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유닛 이후의 세계 - 2화. 망가진 스크린에서 유출된 것들」

2021-11-12

「망가진 스크린에서 유출된 것들」

권시우



나는 바로 이전 글에서, 당대적인 차원에서 재/생산되는 (미술을 막론한) 일련의 작업들이, 온갖 데이터-소비재들의 근원지가 돼야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지나친 비약처럼 들리지만, 그에 대해 해명하기 전에, 먼저 앞서 언급한 ‘당대’가 어떤 시간대를 의미하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체로 현재로 수렴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현재는 불투명하다 못해, 일개 주체의 인식론적 경험을 초과해버린 지 오래다. 이를테면 지금의 현재는, 단순히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표본화된 과거로 제시될 수 없다. 다만 거의 실시간으로 범람하는 데이터들의 무작위한 흐름에 정처 없이 휩쓸리는 중이며, 그러한 유동적인 상태는 꾸준하게 유지될 것이다. 설사 누군가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고 해도, 애초에 시간 자체가 선형적인 전개에서 벗어나, 다양한 링크들로 혼선되어 있기 때문에, 해당 장면이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당대’를 특정한 시간대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 주지하듯 시간은 더 이상 기록 시스템이 수용할 수 없을 만큼 과부하된 채, 과거의 대열로부터 종잡을 수 없이 이탈하기를 반복한다. 즉 지금의 현재를 추동하는 무수한 데이터 파편들은, 유의미한 정보로 기록 및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동적인 상태’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동력으로 소진된다. 그러므로 한때 신생공간이 그러했듯, 지금의 현재도, 심지어 그 다음의 현재(들)도 언제든지 불시에 휘발될 것이다. 


이처럼 데이터 파편들은 그간 과거로 편입됐던 잔해조차 남기지 않는다. 다만 혼선된 링크들을 넘나들면서, 그 자체로 번성하고 있다. 물론 그로 인해 초래된 풍경은, 마치 시간대라는 규약이 와해된 이후의 폐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때의 폐허는 (데이터 파편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현재에 귀속된 잔해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여느 폐허와는 달리, 지금의 현재에 대한 노스탤지아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잔해들을 헤집으면서, 그것들과 전혀 무관한 (근)과거를 애써 상기하려는 에세이적 시도는, 그저 시대착오에서 비롯한 모순이다. 이를테면 작중의 화자는 데이터베이스를 마치 잔해들의 수장고처럼 대하면서, ‘그곳’을 회고적 시점으로 탐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반면 실제 데이터베이스는 지금의 현재를 위한 동력원에 가까우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계속 소진시킨다. 그러한 텅 빈 내부, 혹은 일종의 공동(空洞)을 섣불리 장소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와 별개로 누군가는 일시 정지된 장면을, 여전히 공허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다. 해당 장면은 일종의 파사드(façade)다. 그것의 배후에는 아무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파사드를 토대로 어떤 의미론적 내용을 구성할 수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도처에 산개한 데이터 파편들이 (스크린의 내부에서) 의도치 않게 형성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태다. 이때의 ‘추상’은 단순히 회화나 조각과 같은 고전적인 매체에 귀속되는 게 아니라, 다만 누군가를 포함한 우리가 시간대라는 규약이 와해된 이후의 폐허에서, 지금의 현재를 재/확인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즉 우리는 시간의 선후 관계가 철저하게 무마된 상황에 대응해, 그저 이미지의 파사드, 혹은 파사드적 이미지만으로, 지금의 현재를 추상적으로 가늠할 뿐이다. 물론 이를 발단 삼아, 무려 작업 차원에서 어떤 형태를 구현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한지형 개인전 《identi-kit: The people's choices》는, 그에 대한 해답의 빌미를 제공한다. 본 전시에서 제시된 일련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앞서 언급한 의미에서의 폐허를 일시적으로 포착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결코 광학적인 차원에서 통용되는 사진술에 기반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는 스크린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와해되고, 그럼으로써 ‘추상’의 맥락으로 수렴된다. 굳이 스크린이라는 표현을 고수하는 이유는, 해당 이미지가 지금의 현재로부터 무작위하게 발췌한 데이터 파편들로 구성된 콜라주이든, 앞선 콜라주를 기존의 추상 문법으로 번역한 회화이든 간에, 광범위한 데이터 환경의 일부를 겨누고 있는 일종의 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스크린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카메라의 셔터나 총구처럼, 광범위한 데이터 환경의 일부를 겨누고 있다. 그러나 스크린은 그 일부와의 대치 상황을 수용할 겨를도 없이, 말 그대로 깨져버리거나, 자꾸만 종잡을 수 없이 와해된다. 


