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 『유닛 이후의 세계』

권시우「《조각 충동》에 대한 화답(1): 무대화하는 조각? 」


「《조각 충동》에 대한 화답(1): 무대화하는 조각? 」


권시우


지금 시점에서 만연한 ‘조각 충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굳이 충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조각이 아닌 매체마저 자기 나름의 조각성을 선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조각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상 매체마저 그러하다. 이를테면 최근의 몇몇 괄목할만한 영상 작업들은 갈수록 서사를 축약한 채, 특정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송출하는 디바이스를 부각한다. 듀킴의 연작을 그에 대한 예시로 들 수 있을 텐데, 해당 작업이 제시하는 아이돌에 대한 일종의 카피캣copycay으로서의 가짜-자아의 문제와 별개로, 그것을 상연하고 있는 각종 디바이스는 설치(물)에 가깝게 구현된다. 즉 디바이스를 관통한 화살촉은 액정 상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에 따라 디바이스 상에서 상연 중인 영상은 의도적으로 소외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컨텐츠로서의 영상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디바이스가 물성을 획득한 채,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다.


물론 조각과 설치를 동일한 매체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왜냐하면 후자가 일련의 비/물리적인 장치들을 가변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은, 자칫 조각이라는 매체에 응축된 고유한 물성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의 “고유한 물성”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를테면 그것은 포스트-매체 이후의 상황에서 갈수록 상호 교차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매체성을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즉 조각은 설치가 아니지만, 얼마든지 설치의 방법론을 능동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고유한 물성”을 해제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매체를 막론한 ‘조각 충동’은, 그런 식으로 조각이 (포스트-매체를 발단 삼아)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수렴하기 위한 경향일 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지금의 조각은 단일한 매체로서 유효하다기보다, 모든 매체를 포괄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적 장場으로 기능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설치 자체가 아니라, 설치의 방법론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조각을 옹호하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지금의 조각이 새로운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만연한 이미지의 생태계에 대응해 자신의 “고유한 물성”을 위반하거나, 해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듀킴의 연작에서 디바이스는 (영상 컨텐츠를 송출하는) 물성을 지닌 오브제로 부각되지만, 그것은 사실상 작가에게 할당된 전시장의 한 구간에서 특정한 구도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즉 일련의 오브제들은 서로를 지시하는 과정에서 ‘관계적 상태’를 형성한 채,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의사-무대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기표들의 유희 같은 게 아니라, 그간 개별 오브제에 함축돼 있던 의미를 분산시키는 과정에 가깝다. 결국 관객은 ‘관계적 상태’에 참여한 채, 그 속에서 거듭 유보되는 의미의 회로를 가늠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앞서 언급한 인터페이스적 장場과 대응될 만하다. 즉 인터페이스라는 형식은 오로지 기표만을 호명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과정에서 ‘관계적 상태’를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조각을 포함한 모든 객체를 인식론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의 제스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객체의 함의가 아니라, 객체가 우리를 향해 전방위하게 노출하고 있는 각기 다른 단면들이 비로소 이미지로 전환되는 순간이며, 이때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독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계적 상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페이스에 의해 호명된 기표는 조각 차원에서 이미지를 수용하기 위한 발단이다. 즉 그것은 ‘관계적 상태’라는 비/가시적인 인프라를 구축한 채, 이미지가 그 속에서 조각의 재료로 소비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 이로써 조각은 설치와 변별되는데, 이를테면 후자는 인터페이스적 장場을 딱히 염두하지 않은 채, 그저 일련의 장치들에 의해 활성화된 기표들의 유희에 과도하게 몰입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조각은 인터페이스라는 형식을 통해 기표들이 난립하는 상황을 나름대로 통제하고, 이를 토대로 이미지의 생태계에 부합하는 객체를 조형한다. 물론 기표들이 형성하고 있는 인프라는 공허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곳’으로부터 도출해낸 이미지들은 서로를 의미론적으로 매개하지 않거나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 충동》에 포함된 몇몇 작업들은 조각의 ‘이미지 충동’에 나름대로 화답하고 있다. 특히나 최하늘의 <강철이>(2022)는 괄목할만한 사례인데, 이를테면 해당 작업은 미술관 내의 특정한 구간을 말 그대로의 무대로 점유함으로써, 순전히 이미지 차원에서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즉 해당 작업에서 등장하는 출처가 불분명한 각종 도상들은 오로지 ‘그럴싸한’ 이미지로 포착되기 위해서 스스로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알레고리적 함의가 무엇이든, 그것은 (공허한 인프라로 수렴된) 각종 도상들 사이의 ‘관계적 상태’에 의해 희석되며, 그로 인해 도상이라는 형식은 손쉽게 기표로 전환된다.


