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시우 『유닛 이후의 세계』

권시우 1화,「'비평적 관객'에 대한 포트폴리오」


「’비평적 관객’에 대한 포트폴리오」

권시우




나의 필자로서의 활동은, 한때 신생공간이라는 공동의 플랫폼이 활성화됐던 2015년을 발단으로 삼는다. 물론 여전히 공동의 플랫폼이라는 표현에 개인적인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한 불편함에 불편함을 느끼는 편이다. 신생공간은 그 당시에, 혹은 그 이전부터 대개 80년대생 미술가들을 주축으로 운영됐던 각각의 전시장들에 일일이 매겨진 꼬리표가 아니며, 다만 2015년 즈음부터 해당 공간들이 본격적으로 매개되면서, 말 그대로의 공동성을 형성한 결과다. 이를테면 앞서 80년대생 미술가라고 호명했던 신생공간의 당사자들은, 미처 가시화되지 못한 서로의 전시 및 작업들에 대한 관객을 자처함으로써, 피드백의 순환 고리를 형성했다. 즉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일련의 작업들이 미처 가시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관객으로서 그것들에 열렬히 주목했고, 그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일종의 비평적인 사고를 연상해냈고, 그로 인해 지금 시점에서 그저 풍문으로 그친, ‘비평적 관객’이라는 모델을 구현했다.


신생공간의 시기는, 흔히 당사자들이 2015년 말에 자발적으로 개최한 《굿-즈》라는 행사를 기점으로, 점차 막을 내렸다고 회고된다. 문득 관객으로서 《굿-즈》를 감상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는 거의 초겨울의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표현대로 사방에 벚꽃이 흩날리는 듯한 풍경이었다. 서로의 관객들이 비로소 공적으로 헤쳐 모인, 바야흐로 우리에게서 비롯한, 우리만을 위한 자리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덧 2020년대의 초입이다. 신생공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고, 그 여파로 인해 국내 미술계에선 어떤 변화가 초래됐는가? 나는 본 글에서 그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도, 딱히 그럴 만한 의지도 없다. 벚꽃은 봄에 폈든, 어느 초겨울 날에 일종의 착시로 흩날렸든 간에, 오래 전에 져버렸다. 그리고 신생공간의 시기를 나름대로 회고 및 정리하려는 다방면의 시도들이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패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도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다. 내가 신생공간으로 서두를 뗀 이유는, 다만 그것이 지금 미술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재고하기 위해서다.


비록 신생공간의 시기는 오래 전에 끝났지만, 그와 별개로 나는 여전히 비평적 관객이라는 모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미술 비평을 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련의 전시 및 작업들에 대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충족시키는 일이다. 한때 비평적 관객이 열렬히 주목했던 작업들은, 동시대 미술에 대한 합의가 붕괴된 이후의 시점에서, 자연스레 각종 이론적 사조들로부터 벗어난 채, 작업 그 자체로 제시됐다. 그러므로 작업의 맥락은, 사전에 미리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해당 작업을 임의대로 독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어떠한 레퍼런스도 섣불리 참조하지 않거나, 그러기를 유예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직관에 의지해, 원본의 작업을 재/구성해야한다는 의미다. 굳이 원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특정한 작업이 앞선 과정에 포섭되는 순간부터, 작가의 의도와 별개로, 때로는 그것을 위반한 채, 어떤 식으로든 해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평적인 사고를 연상해내는 일은, 작업 그 자체를 발단으로 삼되, 관객이 그것을 대면한 경험의 파편들을 재료 삼아 전개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이처럼 비평 차원에서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우선 순위에 두는 행위는, 관객과 작업 간의 관계를 지나치게 내밀한 차원에서 형성하게끔 유도하면서, 자칫 작업 자체를 공적인 영역에서 소외시킬 여지가 있다. 그러나 최소한 신생공간의 시기에 한정했을 때, 각기 다른 시뮬레이션의 결과들은, 그 당시에 한창 활성화됐던 트위터와 같은 SNS를 창구 삼아, 능동적으로 발화되기를 반복하면서, 말 그대로의 피드백의 순환 고리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일단 발화된 피드백은, 여타 관객을 포함한 당사자들이 은연 중에 구축하고 있던 네트워크 상에서 효과적으로 유통되면서, 나름대로 유의미한 정보로 기능했다. 그와 별개로 정보는, 특히나 데이터 환경에서 유통되는 정보는, 무엇보다 휘발성이 강한 온갖 단상들을 다소 무작위하게 양산한다. 그러므로 당시의 내가 해야할 일은 거의 자명해 보였다. 종내 정보라는 범주로 수렴되는 비평적인 사고의 역학을 재고함으로써, 나에게 의도치 않게 부과된 비평적 관객이라는 모델을 보다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다.  


