때, 무엇보다 1인칭을 포함하는 다양한 시점들에게 개방된 형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에세이 영화가 내러티브의 중심을 문제시하기 위한 기획 속에서 와해된 시점은, 그 자체로 작업의 동력으로 기능하면서, 종내 다방면에서 포착 가능한 서사적 풍경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시청각 문서>의 기획은, 그것에 참여한 각기 다른 개인들 사이의 정서적인 유대를 조성하는 텍스트의 형식을 에세이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에세이는 사실상 (아카이브로 수렴되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향한다기보다, 그 당시의 현재를 주관성의 영역으로 합리화하려는 충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전지적이라고 표현했던, 그 당시에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낸 스마트폰-시점과 불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마트폰-시점이 언제나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은 주관성의 영역을 토대로 구축된 내러티브를 해체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내러티브가 오로지 1인칭으로 수렴되는 내용만을 반복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그것의 정서에 동화할 수 있는 개인들을 ‘지금 여기’에 회집했다면, 스마트폰-시점은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인칭을, 자신의 고유한 시각성으로 환원한다. 그러므로 이제 인칭은 개인이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시점의 레이어들로 식별되며,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의 감각은 점차 무효화된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라는 개념은, 현재가 담보하고 있는 불확실한 시간을,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으로 봉합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에게 현전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즉 이미 시점의 레이어들을 체화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주관성을 일관되게 고수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다중화된 시점으로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현재는 단순히 개인에게 현전하는 게 아니라, 개인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대상으로 거듭난다.
어찌됐든 우리가 2010년대의 국내 미술계를 섣불리 회고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당시의 개인들이 ‘지금 여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록이 아닌) 기억과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 속에서 기억을 다시금 현전시키기 위한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애초에 기억의 현전에만 의존하는 회고의 방식은 ‘지금 여기’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자극할 뿐, 과거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의지를 거스른다. 그렇다면 이때의 입체적이라는 수사는, 불가능한 회고를 청산한 이후의 미술이 전개하게 될 ‘실험적 글쓰기’의 미래를 예고하는가?
나는 그에 대한 징후로, 오민이 자신의 작업 안팎에서 활용하는 텍스트를 제시하고 싶다. 물론 그것은 소셜 미디어와 연동된 사용자의 감각과 무관하지만, 그와 별개로 언제나 비선형적인 서사의 양상, 혹은 서사가 비선형적으로 거듭나는 양상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둘러싼 광의의 내러티브와 공명한다. 그러나 작가가 기획한 일련의 저작들은 ‘실험적 글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플랫폼에 가깝다. 이를테면 『토마』(2021)와 같은 저작은, 작가가 의문에 부친 비/선형의 문제에 화답하는 다양한 비평적 에세이들이 수록된 앤솔로지이며, 대개의 앤솔로지가 그러하듯, 역시나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애초의 의문은, 그것을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논의의 전개 속에서 점차 희석된다. 이는 앤솔로지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인 동시에, 비평적 에세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한계를 드러낸다. 즉 비평적 에세이는 자신이 염두하고 있는 논지를 해명하는 대신, 그것을 발단으로 삼아 에세이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의 서두에 등장하는 동명의 “실체 없는 인물”은, 작가가 조성한 플랫폼을 장악한 채, 그 안에서 갈수록 풍부해지는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자아를 확립한다.
