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션화된 세계에서 (미술) 비평을 창작하는 법」
권시우
제도에 대해 폭로함으로써, 제도의 내적인 파열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는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폭로’다. 특히나 제도 비판의 형식을 취하는 미술의 경우, 이때의 미술은 이미 제도에 종속돼 있으며, 결국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비판적 거리는 미술에게 일종의 자기 성찰을 수행하게끔 유도함으로써, 광범위한 제도를 미술의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반복됐던 제도의 내적인 파열은, 동시대 미술 혹은 그것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거의 분열증에 가까운 감각을 초래했다. 즉 우리는 미술만으로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제도의 부조리에 과몰입한 나머지, 어느새 자신을 주체로 규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역량마저 상실해버렸다. 이로써 제도에 대한 폭로는, 한때 그것을 추동했던 주체(성)의 자가 폭로로 귀결된 채, 모든 비판의 형식들을 다름아닌 자아의 문제로 수렴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상황은 단순히 제도 비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때 그것을 견인했던 비평적인 태도를 본질적으로 재고하게끔 만든다. 이를테면 지금 시점에서 비평은, 그것을 수행하는 개인의 주관성을 초과할 수 있는가? 혹은 지금의 비평이 제도를 포함하는 다양한 ‘문제적 현실’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가능한가? 할 포스터는 『소극 다음은 무엇?』에 수록된 「실재적 픽션」이라는 글의 서두에서, 아마도 자신이 그간 고수해왔을 비평에 대한 역사를 개괄하면서, 그것이 현실의 배후에 있다고 상정된 실재를 도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문에 부친다. 물론 해당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빡이는 유토피아의 빛”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를 모색하지만, 이제 그 과정을 주도하는 역할은 비평이 아니라, 실재와 불완전하게 동화됨으로써 ‘감각의 틈새’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픽션에게 주어진다. 문제는 이때의 픽션을 전개하는 주체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당대의 기술적 환경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계속 굴절되는 허구적 존재에 가까우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의 진위를 섣불리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픽션이 비평을 대체한다고 했을 때, 이는 결국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소격된 상태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했던 비평가라는 모델을 폐기한다. 즉 이제 비평은 픽션에 의해 인용됨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재/확인할 뿐, 자체적으로 논의를 생성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잃어버렸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미 지나간 비평에 대한 (언젠가 픽션으로 회수될) 역사의 사본들이거나, 별다른 주제 없이 표류하고 있는 비평의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를 지나치게 우회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갈수록 장황해지는 텍스트의 내용이다. 실제로 『소극 다음은 무엇?』은 트럼프주의를 기점으로 대두된 탈진실post-truth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끔 만든 기술적인 하부구조를 다각도에서 추론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미술 자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 유보된다. 이는 단순히 미술을 둘러싼 시대적 정황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 더 이상 미술을 독자적인 주제로 삼을 수 없는 미술 비평(가)의 불확실한 자의식을 시대적으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미술) 비평은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즉 우리는 아직까지 “실재적 픽션”을 구현하는 일련의 작업들과 조응할 만한 비평적 언어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러한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어떤 식으로든 비평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라기보다, 한때 비평에 선행했던 주체성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뒤늦게나마 종식된 상황을, 무려 주체의 관점에서 (아마도 영원히) 지연시키려는 충동의 발현에 가깝다. 그러므로 비평의 불가능성은, 사실상 그로 인해 가능해진 소위 픽션화된 세계에 부합하는 ‘허구적 존재’를 새로운 메소드method로 호명한다. 혹은 우리가 그러한 메소드를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주체는 자연스레 픽션화된 세계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지금의 미디어가 광범위하게 조성하고 있는 감시 체제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포착할 수 없는 허구를 증식하면서, 종내 개인을 불확실한 픽션의 내러티브 속으로 은폐시킨다. 즉 감시 체제가 의존하는 알고리즘의 역학은 픽션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허구적 존재’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최소한 아직까지는) 실패하고 만다.