비평적 관객은 대체로 자신의 피드백이 정보 차원에서 유통될 것이란 사실을 의식한 채, 앞서 언급했듯 작업을 임의대로 독해한다. 즉 독해의 과정은, 여타 관객들이 적절히 수용할 만한 정보를 구성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는 경험의 파편들이 일관된 텍스트로 종합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비평으로 대변되는 일관된 텍스트는, 온갖 단상들이 범람하는 SNS에 최적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와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짐작됐다. 그러므로 경험의 파편들은, 마침내 그에 부응하는 (작업을 둘러싼) 각종 이미지와 텍스트, 그 이외에 데이터 형식으로 기록 및 저장된 일련의 부산물들로 제시되기에 이른다. 그것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SNS 상에서 다방면으로 증언하면서, 점차 그 자체로 유효한 정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제 경험의 파편들이라는 전제는, 대략 두 가지의 분기로 나뉜다. 1) 그것들을 재료 삼아, 작업의 내적 구조를 해명할 수 있는 비평적인 사고를 전개한다. 2) 그것들에 부응하는 부산물들, 즉 작업으로부터 파생된 일종의 데이터-소비재들을 운용하는 과정 자체를 공유한다.


주지하듯 나는 애초에 전자의 역학 관계를 재고하려 했으나, 그것은 사실상 작업 외부의 레퍼런스를 배제한 채 수행하는 기존의 인상 비평을 답습하고 있다. 한때 비평적인 사고가 다소간 유별난 의제로 부상했던 이유는, 다만 그것이 관객성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최소한 국내 미술계 차원에서 (작업 그 자체를 발단 삼은) 보다 능동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때 서로의 관객을 자처했던 나를 포함한 당사자들이, 신생공간을 매개로 점차 미술가로서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고, 무엇보다 각개의 활동들을 위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자, 네트워크에 대한 기대 혹은 가능성은, 신생공간의 시기와 함께 불시에 끝나버렸다. 반면 후자의 경우, 신생공간을 기점으로 우연찮게 발생한, 작업을 둘러싼 새로운 경험을 가시화한다. 이를테면 원본의 작업은, 그것이 전시 차원에서 제시된 이후, 자신과 관련된 온갖 데이터-소비재들을 감내해야한다. 즉 이제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선점한 누군가는, 아직 미처 비평적인 사고로 구성되지 못한 경험의 파편들을, 언제든지 데이터-소비재라는 형식으로 누설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다시 한 번, 나는 비평적 관객이라는 모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내가 작업으로부터 확보한 일련의 데이터-소비재들은, 결국 비평적인 사고를 발단 삼아 전개되는 텍스트의 흐름 속으로 편입된다. 그 결과를 단순히 인상 비평이라 호명하든, (한때 신생공간에서 통용됐던) 작업의 내적 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시도의 연장선상에 놓든 간에, 어찌됐든 지금 시점에서 특정한 작업이 관객으로서의 경험을 온전히 충족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온갖 데이터-소비재들의 근원지가 돼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글은, 그 과정을 비평적 관객의 관점에서 추적하기 위한 일종의 단초다. 즉 나는 차후에 계속 연재할 글들에서, SNS로 대변되는 광범위한 데이터 환경을 의식한 채,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작업들의 다채로운 양상과, 그것을 다양한 링크들을 통해 경험하는 관객의 특정성에 대한 논의를 임의대로 전개할 것이다. 비록 해당 논의의 맥락을 사전에 가늠할 수는 없지만, 주지하듯 비평적 관객은 자신의 직관에 의지해 논의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맥락을 형성한다.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