이는 결국 『토마』라는 텍스트가 점유하고 있는 에세이로서의 위상을 암시한다. 물론 ‘토마’는 1인칭을 토대로 구축된 인물이 아니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의 예술에 편재한 서사의 관습을 비평적으로 의심하는 특정한 개인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선형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최소한의 논의와 ‘토마’의 주관적인 견해는 암묵적으로 동일시된다. 이를테면 비평적 에세이가 자신의 객관성을 보증하기 위해 인용한 레퍼런스들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실체 없는 인물”이 점유하고 있는 불확실한 실존의 영역으로 수렴되며, 그 과정에서 ‘토마’로 대변되는 허구적인 주체를 갈수록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렇다. 에세이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물”에 의해 서술된 담화가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혹은 논픽션에 의해 재/구성된 픽션을 빌어, 화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주체를 새롭게 규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방식은 마냥 새롭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주체는 사실상 에세이 영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에세이 영화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실체 없는 인물”은, 서사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안팎을 넘나드는 파편적인 담화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모색한다. 그리고 이는 파편적인 담화에 선뜻 가담한 논/픽션의 요소들이, 그것들 사이의 역학에 부합하는 주체성을 논증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모든 에세이 영화가 그러한 논증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은 에세이 영화의 서사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징후에 가깝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토마』를 포함한 일련의 저작들이, 에세이 영화에서 암암리에 통용되는 주체성의 문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에세이가 고수하고 있던 1인칭을 개념적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장된 의미에서의 1인칭은, 더 이상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이, 사실상 주체성과 무관한 온갖 여담들로 자신의 존재론적 공허에 대응하는 과정을 수용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사는 마침내 비선형적으로 구현된다. 이는 단순히 파편적인 담화의 형식을 답습한 결과가 아니라, 지금의 1인칭 화자가 자신에게 할당된 내용을 여담의 영역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를테면 정지돈의 소설로 대변되는 후장사실주의는 대개 서사의 외부에서 인용한 레퍼런스들을 둘러싼 담화를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개인에게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 자의식을 벌충한다. 즉 이때의 개인은 다름 아닌 서사의 외부와 매개됨으로써 자신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 자체와 무관한 여담은 개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처럼 후장사실주의 문학은, 단순히 레퍼런스를 포함한 지식의 체계에 심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여담 차원에서 전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서사의 내적인 파열을 의도한다기보다, 갈수록 확장하는 여담의 영역 속에서, 더 이상 서사를 온전히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선형적인 서사는,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내용을 영원히 유보한 채, 오로지 감각을 매개로 현전하기에 이른다. 오민이 기획한 또 다른 저작인 『포스트텍스처』(2022)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덩어리적인 시간’이라는 가설은, 확실히 그러한 현전의 감각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토마』에서 제기됐던 비/선형의 문제는 종내 “선의 소멸”을 초래했으며, 그에 따라 시간은 선적인 구획에서 비롯한 위계에서 벗어나, 마침내 덩어리라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응집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폴디드Folded>(2022)에 등장하는 스태프들은 영상 내에서 무언가를 연출하기 위해 줄곧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정작 그 무언가의 정체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즉 무언가는 일종의 맹목적인 수행을 유도하는 장치로, 그것에 의해 개방된 시간의 흐름은 몽타주 차원에서 재/구성된 채, 관객의 시점視點을 교란한다.
오민, 『포스트텍스처』, 작업실유령, 2022
그러나 이때의 몽타주는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초래할 ‘새로운 의미’를 소거하는 과정에 가깝다. 즉 해당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무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지속적으로 유보하기 위해, 역으로 몽타주적인 시간을 도입하는 방식이며, 이로써 애초에 몽타주가 의도했던 대립과 모순의 관계는 그저 혼란스런 상태로 희석되고 만다. 문제는 그러한 혼란이 단순히 서사 차원에서 발생한 의미론적인 파열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의 무의미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관객은 무/의미에 대한 논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일련의 영상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시점의 역학 속에서, 무의미가 현전하는 상태를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간은 마침내 엄격하게 조율된 다성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그것의 총체적인 형태만을 가늠할 수 있는 덩어리로 등장한다.
즉 ‘덩어리로서의 시간’은 그것을 독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일종의 제스처로, 단지 개인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압도함으로써, 지금까지 논의했던 비/선형의 문제를 종식시킨다. 이는 다시금 후장사실주의가 조성한 여담의 영역을 재고하게끔 만드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갈수록 확장하면서 내용을 초과하는 방식은, 문학을 포함한 텍스트가 더 이상 자체적으로 서사를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담이 의존하는 서사의 외부는, 역으로 여담에 의해 그간 자신이 유지하고 있던 체계가 와해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는 결국 서사의 외부와 매개된 개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킨다. 이로써 개인은 또 다시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 채, 마침내 서사적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텍스트를 전개하는 화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애초에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말소된 상황에서,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화자를 자처할 수 있을까? 결국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구현하는 현전의 감각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개인을 호명한다는 점에서, 주체성의 복원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기존의 1인칭 화자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주체에 선행하는 새로운 서사의 형식으로부터, 그에 부합하는 화자를 연역해내는 과정에 가깝다.
