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 『유닛 이후의 세계』

권시우「회화의 “조각 충동”을 기념하며」


「회화의 “조각 충동”을 기념하며」


권시우


한창 회화가 주목받던 시기는 끝났다. 이는 얼마간 예상된 일이었는데, 2010년대 초/중반에 가시화된 좀비 형식주의가 재료로 삼았던 과거는 언젠가 소진될 운명이었다. 물론 과거의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그러나 그 당시의 회화에게 중요했던 것은 과거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총량이 아니다. 문제는 사용자-주체의 전지적 시점을 토대로 과거 혹은 그로부터 비롯한 각종 레퍼런스를 재/구성함으로써, 레퍼런스 자체와 변별되는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과정이었다. 즉 과거는 단순히 레퍼런스로 인용됐다기보다, 사용자-주체와 부합하는 ‘이미지’의 프로세스를 해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된 것에 가깝다. 왜 하필 과거였느냐고 뒤늦게나마 자문한다면, 그것이 더 이상 ‘새로움’이 없는 시대에서, 사용자-주체에게 유일하게 현전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그러한 이유로 한때 과거는 회화적 평면상에 틈입했고,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주체의 역량은 충분히 입증됐다. 즉 앞서 언급한 “전지적 시점”은 종내 ‘이미지’를 둘러싼 다중화된 시점의 문제로 귀결됐으며, 이는 그로부터 도출해낸 결과물이 회화적 평면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물론 현재로 귀환한 ‘좀비’는 그 자체로 충격을 유도했지만, 그 이후에 남은 것은 단순히 충격으로 인한 멍한 상태가 아니라, ‘좀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중화된 시점으로 수렴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인터페이스의 국면이다. 이로써 충격은 인터페이스라는 형식 혹은 그것이 사용자-주체에게 허용한 절대적인 권한 내에서 해소된다. 그렇게 좀비 형식주의는 마침내 과거를 청산하고, 스스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 좀비 형식주의 이후, 우리는 마침내 회화적 평면을 인터페이스 삼아 ‘이미지’를 각기 다르게 모델링하는 방식을 내면화했다. 이때의 모델링은 일련의 시각적인 데이터들을 오브제 차원에서 취합하면서, 종내 회화라는 매체에 조각적인 특성을 부과한다. 즉 이제 ‘이미지’는 단순히 평면상에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다중화된 시점의 퍼스펙티브perspective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3차원의 오브제로 거듭나려는 충동을 드러낸다. 그러나 회화는 여전히 캔버스라는 제한된 레이아웃을 토대로 조형되며, 그 결과물은 (레이어가 발생시키는 다양한 층위에도 불구하고) 평면으로 대상화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평면을 그 자체로 가늠하는 게 아니라, 회화에 내재된 조각에 대한 충동이 회화적 평면이라는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 추론하는 일이다. 


정희민 개인전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는 그에 대한 최근의 사례다. 물론 작가는 이전의 몇몇 작업들에서 디지털 차원에서 재/생산된 이미지의 해상도를 회화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 주력했지만, 그와 별개로 본 전시는 더 이상 디지털 페인팅의 맥락으로 수렴되지 않는, 회화를 매개로 한 조각적 탐구에 관한 습작들로 구성돼있다. 굳이 습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일련의 작업들이 굳이 정물이나 풍경과 같은 다소 관습적인 대상을 주제 삼아, 앞서 언급한 해상도의 문제와 변별되는 ‘새로운’ 이미지를 조형하기 위한 단초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즉 작가에게 있어서 정물과 풍경은 그 자체로 고유한 주제라기보다, 그저 조각적인 템플릿으로 회화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무던히 연습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선별된 피사체에 가깝다.      


그러나 이때의 피사체는 그것의 선별 기준이 다소 모호하다는 점에서, 작가가 일상 차원에서 사용자-주체의 관점을 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즉 작가가 일상 주변부에서 마주친 “친숙한 대상”들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다중화된 시점을 토대로 얼마든지 새롭게 모델링할 수 있는 일종의 전개도를 함축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정물’은 없다. 이제 그것은 사용자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유동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무정형의 객체에 가깝다. 그러므로 회화적 평면은 (한때 디지털 페인팅이 지향했던) 고해상도의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한 스크린이 아니다. 오히려 일련의 작업들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물 혹은 풍경을, 작가가 주로 활용하는 젤 미디엄과 같은 재료들의 물성에 부합하는 ‘조각적 대상’으로 변환함으로써, 스크린을 의도적으로 초과한다.

      


정희민, <Waken Water 깨어난 물>, 2022


아이러니하게도 ‘조각적 대상’은 정물에 가깝다. 그것은 분명 조각에 대한 충동에서 비롯한 결과물이지만, 그와 별개로 여전히 (작가가 주제로 삼은) 특정한 대상의 단면만을 드러내고 있다. 즉 회화는 말 그대로의 입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회화적 평면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좀비 형식주의 이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각은, 단순히 디지털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물질로의 귀환이 아니라, 사용자-주체가 회화적 평면을 인터페이스로 삼음으로써 형성된 조각성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조각에게 주어진 주요한 과제 중 하나는, 한때 회화적 평면상에서 (사용자-주체의 전지적 시점을 토대로) 전개된 추상의 프로세스를 마침내 실물 차원에서 구현하는 데 있다. 이로써 추상은 전방위한 오브제로 거듭난다.


반면 회화는 갈수록 지연된다. 정희민이 작업 차원에서 연습하고 있는 ‘조각적 대상’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스크린을 초과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즉 일련의 피사체를 물질로서의 재료들로 추상화하는 과정은, 자칫 스크린을 둘러싼 브리콜라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적 대상’은 가까스로 회화와 조각의 점이지대를 형성한 채, 그것을 무려 회화의 관점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터페이스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골몰하고 있다. 이를테면 회화에 내재된 조각에 대한 충동은, 스크린이라는 제약 속에서 어떤 형식의 이미지로 해소될 수 있을까? 이는 회화라는 매체가 자신이 선취한 “조각성”을 이미지의 맥락에서 해제함으로써 역으로 지금의 조각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그 자체로 정물이 된 회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프레임 단위로 분할된 조각의 단편으로서, 조각이 단번에 파악될 수 없는 복잡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조각을 포함한 모든 입체는 관객-시점에서 다각도로 포착한 일련의 이미지를 가상 차원에서 취합한 결과물에 가깝다. 이는 주지하듯 모델링의 과정과 유사하다. 즉 지금 시점에서 모델링은 3D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한 자동화된 프로세스로 축약되는 대신, 그것의 전개를 유추할 수 있는 이미지의 단락들을 활용해 일종의 조각적인 시퀀스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회화는 단순히 조각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가 염두하고 있는 특정한 조각적인 시퀀스에 부합하는 장면들을 연출하기 위해 스크린을 각기 다르게 점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이 회화의 미래가 될 지는 아직까지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게 습작에 불과하다는 가정 하에, 작가가 수행하는 연습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을 예상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조각적인 시퀀스를 위한 개별 장면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조각을 염두하고 있다. 즉 마침내 조각이 도래하는 순간, 일련의 장면이 형성하고 있는 몽타주적 관계는 그 자체의 역동성을 잃어버린 채 그저 하나의 시퀀스로 종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각적인 시퀀스가 의도하는) 모델링이라는 사건은 가급적 영원히 지속돼야 한다. 우리는 이미지를 토대로 계속해서 조각의 전모를 추론해야한다. 이는 단순히 조각에 대한 물신화가 아니라, 그것을 결국 이미지 차원에서 인지할 수 밖에 없는 사용자-주체의 관점을 숙련하는 과정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