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미술: 새로운 공간성을 위한 12개의 단상들」
권시우, 하상현
* 권시우와 하상현은 ‘큐브 미술’을 논의하기 위해, 각자의 공간에서 쓴 글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로 엮었다. 권시우의 글은 K로, 하상현의 글은 H로 표기했다.
1. 서소문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자유낙하: 미술관에서 튕겨 나온 ‘큐브’
2023. 1. 17 H
화이트큐브를 발명한 알프레드 바아의 1929년 전시에서, 당시 MOMA 전시장의 높이는 약 3m였다. 현재 미술관의 스케일은 4.5미터에서 6미터 사이로, 비일상적인 공간을 지향하며 점차 스케일을 키우고 있다. 미술품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또 공공의 담론을 형성하는 장치로서 미술관은 특정한 공간 스케일과 함께 작동한다.
나와 권시우는 최근 한 전시에서 미술관의 규모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또 동시에 그것에서 튕겨져 나온다는 이상한 감각을 공유했는데, 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¹의 “키키스미스 개인전-자유낙하”이다. 한 전시에서 동시에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된 것은, 해당 전시가 탁월하게 한 작가의 회고전을 물리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선 개별 전시에 대한 이야기보단, 전시를 담는 공간과 그것의 스케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권시우의 글 「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에서 “큐브 미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이소의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최근 한국 소설이 그리는 ‘집’의 좌표평면」²에서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집, 특히 실제 주거 수준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하우스’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 “큐브 문학”이라는 표현을 미술 공간에 확장시킨 것이다. 그는 본인을 포함한 젊은 미술가들이 생활하는 거주 공간의 형태가 여러 개의 방을 가지지 못한 원룸이라는 사실과 미술대학 졸업 후 젊은 작가들이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의 스케일에 대한 논의를 겹쳐둔다. 나는 이러한 “큐브” 공간과 조각과 맺는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 생겼고, 해당 내용을 심화해서 써보자는 제안을 했다.
먼저 미술관의 스케일을 자각하게 만든 회고전인 “자유낙하”를 되짚어 보고 싶다. 회고전(回顧, retrospective)은 횡(시간)과 종(형식)으로 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 형태이다. 회고는 뒤를 돌아보고 돌아본 그것들을 다시 현재로 향하도록 하는 움직임이며, 이는 작가의 아주 오래전 작업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을 이어 내, 관객에게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작업 이후 다음 작업을 배치하고, 그 둘을 촘촘히 이어내는 설계된 동선을 통해 작동한다. 벽에서 다음 벽으로, 그리고 벽에서부터 중앙에 솟아 오른 동상에게 눈길을 뺏기며, 조각상을 돌다, 이내 유리로 된 쇼케이스안의 작은 오브제들을 바라보고, 쇼케이스 안에서 눈의 동선을 그리면서. 이처럼 하나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관람의 시간을 통해 작가의 (비)가시적인 세계, 심지어 창작을 하던 자신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업 세계의 지도가 공간에 펼쳐진다. 이 같은 회고의 움직임은 미술관의 축적된 지식으로 구현된다.
나는 한편으로 미술관이 부리는 마술적 시공간에 빠져들면서도, 또 다른 관람의 상태가 간섭하는 것을 느꼈다. 이는 작업의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머릿속에 데이터들과 대조하여 빠르게 분류,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회고의 움직임과, 빠르게 캡처하는 감각은 서로 부딪힌다. 캡처의 속도감은 작업의 디테일로부터 제작 과정을 추-상상하는 행위와 그 상상된 제작 과정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 캡처의 관람 방식은 유리로 제작된 쇼케이스나, 사각형 프레임을 통해 작업을 바라보았을 때 특히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겹의 유리를 겹쳐, 독수리의 형상과 질감을 중첩-분리하여 구현해 낸 키키스미스의 최근 작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왜 미술관의 회고전에서 작업의 방대한 시간적인 차원을 짐작하게 되면서도, 그것에 충분히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일까? 이것이 큐브 공간과 관련이 있을까? 지금으로서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감각이 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의 스케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원거리를 조망하는 회고의 움직임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커다란 스케일을 다룬다. 반면 전시물을 캡처하는 감각은 특정한 근거리의 감각³이며, 시간적인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간 대상을 회고하기보단, 데이터가 저장되는 움직임이고, 대상을 분류하지만, 특별히 의미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각인 되어 있는 어떤 관람의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거리와 각도에서 예술 대상을 만나고, 그 거리까지 도달한 이전과 이후의 시간과 동선,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망각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¹ 전시가 열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의 전시장의 높이는 4.5미터이다.