애초에 감시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우파 정권도 아니고, 알고리즘의 역학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노동자는 더더욱 아니며, 다만 감시 체제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기계의 눈’이다. 그러나 이제 ‘기계의 눈’은 단순히 인간에 의해 설정된 목표물을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한 (전쟁 기계로서의) 드론-시점을 대변한다기보다, 우리의 일상과 연동되는, 혹은 일상 자체를 획기적으로 대체한 이미지의 생태계에 잠복해 있다. 즉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포함하는 다양한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에서 소비하는 이미지들을 다각도로 추적하면서, 우리를 각기 다른 사용자의 유형으로 규정하는 권력 기제가 바로 ‘기계의 눈’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기계의 눈’이 거의 실시간으로 재/정립하고 있는 유형학에 종속된 채, 사용자라는 모델을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일종의 롤플레잉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용자는 스스로를 ‘허구적 존재’로 환원한 채, 감시 체제의 내러티브를 무려 픽션으로 소화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의 눈’이 의도한 잠복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이로써 그것의 현존은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허구의 영역 속에 새롭게 등재된다.
이는 감시 체제의 실질적인 오작동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오작동 자체가 픽션을 전개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이제 ‘기계의 눈’은 우리가 사용자라는 모델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앞서 언급한 롤플레잉을 가속시킨다. 이로써 감시 체제는 사용자를 둘러싼 허구적인 이해관계에 잠식된 채, 더 이상 사용자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능한 빅 브라더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의 주체를 막론한 모든 존재들은 사실상 롤플레잉에 기반한 픽션에 비/자발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이때의 픽션은 여전히 불확실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언제나 실재로 대변되는 서사의 외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태를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실재에 대한 문제를 재론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허구적 존재’는 자신에게 부과된 메소드에 완전히 몰입하는 데 거듭 실패하면서,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픽션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즉 롤플레잉은 단순히 실재를 둘러싸고 벌어진 촌극이 아니라, 메소드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형된 실제적인 자아 사이의 역전된 관계를 재고하기 위한 여지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가담하고 있는 픽션이, 결국 자아라는 ‘문제적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이때의 자아는 근대적 주체와는 무관하며, 다만 메소드가 서사 내부의 역학만으로 확보한 주체적인 권한을 토대로, 마침내 픽션에 최적화된 존재를 구현하기에 이른다. 즉 이제 우리는 ‘허구적 존재’가 픽션에 의해 과잉결정됨으로써 드러난 픽션의 모순을 말 그대로 체감하면서, 그러한 모순 자체가 (현실에서의 적대관계에 부합하는) 픽션의 리얼리티에 기여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픽션화된 세계라는 가설은, 픽션이 한때 스스로를 의도치 않게 제약했던 허구라는 범주를 초월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실로 입증된다. 그러한 상황은 탈진실을 비판적으로 해제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과 조응하기 위한 서사적인 형식에 함몰된 주체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이뤄낸 성과다.
뒤늦게나마 (미술) 비평에 대한 문제를 재고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적 픽션”에 의해 구현된 존재라는 사실을 선뜻 수용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더 이상 사용자라는 모델의 배후는 성립될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사용자로서 서로에게 현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마침내 픽션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비평이 날조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의 픽션화된 세계를 유지하는 장르적 규칙들을 활용해,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픽션의 내러티브를 구축함으로써, 역으로 픽션이라는 형식을 부각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런 식으로 픽션은 비평에 의해 회수된 채, 자신의 불확실한 상태를 새삼 자각하게 된다. 즉 한때 픽션이 실재를 향해 반복해서 노출했던 ‘감각의 틈새’는, 이미 실재와 동화된 픽션이 자신의 메커니즘을 무려 비평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발단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국 이제 “깜빡이는 유토피아의 빛”은 픽션화된 세계가 픽션이라는 형식을 토대로,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실재와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비평은 그러한 가능성이 막연한 허구로 지연되는 상황을 부정한다.