이로써 비/선형의 문제는 재개된다. 다만 그것은 이제 텍스트에 편재해 있는 서사적인 징후들을 단서 삼아, 한때 실체가 없다고 판명된 개인을 비선형적으로 추론해 나간다. 이는 결국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현전하게끔 만든 무의미를 서사화하는 방식이나 다름없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물론 우리라는 범주가 아직까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다시금 화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즉 이때의 화자는 사실상 주체와 무관해 보이는 서사를 토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마침내 서사의 외부로 돌출하기에 이른다. 즉 당대에서 통용되는 서사는 대개 주체에 대한 여담으로 귀결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그러한 여담을 주체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주체에 대한 여담: 서사의 외부를 지향하며」
권시우
현대미술 차원에서 통용되는 텍스트는 ‘실험적 글쓰기’의 맥락과는 다르다. 그것은 형식의 변주라기보다, 텍스트 차원에서 서술된 내용에 주목한다. 물론 형식과 내용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를 섣불리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와 별개로 현대미술이 텍스트를 전용할 때, 앞서 언급한 제휴는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지난 2010년대의 국내 미술계와 거의 제휴하다시피 했던 텍스트가 딱히 작업 차원에서의 실험을 추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의의는 그 당시에 새롭게 형성된 (신생공간을 발단으로 삼는) 미술의 지형을 둘러싼 주관적인 경험들을 내용으로 소화했다는 데 있다. 즉 <시청각 문서>로 대변되는 일련의 텍스트들은 대체로 에세이라는 형식을 고수한 채, 혹은 그러한 형식 내에서, 필자가 일상 차원에서 체감한 일종의 시대적 정황에 대해 토로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미술의 지형은 전지적으로 조감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얽혀있는 무수한 개인들의 정황을 토대로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비평적으로 재/구성될 만한 대상이라기보다, 그 당시에 광범위하게 공유됐던 일종의 에세이적 태도를 증언할 뿐이다. 이는 자연스레 인칭의 문제를 재고하게끔 만든다. 즉 에세이적 태도가 1인칭 시점에서 비롯한다는 다소 고루한 발상은, 우리가 국내 미술계의 특정한 국면에서 에세이라는 형식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기꺼이 승인된다. 애초에 에세이는, 특히나 그것을 영화적인 의미에서 추론했을 때, 무엇보다 1인칭을 포함하는 다양한 시점들에게 개방된 형식에 가깝다. 이를테면 에세이 영화가 내러티브의 중심을 문제시하기 위한 기획 속에서 와해된 시점은, 그 자체로 작업의 동력으로 기능하면서, 종내 다방면에서 포착 가능한 서사적 풍경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시청각 문서>의 기획은, 그것에 참여한 각기 다른 개인들 사이의 정서적인 유대를 조성하는 텍스트의 형식을 에세이로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에세이는 사실상 (아카이브로 수렴되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를 지향한다기보다, 그 당시의 현재를 주관성의 영역으로 합리화하려는 충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전지적이라고 표현했던, 그 당시에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낸 스마트폰-시점과 불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스마트폰-시점이 언제나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권한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것은 주관성의 영역을 토대로 구축된 내러티브를 해체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내러티브가 오로지 1인칭으로 수렴되는 내용만을 반복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그것의 정서에 동화할 수 있는 개인들을 ‘지금 여기’에 회집했다면, 스마트폰-시점은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인칭을, 자신의 고유한 시각성으로 환원한다. 그러므로 이제 인칭은 개인이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시점의 레이어들로 식별되며, 그 과정에서 ‘지금 여기’의 감각은 점차 무효화된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라는 개념은, 현재가 담보하고 있는 불확실한 시간을, 그것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으로 봉합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에게 현전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즉 이미 시점의 레이어들을 체화한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주관성을 일관되게 고수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다중화된 시점으로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현재는 단순히 개인에게 현전하는 게 아니라, 개인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대상으로 거듭난다.