² 이소,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최근 한국 소설이 그리는 ‘집’의 좌표평면」, 문학과 사회 140호(2022)
³ 이것은 초근거리 감각과도 구분되는 거리 감각이며, 쉽게 접할 수 있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촬영 시 특수한 접사렌즈를 사용하지 않는다면피사체에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이 때문에 ‘캡처 감각’이 발생하는 거리의 다이나믹은 크지 않다.
#1. 커피 앤 시가렛
2023. 1. 18 K
키보드로부터. 벌써 작년의 일인데, 사실 작년이라고 해봤자 불과 한달 전의 일이다. 상현 씨와 다른 지인들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연말 회담 비슷한 것을 가졌다. 카페 이름은 ‘커피 앤 시가렛’이었는데, 카페에서 마땅히 담배를 피울 곳이 없어서 다소 의아했던 기억. 게다가 카페는 어느 고층 빌딩의 고층 어딘가에 수납돼 있어서, 담배를 피우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 빌딩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래서 내 기억상으로는 담배 피우기를 그냥 포기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것부터가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흡연자로서는 원래 ‘커담’이 묘미이거나, 커피를 몸 속에 주유한 순간부터 담배가 어느 정도 필수라고 생각하는 편. 상현 씨는 비흡연자로서 ‘커피 앤 시가렛’에서 모이자고 한 건가? 일행 중 누군가는 약간의 숙취를 토로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차분했으며, 나는 금단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커피 앤 시가렛’은(흡연자에 대한) 일종의 기만이다. 마치 커담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나를 유혹했지만, 정작 이곳은 흡연을 환대하지 않는다. 흡연을 하려면 빌딩에서 탈출해야한다. 그렇다고 도중에 탈출해버리면, 애초에 그건 커담이 아니지 않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아마 내 몸 속에 주유된 커피는 모두 소진될 것이다. 커피와 시가렛은 매개되지 않는다. 이건 ‘커피 앤 시가렛’의 음모다.
우리를 포함해, 카페 속에 있는 모두가 그런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인구 밀도가 높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테이블이 만석이 됐다. 심지어 웨이팅 손님들까지 있다는 사실에 나는 혼자서 마음 속으로 경악했다. 포토샵으로 우리를 제외한 모두를 크롭해서 이곳에서 삭제하고 싶었는데, 문제는 내가 포토샵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에 다소 자괴감을 느끼며, 커피를 건배. 간만에 모인 우리는 우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물론 단톡방에서 이미 다들 잘 지내냐고 물어봤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이 테이블은 단톡방 유저들의 정모 같은 것으로서, 무엇보다 대면의 감각이 중요하고, 대면으로 각자의 근황을 토로하는 것은 확실히 단톡방에서 주절거리는 텍스트와는 느낌이 다르다. 현실에선 텍스트의 질감 같은 게 있다. 질감이 있는 텍스트가 나를 관통하고, 여러분을 관통하고, 만석인 테이블 사이를 관통하고, 결과적으로 ‘커피 앤 시가렛’은 질감으로 웅성거린다. 내가 질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뭔가 낯설다. 낯설 때마다 담배가 마렵다. 나는 질감의 일부다. 계속되는 근황 토크 사이로 다른 테이블에서의 웅성거림이 개입한다. 그래도 나는 대화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키보드로부터. 그날 모인 당사자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가 미술가였다. 이왕 모인 김에 이곳에서 탈출해 시립미술관으로 가기로 했다. 시립미술관에선 키키 스미스의 첫 아시아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다. 개인전의 부제는 자유 낙하. 사실 부제를 확인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키키 스미스가 아니라, 히토 슈타이얼이 쓴 동명의 글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유 낙하 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방향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으며, 심지어 어디로 낙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심각한 길치로서, 네이버 지도 어플이 없으면 아마 혼자서 시립미술관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엄청 헤맬 것이다. 