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 『유닛 이후의 세계』

권시우「사용자 안내서: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로 ‘당대적 추상’을 재현하기」

스크린이라는 비/물리적인 단위는, 지금의 (무의미한 데이터들로) 과포화된 현재를 고스란히 출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침내 스크린은 파열되고, 이미지는 추상화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추상은 흔히 회화에서 통용되는 ‘허접-추상’이라는 표현에서 유래한다. 한때 회화를 막론한 다양한 매체에서 논의됐던 좀비 형식주의는, 더 이상 지금의 현재에 고유한 이미지가 발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역으로 과거의 파편들을 임의대로 취합해, 말 그대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성했다. 이는 결국 지금의 현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을 기꺼이 승인하면서, ‘정지된 스크린’을 다시금 작동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기능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거는 사유의 대상이라기보다,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이미지에 가깝다. 좀비-이미지는 단지 ‘정지된 스크린’을 (공간 차원에서) 무작위하게 점유함으로써, 반드시 지금의 현재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발생시켰다.


문제는 그러한 맥락을 도외시한 채, 좀비 형식주의에서 파생된 일련의 작업들을 그저 ‘허접-추상’으로 폄하하는 관점이다. 그러한 관점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주체의 사유 가능성을 믿고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추상화된 이미지의 배후에 분명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무의미한 데이터들 사이의 관계로부터 굳이 의미의 성좌를 찾아내는 데 몰두한다. 그 무언가는 후기 자본주의 체제일 수도 있고, 무수한 사적 공간들을 점령하는 빅데이터의 역학일 수도 있으며, 이미지 자체에 잠재된 혁명의 가능성일 수도 있다.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사회정치적인 제도를 염두한 채, 추상화된 이미지를 사유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그들을 또 다시 폄하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미지와 제도의 관계를 딱히 신뢰하지 않을 뿐이다. 


앞서 지금의 현재에서 통용되는 추상이 ‘허접-추상’에서 유래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다. 다만 좀비 형식주의는 과거의 파편들로 추상을 구성함으로써, 현재의 공백을 암시한다. 즉 스크린에 출력된 무작위한 이미지들은 어떠한 역사도, 시간성도 담보하고 있지 않으며, 단지 ‘정지된 스크린’이 어떤 식으로든 작동하고 있다는 착시를 유발할 뿐이다. 과포화된 현재를 재현하려는 시도, 이를테면 오로지 데이터 파편들의 혼란상을 유비하기 위한 노이즈는, 어차피 ‘허접-추상’으로 귀결된다. 즉 재현은 유비 관계로 해소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추상으로, 혹은 맥락이 없는 노이즈로 실패한다. 반면 좀비 형식주의의 ‘허접-추상’은, 설사 그것이 정치적이지 않더라도, 과거를 임의적으로 선별하고, 취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정지된 스크린’ 상에 (사유가 아닌) 추상의 역학을 투사한다. 문제는 여전히 스크린은 정지한 채, 그 위로 추상의 역학만이 부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크린 자체는 도저히 이미지를 출력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화면’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그것을 순전히 물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 작업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 과정은 (뉴)미디어의 계보를 통해 해명되는 대신, 스크린의 (지금의 현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을 발단으로 삼아야한다. VR과 관련된 논의는 이미 충분히 활성화돼 있다. 이를테면 VR 산업은 현실의 리얼리티를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고해상도의 이미지와 그에 부합하는 인지적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각종 디스플레이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는 중이다. 문제는 VR이 지향하는 소위 몰입형 환경이, 무빙 이미지라는 매체와 충분히 조응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외화면’은 특정한 영상이 그것을 둘러싼, 심지어 프레임의 외부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환경과 비/가시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형성된다. 이때 스크린에서 상연되는 이미지는, 카메라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그럼으로써 물리적인 차원에서 현존하지 않는 ‘가능 세계’와 은밀하게 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VR의 전방위한 시야는 마치 관객이 ‘외화면’에서 비롯한 ‘가능 세계’를 실제로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능 세계’는 그것을 실제로 목격하려는 순간, 일시에 휘발된다. 달리 말해 스크린을 매개로 한 영화적 풍경이 전방위하게 확장됨으로써, 관객은 스크린을 대상화할 수 있는 권한을 상실한 채, 그저 영화적 풍경 속에 고립된 개인으로 귀결된다. 김희천의 <사랑과 영혼>(2021)과 같은 작업이 굳이 신체성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사유하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VR을 통해 구현된 영화적 풍경은 오로지 개인의 1인칭 시점으로 수렴되며, 그럼으로써 관객의 사유 영역은 제한된다. 즉 1인칭 시점은 개인을 초월할 수 없다. ‘나’는 사유의 주체라기보다, 이미 완결된 내러티브의 양상에 관객으로서의 (신체적) 경험을 위탁한 수동적인 개인에 가깝다. 일련의 작업들은 대체로 그러한 사실에 순응한 채, ‘나’를 신체적으로 압도할 만한 이미지의 파사드를 제공한다.