최하늘, <강철이(깡철)>, 2022, 가변설치


문제는 이때의 기표들이 점유하고 있는 무대로서의 공간이 자신의 전면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관객은 조각의 ‘관계적 상태’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당한 채, 다만 그것을 대상화할 뿐이다. 만약 이를 퀴어적인 맥락에서 독해한다면, <강철이>를 포함한 작가의 근작들은 마침내 공적으로 드러난 게이-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일종의 제스처로만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강철이>는 앞선 대상화의 시선을 자신에게 향하는 일종의 스포트라이트를 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의 기폭제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로 인해 “제스처”는 다수의 관객들이 포착한 이미지들로 유통되고, 헤테로 정서에 기반한 미디어의 인프라 속에서 재차 가시화된다. 물론 그러한 은밀한 전략이 ‘퀴어성’이라는 의제를 어떤 식으로 심화할 수 있을지는 다소 불확실하지만, 그와 별개로 <강철이>는 단순히 포토제닉하기만 한 작업이 아니라, 이미지 혹은 그것이 담보하고 있는 유통망으로 수렴될 만한 조각적인 포즈에 관해 골몰한다.


이로써 조각이라는 매체는 “고유한 물성”이라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순전히 이미지를 프로토콜로 삼아 스스로를 재편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을 향해 적절한 포즈를 취할 수 있게끔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조절/조율된 설치의 양상이고, 무엇보다 그것을 전시장 내에서 말 그대로 펼쳐 보이기 위한 무대로서의 공간이다. 《조각 충동》에 참여한 또 다른 작가인 고요손은 비록 조각의 ‘이미지 충동’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와 별개로 조각을 위한 의사-무대를 조성하는 데 주력한다. 이때의 무대는 최하늘의 사례와 달리 관객에게 전적으로 개방돼 있는데, 이를테면 관객은 일련의 조각들이 설치된 좌대 위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한 구간에서는 헤드폰을 통해 작가가 “조각 활용극”이라고 명명한 퍼포먼스의 배경음악을 청취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작가는 다양한 협업자들과 함께 “조각 활용극”을 비/정기적으로 수행하는데, 이는 사실상 개별 조각에 함축된 기념비로서의 속성을 일시적으로나마 유보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고요손, <사랑과 여름>, 2022


문제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맞닥뜨릴 퍼포먼스의 휴지기에서, 개별 조각이 무엇을 어떻게 기념하고 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물의 형상이기도 하고, 인물을 둘러싼 디오니소스적 풍경의 일부이기도 한데, 어찌됐든 무대로서의 공간에 합류한 순간부터 이미 조각의 ‘관계적 상태’를 얼마간 극화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요손의 <사랑의 여름>(2022)은 아직 성사되지 않은 퍼포먼스의 잔여로 고안됐으며, 그것에 포함된 일련의 조각들은 각자에게 배정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전개될 (현재 시점에서 부재한) 서사를 기념한다. 이처럼 관객을 향해 서사의 공백을 드러내고 있는 무대는 그 자체로 전방위한 이미지로 기능한다. 물론 서사의 공백 자체는 이미지로 포착될 수 없지만, 그와 별개로 관객은 일련의 조각들이 무대상에서 형성하고 있는 정체 상태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먼저 ‘그곳’을 외부에서 대상화한 채 다각도로 탐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내 무대상에 등장한 관객은 자연스레 이미지의 일부로 수렴된다. 즉 해당 관객이 기념비적인 조각들 사이에서 서사의 공백을 추론하는 과정은, 무대 외부에 위치한 또 다른 관객에 의해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러한 순환 고리는 스마트 미디어의 역학 속에서 스스로를 이미지로 거듭 노출할 수 밖에 없는 사용자 개인의 일상을 대변한다. 즉 해당 작업이 의도하고 있는 조각과 인간의 유비 관계는, 양자 모두를 이미지의 단면들로 포착될 수 밖에 없는 객체로 범주화하고, 그러한 객체의 세계에서 과연 서사라는 형식이 가능한지를 자문한다. 그러나 ‘사랑의 여름’이라는 낙관적인 어조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공백은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이미지가 통용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에 가깝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제 이미지가 형성하고 있는 타임라인은 기존의 서사적 맥락으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파편적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일련의 퍼포먼스를 통해 서사 자체가 아니라, 서사의 공백을 활성화하기 위한 계기를 모색한다. 이는 다시금 인터페이스적 장場의 문제를 재론하는데, 이를테면 서사의 공백은 이미지를 가능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작가의 권한 내에서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무대상에 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조각의 맥락에서 인터페이스와 무대라는 형식은 분명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 즉 최하늘이 <강철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기 위해 각종 도상들을 연극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무대를 선취했다면, 고요손은 <사랑과 여름>에서 이미 주어진 무대상에 조각을 포함한 일련의 객체들을 회집하고, 그것들 각자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분배한다. 그리고 양자는 이미지의 순환 고리를 발단 삼아 조각의 ‘관계적 상태’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인터페이스의 국면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이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스스로를 무대화하는 방식은, 지금의 ‘조각 충동’이 어떻게 변천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지표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