그래서 일행들이 가는 대로 갔다. 그들은 네이버 지도를 대리하는 인간 네비게이션이었고, 시립미술관을 향해 걷는 동안 인간 네비게이션들과 간헐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네비게이션에 반응하는 나. 나에 반응하는 네비게이션. 그러나 길치로서의 나는 네비게이션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딱히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은 채로 마침내 시립미술관에 도착했다. 과장을 많이 보태자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자유 낙하한 기분. 개인적으로 미술관 방문은 오랜만이었다. 작년에는 이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주로 미술관이 아닌 큐브들을 전전하면서 전시를 관람했다. 일전에 쓴 어떤 글에서 나는 큐브가 반드시 원룸은 아니지만, 원룸과 유사한 맥락에서 협소하게 정의된 공간이라고 언급했다. 내가 가담하고 있는 미술계에는 더 이상 공유지가 없거나, 다만 큐브라는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큐브 미술에 종사하고 있다. 큐브로서의 전시장은 고층 빌딩이나 낙후된 상가, 그 외에 큐브보다 거대한 건물 어딘가에 수납돼 있다. 수납돼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경험은 때때로 기묘하다. 나를 포함한 관객은 수납돼 있는 공간 속에 관객으로서 수납돼 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문득 내가 수납될 정도의 크기로 축소된 미니어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미니어처인 채로 전시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각자의 일정 때문에 미술관 1층에서의 전시 섹션만을 관람했다. 나머지 섹션들은 언젠가 다시 보겠지. 전시장에서 나오는 길에 상현 씨에게 지나가듯 스케일의 감각에 대해서 얘기했다. 미술관이 나에 비해서 너무 거대한 것 같다고, 그래서 1층 전시장에서 약간의 공황 증세에 시달린 채로 작업들 사이를 배회했다고 주절거렸다. 키키 스미스가 만든 조각들이 있었고, 사진도 있었고, 회화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그냥 풍경처럼 스캔해 버렸다. 스캔된 이미지는 너무 모호했다. 저화질이었다. 나는 저화질의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전시장 안의 다른 관객들처럼 걸어 다녔다. 그러나 걷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었다. 저화질의 눈만이 공중에 떠다니는 느낌. 나는 우주에 폐기된 인공위성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술관에서 탈출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지. 방향 감각 상실. 사실 나에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담배가 마려웠고, 이번엔 그냥 피웠다.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짐.
2-1. 화이트큐브, 그리고 ‘큐브’: 백색의 탈락
2023. 1. 20 H
권시우가 언급한 ‘큐브’라는 단어는 흥미롭다. 이는 우선 전시의 형식이자 공간을 지칭하는 화이트 큐브에서 백색을 탈락시킨 단어로 볼 수 있다. 백색으로 벽과 배경을 칠한 화이트큐브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맥락을 지운 특수한 공간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지워 가상적인 공백을 만들고 그 위에 새로 예술-사물을 둔다. 이는 쓰여진 글을 화이트로 덮고, 새로운 말을 눌러 새겨 넣는 일과 비슷하다. 이때 발생하는 몇 가지 공간적 특징이 있다. 화이트큐브는 눈앞의 사물을 환영으로 가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그것은 밝은 빛을 통해 사물을 드러낸다. 공간 전체를 높은 조도로 비추며, 사물에 일어난 현상과 흔적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 관객이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조야함과 정밀함, 손자국과 매끈한 표면을 모두 관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또 화이트 큐브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는 관객의 몸을 가리지 않는다. 관람자에게 스스로의 몸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고, 바깥 세계에서 때어 온 가상적으로 배치된 예술-사물들 사이를 산보하게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인 나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도록 한다.