「픽션화된 세계에서 (미술) 비평을 창작하는 법」
권시우
제도에 대해 폭로함으로써, 제도의 내적인 파열을 유도하려는 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는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 ‘폭로’다. 특히나 제도 비판의 형식을 취하는 미술의 경우, 이때의 미술은 이미 제도에 종속돼 있으며, 결국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비판적 거리는 미술에게 일종의 자기 성찰을 수행하게끔 유도함으로써, 광범위한 제도를 미술의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반복됐던 제도의 내적인 파열은, 동시대 미술 혹은 그것에 가담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거의 분열증에 가까운 감각을 초래했다. 즉 우리는 미술만으로 도저히 합의할 수 없는 제도의 부조리에 과몰입한 나머지, 어느새 자신을 주체로 규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역량마저 상실해버렸다. 이로써 제도에 대한 폭로는, 한때 그것을 추동했던 주체(성)의 자가 폭로로 귀결된 채, 모든 비판의 형식들을 다름아닌 자아의 문제로 수렴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상황은 단순히 제도 비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때 그것을 견인했던 비평적인 태도를 본질적으로 재고하게끔 만든다. 이를테면 지금 시점에서 비평은, 그것을 수행하는 개인의 주관성을 초과할 수 있는가? 혹은 지금의 비평이 제도를 포함하는 다양한 ‘문제적 현실’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가능한가? 할 포스터는 『소극 다음은 무엇?』에 수록된 「실재적 픽션」이라는 글의 서두에서, 아마도 자신이 그간 고수해왔을 비평에 대한 역사를 개괄하면서, 그것이 현실의 배후에 있다고 상정된 실재를 도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의문에 부친다. 물론 해당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빡이는 유토피아의 빛”을 포착하기 위한 시도를 모색하지만, 이제 그 과정을 주도하는 역할은 비평이 아니라, 실재와 불완전하게 동화됨으로써 ‘감각의 틈새’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픽션에게 주어진다. 문제는 이때의 픽션을 전개하는 주체가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당대의 기술적 환경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계속 굴절되는 허구적 존재에 가까우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의 진위를 섣불리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픽션이 비평을 대체한다고 했을 때, 이는 결국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소격된 상태를 통해 스스로를 주체로 규정했던 비평가라는 모델을 폐기한다. 즉 이제 비평은 픽션에 의해 인용됨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인 근거를 재/확인할 뿐, 자체적으로 논의를 생성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잃어버렸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미 지나간 비평에 대한 (언젠가 픽션으로 회수될) 역사의 사본들이거나, 별다른 주제 없이 표류하고 있는 비평의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를 지나치게 우회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갈수록 장황해지는 텍스트의 내용이다. 실제로 『소극 다음은 무엇?』은 트럼프주의를 기점으로 대두된 탈진실post-truth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끔 만든 기술적인 하부구조를 다각도에서 추론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미술 자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 유보된다. 이는 단순히 미술을 둘러싼 시대적 정황을 해명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 더 이상 미술을 독자적인 주제로 삼을 수 없는 미술 비평(가)의 불확실한 자의식을 시대적으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식으로 (미술) 비평은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즉 우리는 아직까지 “실재적 픽션”을 구현하는 일련의 작업들과 조응할 만한 비평적 언어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그러한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어떤 식으로든 비평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라기보다, 한때 비평에 선행했던 주체성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뒤늦게나마 종식된 상황을, 무려 주체의 관점에서 (아마도 영원히) 지연시키려는 충동의 발현에 가깝다. 그러므로 비평의 불가능성은, 사실상 그로 인해 가능해진 소위 픽션화된 세계에 부합하는 ‘허구적 존재’를 새로운 메소드method로 호명한다. 혹은 우리가 그러한 메소드를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주체는 자연스레 픽션화된 세계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지금의 미디어가 광범위하게 조성하고 있는 감시 체제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라, 그것이 포착할 수 없는 허구를 증식하면서, 종내 개인을 불확실한 픽션의 내러티브 속으로 은폐시킨다. 즉 감시 체제가 의존하는 알고리즘의 역학은 픽션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허구적 존재’를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최소한 아직까지는) 실패하고 만다.