그 결과(물)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설사 그것이 에세이 영화를 지향하더라도, 영상 내에서 전개되는 사유의 과정은, ‘나’라는 개인이 체감하는 압도적인 경험에 의해 손쉽게 무마된다. 이는 결국 스펙터클이 초래한 사유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다만 이때의 스펙터클은 개인에게 기억의 단편들로 남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개인의 신체를 비/물리적으로 타격함으로써 ‘감각적인 멍함’을 유발한다. 후자는 물론 VR의 인터페이스가 아직 개인의 신체에 최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비롯할 수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가상 세계에서의 이미지는 ‘감각적인 멍함’을 통해, 가상의 범주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자신의 현존을 강력하게 피력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해당 이미지는 (스펙터클한 감각을 매개로) 개인의 신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 결과로 남은 신체적인 징후는 섣불리 기억으로 수습할 수 없는 (가상 세계에서 발생했던) ‘추상화된 사건’을 암시한다. <사랑과 영혼>은 이때의 추상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 그 과정에서 ‘추상화된 사건’을 한 개인이 기억하는 이미지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이로써 ‘감각적인 멍함’은 재연된다.


본 작업의 서사는 그간 작가가 고수했던 에세이 영화의 전개를 대체로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데드 리프트를 거듭 실패하는 상황을, 가상 세계에서 이미지가 개인의 신체를 타격하는 순간과 유비함으로써, 앞서 언급했듯 신체성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점유한다. 그러나 1인칭 시점을 초월한 (작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유를 발설하는) 대타자의 관점은, 관객이 가상 세계에서 체화하고 있는 1인칭 시점과 대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가는 그러한 대치 상황을 해소할 의도가 없으며, 다만 사유의 과정을 불시에 일단락하고, 관객을 돌연 ‘추상화된 사건’ 속으로 내던진다. 이때의 ‘추상화된 사건’은 지인들의 방 혹은 작업실로 대변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발생한다. 즉 관객은 그곳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감각적인 멍함’을 경험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거의 현실에 가깝게 구현된) 사적인 공간에 (과)몰입함으로써, 그간 관객으로서 대상화했던 에세이 영화의 전개가 일순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다각도로 캡처된 일련의 장면들은, 현실에서 발생했던 구체적인 사건에서 비롯하며, 그에 대한 기억을 공간적인 차원에서 구축한 이미지에 가깝다. 이처럼 작가는 기억의 건축술을 활용해, 추상을 가까스로 재현해낸다.


즉 사적인 공간 혹은 그곳에 대한 한 개인의 기억에 무단 침입한 관객은, 한때 자신이 대상화했던 스크린과의 비/물리적인 간극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의 파사드를 향해 감각의 회로를 개방한다. 이는 더 이상 영화적 풍경 속에 고립된 개인으로 귀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1인칭 시점에 기반한 경험을 능동적으로 체감하는 새로운 관객의 유형을 발생시킨다. 이때의 관객은 에세이적 서사를 감상하는 관객의 역할과 VR의 몰입형 환경을 넘나들면서, 마침내 ‘추상화된 사건’의 당사자로서 추상을 사유할 수 있는 자율성을 확보한다. 이는 결국 VR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령 시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VR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능감은, 사용자가 1인칭 시점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자신이 가상 세계에서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유발한다. 이때 발생하는 ‘유령 시점’은 단순히 VR 멀미와 같은 증상으로 제한되는 대신, 스크린을 대상화할 수 있는 권한과 1인칭 시점 사이에 놓여있는 개인의 과도기적인 상태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객이라는 가설은, 결국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분기를 선택적으로 운용하면서, 빙의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여지에 의해 성사된다.


여전히 주체의 사유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은, 해당 가설을 전적으로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현실) 정치의 맥락을 해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에 대한 논의를 형성한다. ‘유령 시점’을 중층적으로 결정하는 두 가지 분기는, VR에서 구현된 이미지 혹은 장면의 멀고 가까운 상태를 조절한다. 물론 VR이 관객을 향해 펼쳐 보이는 풍경의 연속 혹은 연속적인 풍경으로부터 클로즈업 샷을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것은 관객에 의해 대상화된 스크린으로서 멀어지고, 관객이 1인칭 시점을 매개로 (과)몰입함으로써 가까워진다. 전자는 <사랑과 영혼>을 포함한 일련의 작업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인 ‘객체로서의 스크린’을 상기시킨다. 해당 모티프는 VR 환경 내부에서 실제로 스크린들을 등장시키는데, 그것들은 앞서 언급한 연속적인 풍경에 흠집을 낸다. 즉 관객은 굳이 확장된 스크린 속에서 단채널 영상을 감상함으로써, ‘객체로서의 스크린’을 둘러싼 주변 풍경을 멀리 밀어내거나, 일종의 배경으로 변별한다.