무언가를 지우고 생겨난 공간에서 다시 무언가를 가리지 않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자연광이 밤과 낮의 시간을 따라 사물을 어두운 것에서 밝은 것으로, 다시 밝은 것에서 어두운 것으로 보이게 하며, 변화하는 대상으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화이트큐브의 조명은 대상을 무시간적인 것으로 만든다. 미술의 역사 안에서 이 같은 밝게 비춰진 벽과 바닥, 무시간적 조명은 공간을 일상을 벗어난 초월적인 무언가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화이트 큐브의 백색에서 이탈되어 드러나는 ‘큐브’의 공간성은 어떨까? 이는 관람자인 ‘내’가 물리적인 백색 공간에 있는 것과 무관하게, 이 같은 백색의 기능이 오작동하거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계에서 발생한다.
‘큐브’가 백색으로부터 이탈한 어떠한 공간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일상적 삶의 공간의 맥락으로 돌아오는, 혹은 일상의 공간을 재맥락화한 공간일까? 부엌에서 전시를 선보인 한스 울리히 오블리스트의 <더 키친쇼>(1991)와 같은 화이트 큐브 이후의 장소 특정적인 미술공간, 혹은 제도비판 미술 이후 재맥락화된 화이트 큐브, 또는 니콜라부리오가 지향한 ‘관계성을 창출하는 공간’과 같이 말이다. 그렇지 않다. ‘큐브’가 원룸이라는 개인의 실제적인 주거 공간과 닿아 있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룸의 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을 미술의 맥락에서 작동시킨다기보단, 인간이 사는 원룸과 그 스케일이 사후적으로 발생시킨 공간성과 관련된다. 큐브는 오히려 화이트큐브 이전의 전시 공간인16세기 ‘경이로운 방-캐비넷’의 시각성을 닮았다. 캐비넷은 전시 공간의 시초가 된 개인의 수집 공간인 ‘스투디올로(지금의 스튜디오)’ 이후 사람들에게 낯설고 희귀한 사물을 모아 보여준 공간으로, 한꺼번에 다수의 작품을 시각적 유사성에 기반해 전시하였다. 큐브의 시각성은 이처럼 화이트큐브 이전의 원초적인 경이로움을 자극하는 전시 형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케비넷의 전시방식이 현대화된 것”이라고 표현했다.¹
이처럼 큐브는 미술관 제도 밖의 일상 공간을 전시의 공간으로 삼은 것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큐브는 미술관의 스케일에서 가능한 무언가가 이탈되고 탈락된 보기의 방식과 관련되며, 원초적인 보기의 충동과 그것을 공중에게 보여주는 시원적인 전시 형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권시우의 글에서 ‘큐브’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방인 원룸의 사이즈를 지칭하기도 하고, 대안공간과 신생 공간 이후 산개한 전시 공간의 스케일, 그리고 그 스케일과 붙어 있는 작가와 관객들의 미적 공간 감각을 지칭하기도 한다.
원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방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단어 그대로 와 다르게 사실상 ‘방’이라는 개념이 없는 주거 공간이다. 방이 가족 단위의 구성원들을 위해 분화된 공간을(부엌, 거실, 안방, 작은 방) 뜻하는 표현이라면, 그래서 ‘자기만의 방²’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원룸은 사실상 (상대적으로 위치 지어진) 방과는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대도시로 이주하며 거주하게 된 고립된 섬과 같은 공간이다. 이곳에선 침실과 부엌이, 거실과 책방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 공간에는 나를 잡아끄는 아이도, 잔소리하는 어른도, 나를 보듬어주는 조부모도 없다. 그곳에는 타인이 없는, 섬에 고립된 유아론적인 ‘나’가 거주한다. 좁은 방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밖으로 나간다. 커피숍, 식당, 지하철, 미술관, 피트니스센터, 술집과 클럽, 때때로 타인의 원룸. 그리고 이내 다시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유튜브와 릴스, SNS 공간을, 타인의 원룸을 지켜본다.