특히나 회화 작업의 경우, 물론 그것은 데이터 파편들을 얼마간 유비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자신이 겨누고 있는 대상에게 오히려 타격 당한 스크린처럼 보인다. 즉 그것의 기하학적인 구도는, 사실 무력하게 깨져버린 스크린의 표면이 우연찮게 형상화한 이미지에서 비롯한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다름 아닌 회화를 매개로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와 관련해, 본 전시에서 다소 흥미로운 구간을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회화와 그에 부응하는 사운드로 구성돼 있는 한 작업이 설치된 모습으로, 사운드를 재생하는 스피커의 연결선이 캔버스 뒤편에 감추어져 있어서, 회화가 벽면으로부터 조금 들떠있었다. 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이는 회화가 사운드 디자인과 같은 소위 뉴미디어의 산물과 불화하는 지점을 물리적으로 노출한다. 그리고 불화의 지점은 갈수록 극대화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깨져버린 스크린’을 회화적 추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지, 혹은 애초에 회화가 그에 적합한 매체인 지, 재고하게끔 만든다.



회화가 매체 차원에서 어떤 관습의 레이어들을 포괄하고 있든, 어찌됐든 그것은 결국 물리적인 지지체에 기반한 이미지다. 설사 디지털 페인팅과 같은 장르를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픽셀 단위로 현존하는 비트맵 이미지에 대한 (현실에서의) 불완전한 재현에 그친다. 즉 이미지가 스크린을 가로질러 현실로 걸어 나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형질 변환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한지형이 작업 차원에서 감행하려는 ‘변신’은 그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한 번, 스크린은 무력하게 깨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은 자신의 시선을 섣불리 거두지 않은 채, 깨진 조각들을 매개로 데이터 환경의 일부를 송출하면서, 계속 오작동하고 있다. 작가는 그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왜곡된 이미지를 굳이 스크린 바깥으로 데려온다. 즉 일련의 회화 작업들은 사실 ‘깨져버린 스크린’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투영된 이미지만을 현실에서 가시화한 결과(물)이다. 


이는 불완전한 재현을 계속해서 암시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가 데이터들의 무작위한 흐름으로부터 이탈해, 마침내 스크린 바깥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물론 여전히 이미지는 종잡을 수 없이 와해된 상태지만, 그와 별개로 그것은 더 이상 ‘유동적인 상태’에 속하지 않는 물화된 표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화된 표본이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즉 이미지의 변신술은 ‘추상’이 담보하고 있는 무의미를 결코 해소하지 못한다. 그 결과로 주어진 표본들은 그저 ‘유동적인 상태’와 결렬된 채, 자신의 파사드적인 면모만을 한층 더 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본들을 통해, 지금의 현재를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불발될 수 밖에 없다. 주지하듯 그것들은 ‘깨져버린 스크린’과 매개된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스크린 저편에 산개해 있는 어떠한 표적들도 겨누고 있지 않다. 다만 작가는 회화를 매개로 물리적인 지지체를 얻은 이미지, 즉 물화된 표본을 일종의 장식으로 삼아, 전시장의 곳곳에 진열해 놓는다. 즉 이제 광범위한 데이터 환경은, 순전히 현실에서 장식적인 경관을 조성하기 위해, 이미지 차원에서 소비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본 전시는 온갖 데이터-소비재들의 근원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것의 발단으로 기능한다. 데이터를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드(feed)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무한 증식하는 온갖 데이터 파편들을 마주하는 과정에 그치지 않는다. 즉 데이터는 어느 순간 낙후된 현실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위해, 자신의 파편들, 혹은 그것들이 형성하는 이미지를 스크린 바깥으로 유출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그러한 유사 젠트리케이션의 주범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불시에 현실을 향해 스마트폰의 렌즈를 들이대는 상황에서, 현실은 오로지 그럴싸한 이미지로 포착되기 위해, 데이터를 빌어 이미지를 흉내낼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물)은 더 이상 지금의 현재를 재/확인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 자체로 번성하는 무작위한 장식에 가깝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회화 작업들은, 본 전시에서 연출된 프로모션의 현장을, 그저 장식으로서 점유하고 있다. 즉 작가가 설립한 『identi-kit』라는 가상의 스타트업 회사가 어떤 방대한 세계관을 염두하고 있든 간에, 회화 자체는 그저 전시장의 텅 빈 벽면들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 내걸린 장식에 가깝다.


현실이 온갖 장식들로 스스로를 도배할수록, 그것의 배후에 아무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더욱 명료해진다. 혹은 현실 자체가 이미 장식의 총체로 거듭나는 중이다. 광범위한 데이터 환경은 분명 그 과정에 이미지를 매개로 개입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들 대다수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이미지가 되기를 염원한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알레고리라는 형식이 붕괴된 이후에 초래된 지금의 무의미한 세계를 비관하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의 전개를 결코 지연시킬 수 없다면, 차라리 무의미 자체를 구심 삼아, 새로운 내러티브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