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 『유닛 이후의 세계』

권시우 「《조각 충동》에 대한 화답(2):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되는가?」

「《조각 충동》에 대한 화답(2):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되는가?」


권시우


지금 시점에서 조각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는 분명 다양한 맥락들이 교차한다. 이를테면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가 여성 조각가들의 계보를 다방면에서 탐구하고, 그 과정을 전시 차원에서 재/조명했을 때, 조각의 의미는 반드시 매체로 소급되지 않는다. 즉 이때의 조각이란, 여성과 조각가라는 정체성을 병행하면서 한국 근대 미술사를 각기 다르게 경유해온 참여 작가들에 대한 유사 기념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기념비를 가능하게끔 만든 일련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기능한다. 이는 ‘오늘이 있기까지’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당대의 조각(성)이 단순히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그것에 다다르기까지의 비/연대기적인 역사가 전제돼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에서 통용되는 매스mass는 특정한 재료의 산물에 그치는 대신, 역사의 파고 속에서 조형된, 지금도 조형 중인 ‘조각 특정적인 성질’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2022) 전경, 사진 = Wess.seoul 제공


즉 조각은 자신에 관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함축하고 있는 알레고리적 대상이다. 《조각 여정》에 수록된 ‘조각 여정 일지’에서 열람할 수 있는 여성 조각가들과의 인터뷰는, 그러한 역사가 조각가 개인과 어떤 방식으로 공명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는 《조각 충동》이 개괄한 당대의 조각적 경향와 암묵적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단순히 각각의 전시에서 제시된 작업들 사이의 시차 때문이 아니라, 조각에 대한 상이한 태도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조각 충동》으로부터 고유한 역사성을 추론해내려는 시도는 불발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본 전시에 포함된 일련의 작업들은 역사를 굳이 의식하고 있지 않거나, 순전히 조형적인 차원의 재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조각 충동》에서의 조각은 스마트 미디어가 보편화된 이후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미지라는 형식과 연루된 채, 스스로를 ‘새롭게’ 재편할 뿐이다.


이로써 당대의 조각은 역사와 의도적으로 단절된다. 물론 곽인탄과 같은 작가는 여전히 미술사의 맥락을 조각에 개입시키지만, 그 과정은 반드시 역사적인 이해관계를 준수하지 않는다. 본 전시에서 제시된 <어린이 조각가>에서 그러한 특징은 한층 부각되는데, 이를테면 미술사에서 발췌한 각종 도상들은 작가의 사적인 기억들과 다소 무작위하게 뒤섞인 채, 레진 점토로 형상화된다. 즉 작가는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차원에서 전개되는 유희의 과정에 부합하기 위해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는 유연한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작업은 각종 도상들을 표현주의의 맥락으로 수렴한 채, 역사적인 이해관계에 구애받지 않는, 거의 조건 반사에 가깝게 구사되는 자유로운 조형적 방법론을 확보한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어린이의 형상은 작가가 미술사의 맥락을 말 그대로 유희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곽인탄, <어린이 조각가>(2022), 사진 =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제공


해당 작업은 자연스레 우리가 사용자로서 역사를 대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 이제 역사는 아카이브의 형식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아카이브를 초과하는 광범위한 데이터의 범주에 귀속된 채, 온갖 정크한 데이터 파편들과 의도치 않게 제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역사의 가치가 폭락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데이터의 범주 속에서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역사적 아카이브가,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기존의 연대기적인 서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미술사에서 주요한 작업들은 이제 네트에 산개한 이미지의 단편들로 손쉽게 가늠되며, 사용자는 그러한 단편들을 재료 삼아 ‘왜곡된 원본’을 시뮬레이션하기에 이른다. 물론 곽인탄은 ‘왜곡된 원본’을 문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에 의해 급진적으로 변화한 역사의 위상을 수용한 채,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각종 도상들을 가벼운 중량의 이미지처럼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는 사용자에 의해 마침내 이미지로 포착되며, 그러한 경향은 조각에 함축된 역사적 컨텍스트를 기록 및 보존하려는 《조각 여정》의 시도와 변별될 수 밖에 없다. 즉 전자를 조형의 원리로 삼는 조각 작업은, 그간 현대미술을 견인했던 역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에 최적화한 사용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이미지 차원에서 차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조각 충동》에서 제시된 또 다른 작업인 문이삭의 <A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문 이후>가 로댕의 <지옥의 문>을 재해석했다고 했을 때, 그 과정은 사실상 작가가 이전에 시도했던 연작들을 포괄하기 위한 프레임 구조를 <지옥의 문>의 이미지로부터 도출해낸 것에 가깝다. 굳이 이미지라고 표현한 이유는, 거대한 프레임 구조와 그 안에 배치된 세부 조각들의 양상을 제외하고, 해당 작업과 <지옥의 문> 사이에 별다른 조형적인 차원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이삭, <A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 문 이후>(2022), 사진 = visla 제공


그러나 이는 단순히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혹은 지금 시점에서 만연한 이미지라는 형식은, 역사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을 기꺼이 용인한 채, 역사적 컨텍스트를 미처 독해할 겨를이 없는 사용자의 관점을 나름대로 정당화한다. 문이삭은 그저 자신의 작업 세계를 망라하기 위한 프레임이 필요했을 뿐이고, 이미지로 현전하는 <지옥의 문>은 그러한 필요를 해결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을 만큼의 해상도를 지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조각 여정》이 한국 근대 미술사를 개괄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의 조각을 추동한 일련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주시했다면, 지금까지 언급한 작업들은 이미지로 소급되는 역사의 잔해들을 장치로 삼아 조각(성)을 유도함으로써, 조각적 매스의 텅 빈 내부를 암시한다. 그리고 이때의 텅 빈 내부는 《조각 여정》의 관점에서 봤을 때, 도저히 역사적으로 합의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체로 공허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최근 국내 미술계에서 나름대로 화제가 됐던 조각에 관한 두 전시는, 본의 아니게 역사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조각 충동》의 경우에는 어쩌면 역사에 대한 입장 자체가 부재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본 전시에서 중요한 것은, 전통 조각과 연대함으로써 ‘오늘’의 계보를 추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조각가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이 당대의 조각(성)을 어떻게 각기 다르게 구현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한 무대를 조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련의 작업들은 각자에게 내재된 고유한 프로토콜을 무대상에서 과시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이미지라는 형식에 부합하는 새로운 ‘조각적 상황’을 연출해냈다. 만약 그 과정에서 아직도 역사의 잔여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결국 역사와 관련된 이미지에서 착안한 일종의 파사드facade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사용자를 자처하는 대다수는, 그러한 파사드를 경유해 역사로 진입할 의도가 없다.


물론 본 전시가 조성한 무대가 막을 내린 이후에도, 일련의 작업들이 ‘조각적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조각적 상황’은 조각을 사용자의 관점에서 경험하게끔 유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미지를 매개로 역사를 수렴하는 방식을 통해, 데이터 범주에 귀속된 역사의 현존성을 자문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무엇보다 후자의 맥락은 《조각 여정》이 염두하고 있는 역사와 의도치 않게 교차하면서, 마침내 ‘오늘’을 명시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즉 조각을 발단 삼아 전개된 서로 다른 여정은, 미술계에서 그 어느때보다 번성하고 있는 역사주의의 국면을 효과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사용자가 역사를 기꺼이 남용하는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계보는 사용자의 무분별한 자율성을 제약한다. 만약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언젠가 역사주의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