¹ 해당 내용은 2021년 9월 서울무용센터에서 주최한 대담, <전시가 움직임을 설계하는 방법들>에서 김지연 큐레이터의 ‘케비넷’에 대한 논의를 큐브 공간과 겹쳐둔 것이다. 김지연 큐레이터는 미디어시티 서울과 같은 전시에서 가벽이 사라지고, 각목과 스크린, (특히) 지향성 스피커를 사용하여 개별공간을 확보한 전시 형식을 관람하며 “케비넷의 전시방식이 현대화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² 버지니아울프는 사회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개별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로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했다. 이는 남성 중심의 규범으로 촘촘히 구성되어 있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버니지아 울프 『자기만의 방』)
2-2. 블랙박스와 ‘큐브’ : 검은 화면과 바로크적 충동
2023. 1. 22 H
‘큐브’라는 공간을 화이트큐브의 백색의 기능이 오작동하는, 그래서 미술관이 지향하는 관람성이 어떤 식으로든 미끄러지는 공간으로 본다면, 반대로 우리는 또 다른 공간, 극장의 검은 공간인 블랙박스와 큐브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극장의 관람성, 특히 아고라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극장의 공공성과 큐브 시각성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어 보인다. 과거 극장의 공동체적 공공성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떠올려 보자면, 먼저 이는 거주 공간의 관점에서 극장 관객이 한 지역에 장기간 혹은 평생 거주하는 조건과 이와 연동된 군주제(또 귀족사회)와 관련이 있었다. 또 매체 환경의 관점에서 이는 주된 볼거리가 극장에서 한정되어 있던 시대에 작동했다. 반면 원룸과 큐브의 시각성은 대도시에서 장기적인(혹은 영구적인) 거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옮겨 다닐 수 있는 모듈화 된 집과 그러한 모듈과 함께 이동하기에 최적화된 스마트폰-영상 매체(OTT 서비스와 SNS 공간)와 함께 작동한다.¹
이러한 차이 때문에 일견 블랙박스와 큐브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극장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장치인 검은 공간과 그것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극장이라고 하면 떠올릴 어두운 공간인 ‘블랙박스’는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널리 사용된, 인공적으로 발명된 공간이다.² 그것의 시초가 된 공간은 작곡가 바그너와 건축가 고트프리 젬퍼의 ‘뮌헨 오페라 하우스’로, 이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기계장치로 환영을 만드는 파노라마와 디오라마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바그너의 극장은 또다시 영화관의 건축적 구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 발명된 공간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눈앞에 있는 “스크린”의 환영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어둠’이 필요했고, 관객 자신의 신체, 주변의 현실 공간과 제약들을 잊게 하는 ‘검은 공간’이 발명되었다.