‘객체로서의 스크린’과 주변 풍경의 관계는, 마침내 이미지의 배후를 추측하게끔 유도한다. 즉 이미지의 배후에는 (스크린 상에 출력된)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그러한 사실은 ‘유령 시점’이 정확히 무엇을 응시하거나, 목격해야하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는 결국 파열의 조짐을 드러낸다. ‘유령 시점’은 계속해서 혼란스런 상태를 목격하고, 그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흠집은 갈수록 벌어진다. ‘객체로서의 스크린’은 가상 세계에서 (작가에 의해) 임의적으로 배정된 한 장소를 점유하고 있고, 이로써 주변 풍경을 단순히 가상의 이미지가 아닌, 또 다른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일종의 시/청각적인 파노라마로 호명한다. 반면 관객은 여전히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HMD)를 포함한 각종 디스플레이를 매개로 가상 세계에 접속하고 있는 사용자로서, 일련의 풍경들이 그저 확장된 스크린이 출력하는 가상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양자 사이의 괴리는 관객에게 일종의 인지적 충돌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용자가 체감하는 불능감을 한층 가중시킨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불능감은 어떻게든 해소돼야할 대상이 아니라, VR을 가까스로 고유한 매체로 규정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즉 VR은 사용자에게 불능감을 제공함으로써, 가상과 현실 혹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낙차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객은 가상/현실이라는 불확실한 점이지대에 귀속된 채, 현재 진행형의 낙차를 고스란히 체감하면서, 종내 스스로를 추상화한다. 이때의 추상은 개인에게 내재된 감각의 회로들이 혼선되는 순간에서 비롯하며, 그러므로 스크린 상에 명확한 이미지로 출력할 수 없다. 즉 그것은 오로지 개인의 주관 차원에서만 가늠할 수 있는 비가시적인 심상에 가까우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한때 김희천의 <바벨>(2015)이 가상/현실을 발단으로 삼은 개인의 인식론적인 혼란을 내러티브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구현했다면, <사랑과 영혼>의 특정한 대목에서 관객은 그러한 혼란을 (내러티브의 바깥으로 추방당한) 개인으로서 체현한다. 그러므로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 작업들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가상의 이미지를 매개로 앞서 언급한 개인을 어떻게 발생시키는지의 문제다.    


주지하듯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 작업들이 애초에 의도한 ‘외화면’의 물리적인 구현은 불가능하다. 그와 별개로 <사랑과 영혼>은 한때 ‘외화면’이 암시했던 ‘가능 세계’를, 오로지 개인의 주관적인 영역과 동기화시킨다. 즉 관객은 이제 단순히 ‘가능 세계’의 목격자가 아니라, 확장된 스크린 속에서 발생한 (신체적) 징후들이 혹시 ‘가능 세계’를 체감하는 과정으로 수렴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거의 실시간으로 자문한다. 자문의 결과는 당연히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VR에서의 ‘가능 세계’는 일련의 작업들이 각기 다르게 발생시킨 개인의 유형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의 불확실함으로 말미암아,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에 참여하는 무수한 개인들을 파생시킨다. 이때의 개인은 결국 유령이라는 존재로 귀결되며, 유령으로서 다양한 시점들을 넘나들면서, 그때마다 자신이 비/물리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스크린의 ‘외화면’을 상상한다.


그 과정은 현재가 아닌 현재 진행형의 낙차를 추상적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스크린을 매개로 구현된 ‘허접-추상’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VR 기반의 (무빙) 이미지는 언제나 확장된 스크린에 의해 규정된 활동 반경의 외부(들)에서 현존한다. 혹은 그러한 사실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현재 진행형의 낙차는 단순히 스크린 상에 출력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현존을 개인이 감각 차원에서 소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시화될 수 없는) 일종의 정동적인 상태에 가깝다. ‘추상화된 사건’의 당사자로서 추상을 사유할 수 있다는 가설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이때의 사유는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의 정동에 의해 반박되거나, 그것과의 ‘은밀한 연대’를 형성함으로써, 단순히 인칭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된다. 즉 마침내 스크린이 파열되고, 그 내부의 이미지가 추상화됐다면,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추상화된 사건’을 기꺼이 수행함으로써, 지금의 현재를 재개하고, 이를 통해 ‘정지된 스크린’의 역학을 재생시킨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