어찌됐든 우리가 2010년대의 국내 미술계를 섣불리 회고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당시의 개인들이 ‘지금 여기’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기록이 아닌) 기억과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 속에서 기억을 다시금 현전시키기 위한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애초에 기억의 현전에만 의존하는 회고의 방식은 ‘지금 여기’에 대한 노스텔지어를 자극할 뿐, 과거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의지를 거스른다. 그렇다면 이때의 입체적이라는 수사는, 불가능한 회고를 청산한 이후의 미술이 전개하게 될 ‘실험적 글쓰기’의 미래를 예고하는가?
나는 그에 대한 징후로, 오민이 자신의 작업 안팎에서 활용하는 텍스트를 제시하고 싶다. 물론 그것은 소셜 미디어와 연동된 사용자의 감각과 무관하지만, 그와 별개로 언제나 비선형적인 서사의 양상, 혹은 서사가 비선형적으로 거듭나는 양상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둘러싼 광의의 내러티브와 공명한다. 그러나 작가가 기획한 일련의 저작들은 ‘실험적 글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플랫폼에 가깝다. 이를테면 『토마』(2021)와 같은 저작은, 작가가 의문에 부친 비/선형의 문제에 화답하는 다양한 비평적 에세이들이 수록된 앤솔로지이며, 대개의 앤솔로지가 그러하듯, 역시나 중요한 것은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달리 말해 애초의 의문은, 그것을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논의의 전개 속에서 점차 희석된다. 이는 앤솔로지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인 동시에, 비평적 에세이라는 형식에 내재된 한계를 드러낸다. 즉 비평적 에세이는 자신이 염두하고 있는 논지를 해명하는 대신, 그것을 발단으로 삼아 에세이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주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의 서두에 등장하는 동명의 “실체 없는 인물”은, 작가가 조성한 플랫폼을 장악한 채, 그 안에서 갈수록 풍부해지는 내용을 토대로 자신의 자아를 확립한다.
이는 결국 『토마』라는 텍스트가 점유하고 있는 에세이로서의 위상을 암시한다. 물론 ‘토마’는 1인칭을 토대로 구축된 인물이 아니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의 예술에 편재한 서사의 관습을 비평적으로 의심하는 특정한 개인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선형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최소한의 논의와 ‘토마’의 주관적인 견해는 암묵적으로 동일시된다. 이를테면 비평적 에세이가 자신의 객관성을 보증하기 위해 인용한 레퍼런스들은,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실체 없는 인물”이 점유하고 있는 불확실한 실존의 영역으로 수렴되며, 그 과정에서 ‘토마’로 대변되는 허구적인 주체를 갈수록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렇다. 에세이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물”에 의해 서술된 담화가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혹은 논픽션에 의해 재/구성된 픽션을 빌어, 화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주체를 새롭게 규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방식은 마냥 새롭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주체는 사실상 에세이 영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즉 에세이 영화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실체 없는 인물”은, 서사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안팎을 넘나드는 파편적인 담화의 전개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모색한다. 그리고 이는 파편적인 담화에 선뜻 가담한 논/픽션의 요소들이, 그것들 사이의 역학에 부합하는 주체성을 논증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모든 에세이 영화가 그러한 논증을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은 에세이 영화의 서사적 구조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징후에 가깝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토마』를 포함한 일련의 저작들이, 에세이 영화에서 암암리에 통용되는 주체성의 문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존의 에세이가 고수하고 있던 1인칭을 개념적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장된 의미에서의 1인칭은, 더 이상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이, 사실상 주체성과 무관한 온갖 여담들로 자신의 존재론적 공허에 대응하는 과정을 수용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사는 마침내 비선형적으로 구현된다. 이는 단순히 파편적인 담화의 형식을 답습한 결과가 아니라, 지금의 1인칭 화자가 자신에게 할당된 내용을 여담의 영역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를테면 정지돈의 소설로 대변되는 후장사실주의는 대개 서사의 외부에서 인용한 레퍼런스들을 둘러싼 담화를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은 개인에게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 자의식을 벌충한다. 