애초에 감시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지금 시점에서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있는 우파 정권도 아니고, 알고리즘의 역학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노동자는 더더욱 아니며, 다만 감시 체제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기계의 눈’이다. 그러나 이제 ‘기계의 눈’은 단순히 인간에 의해 설정된 목표물을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한 (전쟁 기계로서의) 드론-시점을 대변한다기보다, 우리의 일상과 연동되는, 혹은 일상 자체를 획기적으로 대체한 이미지의 생태계에 잠복해 있다. 즉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포함하는 다양한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에서 소비하는 이미지들을 다각도로 추적하면서, 우리를 각기 다른 사용자의 유형으로 규정하는 권력 기제가 바로 ‘기계의 눈’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기계의 눈’이 거의 실시간으로 재/정립하고 있는 유형학에 종속된 채, 사용자라는 모델을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일종의 롤플레잉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용자는 스스로를 ‘허구적 존재’로 환원한 채, 감시 체제의 내러티브를 무려 픽션으로 소화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의 눈’이 의도한 잠복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이로써 그것의 현존은 (사용자와 마찬가지로) 허구의 영역 속에 새롭게 등재된다.
이는 감시 체제의 실질적인 오작동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오작동 자체가 픽션을 전개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이제 ‘기계의 눈’은 우리가 사용자라는 모델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앞서 언급한 롤플레잉을 가속시킨다. 이로써 감시 체제는 사용자를 둘러싼 허구적인 이해관계에 잠식된 채, 더 이상 사용자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능한 빅 브라더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감시의 주체를 막론한 모든 존재들은 사실상 롤플레잉에 기반한 픽션에 비/자발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이때의 픽션은 여전히 불확실한데, 왜냐하면 그것이 언제나 실재로 대변되는 서사의 외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한 상태를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과정에서, 역으로 실재에 대한 문제를 재론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허구적 존재’는 자신에게 부과된 메소드에 완전히 몰입하는 데 거듭 실패하면서,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픽션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즉 롤플레잉은 단순히 실재를 둘러싸고 벌어진 촌극이 아니라, 메소드와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형된 실제적인 자아 사이의 역전된 관계를 재고하기 위한 여지를 모색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가담하고 있는 픽션이, 결국 자아라는 ‘문제적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이때의 자아는 근대적 주체와는 무관하며, 다만 메소드가 서사 내부의 역학만으로 확보한 주체적인 권한을 토대로, 마침내 픽션에 최적화된 존재를 구현하기에 이른다. 즉 이제 우리는 ‘허구적 존재’가 픽션에 의해 과잉결정됨으로써 드러난 픽션의 모순을 말 그대로 체감하면서, 그러한 모순 자체가 (현실에서의 적대관계에 부합하는) 픽션의 리얼리티에 기여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픽션화된 세계라는 가설은, 픽션이 한때 스스로를 의도치 않게 제약했던 허구라는 범주를 초월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실로 입증된다. 그러한 상황은 탈진실을 비판적으로 해제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과 조응하기 위한 서사적인 형식에 함몰된 주체가, 아마도 마지막으로 이뤄낸 성과다.
뒤늦게나마 (미술) 비평에 대한 문제를 재고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적 픽션”에 의해 구현된 존재라는 사실을 선뜻 수용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더 이상 사용자라는 모델의 배후는 성립될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사용자로서 서로에게 현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마침내 픽션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히 비평이 날조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의 픽션화된 세계를 유지하는 장르적 규칙들을 활용해,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픽션의 내러티브를 구축함으로써, 역으로 픽션이라는 형식을 부각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런 식으로 픽션은 비평에 의해 회수된 채, 자신의 불확실한 상태를 새삼 자각하게 된다. 즉 한때 픽션이 실재를 향해 반복해서 노출했던 ‘감각의 틈새’는, 이미 실재와 동화된 픽션이 자신의 메커니즘을 무려 비평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발단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결국 이제 “깜빡이는 유토피아의 빛”은 픽션화된 세계가 픽션이라는 형식을 토대로,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실재와의 관계를 보다 유연하게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비평은 그러한 가능성이 막연한 허구로 지연되는 상황을 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