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새로운 미로 속에서 보내는 역류성 텍스트」

2022-11-11





「새로운 미로 속에서 보내는 역류성 텍스트」



권시우




“당신은 시계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해당 문장은 『대체 현실 유령』(2022)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굳이 등장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이 온라인 호러의 역사를 개괄하는 일련의 텍스트에서 그간 고수했던 문법 체계를 일시적으로 교란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체 현실 유령』을 저술한 나원영이 문법으로 대변되는 글쓰기의 어떤 표준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글쓰기 방식은 의도적인 장황함 속에서, 의도적으로 갈피를 잃는 과정처럼 보인다. 이는 저자가 일상 안팎에서 향유하는 다양한 취미의 레퍼런스들이 텍스트라는 형식 내에서 얽히고 설키면서 다소 우발적으로 구현된 일종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다. 결국 중요한 것은 텍스트에 인용된 각종 레퍼런스들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이때의 관계는 랜드스케이프처럼 구축적인 환경을 지향하는 대신, 각각의 레퍼런스에 대한 해설들이 서로의 영역에 계속 침투함으로써 구축되지 않은 (텍스트 차원의) 미로를 가설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대체 현실 유령』의 서평 같은 게 아니다. 다만 해당 책을 읽으면서, 앞서 언급한 미로의 형식이 점차 고유한 문법으로 납득이 되고, 그럴수록 “당신은 시계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소견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은 나를 포함한 독자가 구축되지 않은 미로를 헤매는 과정에서 불시에 등장해, 헤매고 있다는 감각에 대한 일종의 논평을 제시한다. 즉 독자는 해당 문장과 마주치는 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혼란을 새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그러한 혼란의 정체를 구구절절 해설한다면, 이 글은 정말 서평 같은 게 될 것이므로, 일단 그 문제는 유보하기로 하자.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독자가 혼란을 의식하게 됨으로써, 결국 혼란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시계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는 일종의 점프 스케어jump scare다. 물론 우리는 그로 인해 ‘깜놀’하지는 않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나름 몰입해서 읽고 있던 텍스트 혹은 그것의 문법 체계로부터 소격되거나, 말 그대로 점프한다.


『대체 현실 유령』이 서두에서 언급했듯, 점프 스케어는 2000년대의 웹에서 성행했거나, 그 속에 은폐돼 있던 온라인 호러의 형식이다. 그것은 사용자가 각종 링크들 사이를 넘나드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고어에 가까운 시/청각적인 이미지를 송출하면서, 사용자에게 충격을 유발한다. 이때의 충격은 사용자가 혐오스런 짤에 말 그대로 습격당함으로써 겪는 일종의 외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링크의 감각을 새삼 의식하게끔 만든다. 즉 당신은 한때 링크에 의해 순조롭게 매개된 웹의 순환 구조를 유영하면서 나름의 자유를 만끽했지만, 점프 스케어를 기점으로 링크들 사이의 틈새를 의심하게 되고, 그럴수록 틈새는 거의 무한하게 벌어지며, 이로써 웹의 순환 구조는 사실 링크라는 단락들이 불완전하게 접합돼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물론 개중에 어떤 단락을 선택하거나 일시적으로 점유할 지는 여전히 사용자의 자유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선택의 과정에는 점프 스케어를 포함한 다양한 변수들이 잠복해 있다.


이는 2000년대의 웹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물론 그 사이에 온라인의 역사 비슷한 것을 개괄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난한 시간이 흘렀지만, 점프 스케어의 형식은 이전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중이다. 이제 점프 스케어는 반드시 호러로 소급되지 않은 채, 도저히 장르화될 수 없는 실제적인 공포를 불/특정한 사용자들에게 유포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사용자를 둘러싼, 혹은 그들이 각종 스마트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모든 이미지를 점프 스케어로 총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쉽사리 ‘깜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이퍼링크 체제에서와는 달리, 이미지를 포함한 정보들은 우발적인 틈새가 존재할 겨를이 없을 만큼 가속화된 타임라인을 말 그대로 타고 흐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잠복은 계속해서 불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유하는 공포는 그러한 ‘틈새 없는 공간’에서 비롯한다. 즉 우리는 점프 스케어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로, 공포의 선정성을 체화하고 있다.