즉 이때의 개인은 다름 아닌 서사의 외부와 매개됨으로써 자신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 자체와 무관한 여담은 개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처럼 후장사실주의 문학은, 단순히 레퍼런스를 포함한 지식의 체계에 심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여담 차원에서 전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서사의 내적인 파열을 의도한다기보다, 갈수록 확장하는 여담의 영역 속에서, 더 이상 서사를 온전히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그러므로 이제 비선형적인 서사는,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내용을 영원히 유보한 채, 오로지 감각을 매개로 현전하기에 이른다. 오민이 기획한 또 다른 저작인 『포스트텍스처』(2022)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덩어리적인 시간’이라는 가설은, 확실히 그러한 현전의 감각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토마』에서 제기됐던 비/선형의 문제는 종내 “선의 소멸”을 초래했으며, 그에 따라 시간은 선적인 구획에서 비롯한 위계에서 벗어나, 마침내 덩어리라는 불가해한 대상으로 응집되기에 이른다. 실제로 <폴디드Folded>(2022)에 등장하는 스태프들은 영상 내에서 무언가를 연출하기 위해 줄곧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정작 그 무언가의 정체는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즉 무언가는 일종의 맹목적인 수행을 유도하는 장치로, 그것에 의해 개방된 시간의 흐름은 몽타주 차원에서 재/구성된 채, 관객의 시점視點을 교란한다.
오민, 『포스트텍스처』, 작업실유령, 2022
그러나 이때의 몽타주는 충분히 변증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초래할 ‘새로운 의미’를 소거하는 과정에 가깝다. 즉 해당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무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지속적으로 유보하기 위해, 역으로 몽타주적인 시간을 도입하는 방식이며, 이로써 애초에 몽타주가 의도했던 대립과 모순의 관계는 그저 혼란스런 상태로 희석되고 만다. 문제는 그러한 혼란이 단순히 서사 차원에서 발생한 의미론적인 파열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의 무의미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관객은 무/의미에 대한 논증의 과정을 생략한 채, 일련의 영상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시점의 역학 속에서, 무의미가 현전하는 상태를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간은 마침내 엄격하게 조율된 다성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그것의 총체적인 형태만을 가늠할 수 있는 덩어리로 등장한다.
즉 ‘덩어리로서의 시간’은 그것을 독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일종의 제스처로, 단지 개인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압도함으로써, 지금까지 논의했던 비/선형의 문제를 종식시킨다. 이는 다시금 후장사실주의가 조성한 여담의 영역을 재고하게끔 만드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갈수록 확장하면서 내용을 초과하는 방식은, 문학을 포함한 텍스트가 더 이상 자체적으로 서사를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담이 의존하는 서사의 외부는, 역으로 여담에 의해 그간 자신이 유지하고 있던 체계가 와해되는 과정에 있으며, 이는 결국 서사의 외부와 매개된 개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축소시킨다. 이로써 개인은 또 다시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 채, 마침내 서사적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에서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텍스트를 전개하는 화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애초에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말소된 상황에서, 과연 누가 혹은 무엇이 화자를 자처할 수 있을까? 결국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구현하는 현전의 감각은, 그것을 경험하기 위한 개인을 호명한다는 점에서, 주체성의 복원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기존의 1인칭 화자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주체에 선행하는 새로운 서사의 형식으로부터, 그에 부합하는 화자를 연역해내는 과정에 가깝다.
이로써 비/선형의 문제는 재개된다. 다만 그것은 이제 텍스트에 편재해 있는 서사적인 징후들을 단서 삼아, 한때 실체가 없다고 판명된 개인을 비선형적으로 추론해 나간다. 이는 결국 ‘덩어리로서의 시간’이 현전하게끔 만든 무의미를 서사화하는 방식이나 다름없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물론 우리라는 범주가 아직까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다시금 화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즉 이때의 화자는 사실상 주체와 무관해 보이는 서사를 토대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마침내 서사의 외부로 돌출하기에 이른다. 즉 당대에서 통용되는 서사는 대개 주체에 대한 여담으로 귀결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그러한 여담을 주체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