이렇게 발명된 어둠을 “바그너식 어둠(Wagnerian Darkness)”³라고 부른다. 바그너식 어둠은, 앞서 말했듯 현실 공간의 위계를 잊게 하고, 관객의 몸을 보이지 않게 해 눈앞의 스크린-이미지의 공간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객 신체의 사라짐’은 완전하게 이뤄질 수 없으며, 항상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어떤 몸’으로 남아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를테면 극장 초기에서부터 그곳에 만들어진 어둠은 위계적이고 도덕적인 현실 공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들을 불러들였다. 그곳은 결혼한 남녀가 자신의 아이를 집에 두고 불륜이 일어나는 장소였고, 가부장제와 이성애적 규범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온갖 퀴어들과, 부도덕한 몸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곳은 에로티시즘과 파토스적 충동이 꽃피는 장소였다.⁴
큐브와 블랙박스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블랙박스를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한정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생산해낸 ‘어둠’과 그것의 관람성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과, 이 어둠이 애초부터 (연극, 무용, 음악 연주회를 위한)공연장과 (영화 상영을 위한)영화관의 경계에서 탄생하고 유통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이 어둠은 물리적인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특정한 보기의 방식을 신체에 삽입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블랙박스의 어두운 공간이 일차적으론 보는 관객의 몸을 사라지게 하지만, 밝은 빛이 사라진 공간에 또 다른 비가시적 몸들, 파토스적 욕망을 가진 육체들이 출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이때 몸은 보이거나(극장의 위계적 공간 위에서 왕과 후원자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스크린에 완전히 몰입하고 꿈의 공간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잊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나 동시에 보이는 이중적인 (비)가시성의 상태로서 존재한다. 이때 몸은 두 차원을 끊임없이 왕복하거나 두 차원 모두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앞서 화이트큐브가 큐브의 특정한 근거리 감각과 함께 오작동한다고 설명했다. 이때 큐브의 시각성이 미술관의 현상학적이고 물리적인 환경과 무관하게 혹은 그것과 평행해서 작동하는 것처럼, 블랙박스의 ‘어둠’이 작동하는 조건은 반드시 공간의 물리적인 어두움과 관련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어둠은 ‘박스’처럼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좁은 구역에서도 작동하는 무엇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빛을 뿜고 있지 않은 검은 액정 화면이 차지하는 구역으로서 어둠이다. 이 검은 화면은 재맥락화된 블랙박스이며, 다양한 사이즈의 이차원 평면을 통해 작동한다. 재맥락화된 블랙박스는 사실상 과거와 같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어두운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블랙스크린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는 온전히 스크린 ‘속’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크린 속 환영과 함께 스크린의 물리적인 얇은 두께면을 인지하게 만드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블랙박스와 블랙스크린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중첩된 어두운 공간을 다룬 몇 개의 작업들이 떠오른다.
작가 김무영은 퍼포먼스 <Nimbus>(2019)에서 액션영화 촬영 현장의 몸짓을 전시 공간에 불러온다. 쓰러지는 나무와 구조물, 총알을 피하는 움직임, 멋진 착지 장면과 같은 클리셰적인 동작들, 그리고 이를 촬영하는 촬영자의 움직임이 공간에 뒤섞인다. 관객은 발생하는 상황 사이를 밝은 전시장 공간을 이동하며 퍼포먼스를 관람한다. 이때 퍼포머의 움직임은 철저히 스크린으로 매개된 영화적 환영을 구현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완전히 장면에 몰입할 수 없다. 화면에 접속하지 못하고, 이내 이탈해 그 검은 액정을 차갑게 바라보는 감각은 브레히트적인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의외로 작업은 이내 ‘정서적’이고 모든 것이 과잉된 방향으로 흐른다. 퍼포머의 몸짓이 이렇게 감각되는 물리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중력인데, 구현하려는 이차원상의 신체-이미지에 아래 방향으로 중력이 계속 작용해 결국 바닥에 붙어버린 취약한 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모든 대상이 상호작용하는 촬영 현장의 유아론적인 성격은 이내 ‘어둡고’ ‘좁은’ 공간을 형성하고, 그곳에는 바닥에 붙어 있지만 서로 뒤엉키고자 하는 파토스적인 몸들을 모여들게 한다. 이러한 과잉의 감각을 추동하는 것을 ‘바로크적 충동'으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룸의 조건하에서 충분히 구현될 수 없는 역동성, 사치스러움, 과잉의 감각을 향해 트라우마적으로 돌진해 가는 움직임. 그것을 차갑고 검은 액정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서도, 그 액정을 격정적으로 부수고, 손과 살에 깨진 유리조각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고자 하는 충동, 이때 검은 액정은 때때로 이상한 각도로 반사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여 준다.