‘틈새 없는 공간’에서 모든 이미지는 우리를 향해 여과없이 노출된다. 그러므로 이제 점프 스케어는 충격을 부러 가시화하는 대신, 우리가 충격을 만성적으로 소화하게끔 유도한다. 우리의 내장은 뒤틀려 있다. 특히나 각종 사회적인 재난이 이미지를 매개로 ‘틈새 없는 공간’을 장악했을 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소화 불량과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린 채, 재난에 관한 공론으로부터 자가 격리한다. 그러한 상황은 더 이상 일련의 장르적 규칙을 토대로 논의할 수 있는 호러가 아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은 단순히 밤에만 출몰하는 게 아니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의 전원을 켤 때마다 미미하게 발광하는 모니터의 불빛으로 비춰진다. 그러나 “당신은 시계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지나치게 일상화된 점프 스케어의 국면에서, 해당 문장은 ‘틈새 없는 공간’과 거의 융화되다시피 한 사용자를 무려 당신이라고 호명할 뿐만 아니라, 지금 당신이 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혼란이라고 논평함으로써, 지금의 걷잡을 수 없는 파국에 제동을 건다.        


다시 『대체 현실 유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온라인 호러의 역사 비슷한 것을 개괄하기 위해, 혹은 그러한 과정의 자연스런 수순인 것처럼 각종 레퍼런스들 사이의 관계를 다소 장황하게 구현한다. 나를 포함한 독자는 각각의 레퍼런스에 대한 출처를 구글이나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에 검색해가면서 나름대로 지식의 해상도를 높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황함 자체가 해소되지는 않을 것 같다. 레퍼런스는 더 이상 지식을 체계화하기 위한 이론적인 재료가 아니라,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디깅digging하는 과정에서 고유한 취미의 영역을 조성하고, 때로는 취미의 영역 자체가 미로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의 미로는 수습 불가능한 혼란을 초래하는 대신, 설사 혼란을 초래하더라도, 그곳에 참여하는 다양한 개인들이 유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계열의 혼란”은 우리가 미로의 경로를 계속 재설정하면서, 미로에 안주하지 않은 채로 그곳을 매번 새롭게 유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 이런저런 전시들을 관람했지만, 그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토로해야될 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점프 스케어에 휩쓸린 상태에서, 그것이 구현할 수 있는 극한의 공포를 체감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나에겐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온갖 정보들을 능동적으로 거절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고, 각종 SNS의 어플에 접속할 때마다 마주치는 혼란상이 마치 모니터 너머에서 역류해 곧바로 나의 내장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여전히 속이 메스껍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토해낸 혐오스런 이물질들을 굳이 이미지의 생태계에 되먹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지금도 거의 실시간으로 전개되고 있는 혼란상과 “시계열의 혼란”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참사와 무관하게 각자가 마련한 취미의 영역은 계속 재편되고 있고, 익명이거나 그렇지 않은 누군가들은 그곳에서 교류하면서 여전히 유희의 감각을 모색한다. 이는 황폐화된 일상의 재건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디깅의 연속일 뿐이다.


“당신은 시계열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연될 수 없다. 설사 점프 스케어가 당신의 신체를 강탈하고 있더라도, 그로 인해 가끔 내장이 뒤틀리더라도, 어찌됐든 호러물은 자체의 논리에 따라 공포를 장르적으로 갱신해내거나, 그러기를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평은 장르의 공모자들을 굳이 당신이라고 호명함으로써, 장르 안팎에서 전개되고 있는 혼란의 역학을 나름대로 해설하기 위한 권한을 발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 연재할 글은, 본 칼럼의 취지에 부합하게끔 아무래도 미술에 관한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나에겐 별다른 취미가 없지만, 그와 별개로 미술은 여타 예술의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취미의 영역과 공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는 계속되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나름대로 분주할 것이다. 어쩌면 나와 여러분은 이미 미로에 속해있다. 뒤늦게나마 그러한 사실에 만족을 표하며, 이만 총총.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