윤자영 연출의 <여름밤의 링크>(2017)는 이 같은 바로크적 충동을 극장에서 구현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화목한 가정과 상류층을 상징하는 피겨스케이팅의 얄팍한 환상을 다룬 이 작업은, 마찰력이 작아진 얼음 위에서만 가능한 피겨스케이팅의 동작을 값싸고 하얀, 미끄러지지 않는 무대 플로어 위에서 수행한다. 고도의 동작을 구현하기 위한 예산과 훈련과정이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된 이차원적 이미지는 무대 위에 물리적인 환경에서 처참하게 미끄러진다. 하지만 김무영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작업은 이를 브레히트적으로 폭로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어깨 높이까지 우스꽝스럽게 확대된 피겨스케이팅의 칼날은 퍼포머의 허릿살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게 움직이며, 공연의 흐름과 무관하게 갑자기 침입하는 과장된 연극 톤의 대사는 증폭된 사운드와 함께 관객을 위협한다. 폭로된 환영을 경험하는 몸의 감각은, 이미지를 초과해 360도 회전하여 다시 관객의 몸을 둘러싼다. 이러한 폭력적인 과잉의 감각은 아르토의 연극적 지향인 ‘잔혹극’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들이 구사하는 이 같은 재맥락화된 블랙박스는 ‘큐브’가 미술관의 환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제도비판 미술과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장을 브레히트적으로 폭로해 어둠과 환영을 거둬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가들은 ‘원룸’과 같이 개별화되고 유아론적인 환영의 세계, 네모나게 좁아진 몸의 상상된 이미지를 어떻게 다시 외부로 노출시키며, 동시에 이를 공동의(적어도 타인의) 감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그 조건을 더듬는다. 이들의 작업은 사태를 멀리서 떨어져 공간을 폭로하는 ‘풍자’나 ‘비판'의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작업은 좁은 공간 속 과잉적이고 장식적인 자신의 신체를 또 다른 (물리적)공간에 열어내는 행위, 즉 바로크적 충동 자체이다.
¹ 지그먼트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전통적인 근대성을 딱딱한 고체로, 후기 근대성을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유체성으로 설명한다. 이때 노동과 자본, 생산자와 소비자와같은 개념들은 더 이상 각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견고한 강체가 아니라 모호하고 개인화된 네트워크상의 개념이 된다. 본 글에서 중앙 집중화된 권력과 그와 연동된 극장의 관객성은, 현대 도시에서의 거주 공간을 계속 이동하는 주체들에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공간은 붙박이적인 무겁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액체나 기체같이유동적으로 흐르고 섞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지그먼트 바우먼의 『액체근대』 3장: 시/공간, “뱉어내는 장소들, 먹어 치우는 장소들, 비(非)-장소들, 그리고 빈 공간들” 참조
² 블랙박스가 발명되기 이전의 극장은 원래 ‘밝은 공간’이었다. 이는 극장을 보는 관객의 몸, 특히 왕, 귀족, 후원자의 신체를 드러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극장에서 펼쳐진 예술 작품과 현실의 관객의 몸은 강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관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³ 바그너식 어둠은, 현실 공간과 그곳에 작동되는 위계를 잊게 하고, 공간과 관객의 몸을 사라지게 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물리적인 장치들이 필요했다. 이는 검은 벽, 오래 앉을 수 있는 의자, 환기구 시스템, 극장 조명을 위한 전기의 발명, 화재 경보시스템 등이 있었다.
⁴ 바그너식 어둠의 발명과 그곳에 모여든 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Noam M. Elcott, 『Bodies in the Dark Cinemas, Spectatorship, Discipline Residue』, “Spaceless Darkness”, 2021년 4월 김무영 작가가 제공한 영문본 텍스트.
⁵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에서의 “‘잔혹’은 결코 피나 직접적인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 더 추악한 형태의 폭력, 근원적이며 삶과 관계 깊은 폭력을 의미한다. 비록 그가 소재로서 피와 폭력으로서의 잔혹함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소재에 불과할 뿐,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잔혹극은 아니다.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진정한자유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든지, 하늘은 고정돼있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각인시켜준다든지 등의 폭력이 바로 아르토가 주장하는 잔혹함이다. 이는후대의 실존주의와 관련된 절망에 가까운 폭력을 어느 정도 연상케 한다.”, Jjaloff, “앙토냉 아르토- 잔혹극 (1) 잔혹극의 이론, 폭력과 근원적 신화의 분출”
#2. A의 원룸에서
2023. 1. 21 K
나는 페북 피드를 확인하다가, 리움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이 개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발견했고, 그 사실을 A에게 넌지시 말해줬다.
"덕 테이프에 붙인 작업도 오려나." A가 중얼거렸고,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덕 테이프는 뭐고, 거기에 붙인 작업은 뭐지? A에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어차피 구글로 검색하면 되니까. 검색해보니 덕 테이프는 강력 접착 테이프의 일종이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사실 덕 테이프에 뭘 붙인 게 아니라, 덕 테이프로 바나나를 어딘가에 붙여놨다. 농담 같은 작업이었는데,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심지어 작업 제목은'코미디언'이었다. 2019년 작.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1960년 태생이고,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이며, 그의 작업은 대체로 도발적인 해학을 구현하고 있다, 라고 구글의 검색 결과는 설명해줬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도발이나 해학 같은 게 아니라, 그가 그것들을 무려 전세계를 무대로 삼아 농담조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스타 작가라는 점이다. 참고로 <코미디언>은 2020년 기준으로 구겐하임에 소장됐다. 바나나를 전시장 벽면이든 어디에든 덕 테이프로 붙여놓으면 미술 작업이 되고, 심지어 그것은 구겐하임이 소장할 만큼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어쩌면 (스타) 작가는 그런 과정 자체를 도발적으로 해학하기 위해 해당 작업을 구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스타는 농담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나는 농담에 별로 재주가 없다. 설사 내가 스타였다고 하더라도, 농담만으로 돈을 벌거나 나의 농담을 초대형 미술관에게 소장품으로 제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번 리움에서의 개인전에 <코미디언>이 포함돼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고, 그냥 몰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 어찌됐든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포함한 스타 작가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이다. 지금 시점의 내가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을 새삼 복기했을 때, 그것들은 굉장히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워 보인다. 사실 그건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데, 마우리치오 카텔란, 데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뭐 그런 작가들을 연상하다 보면, 그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의 미술 시장의 버블에서 패권을 장악한 채, 버블이 가득 담긴 황금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물론 컨템포러리 아트는 시장만으로 해명할 수 없는 나름의 동역학이 존재하지만, 최소한 나는 이 글에서만큼은 그것을 사치의 미학이라고 개괄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나의 가난을 교차 검증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이의 간극은 너무 광범위하고, 그것을 내가 갚아야 할 채무들과 온갖 모바일 고지서 따위로 채워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별세계의 사람에 가깝다. 다른 별에 속해 있으니, 딱히 실존 인물로 가늠되지도 않고, 사실 리움에서의 개인전 소식을 알지 못했으면, 어쩌면 그는 통조림으로 가공된 채 내 머릿 속의 구석진 자리 어딘가에 영원히 방치돼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나 리움이나 리움이 회고할 예정인 컨템퍼러리 아트 같은 것은 허구에 가깝다. 혹은 허구에 대한 무용담이거나.
무용담은 계속해서 증폭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글에서 증폭되고, 국내외를 막론한 온갖 기자들이 그것의 일부를 마구잡이로 복붙하고, 그런 식으로 취합된 뉴스들은 스레드 형식으로 이어진다. <코미디언>은 2019년 기준으로 12만 달러에 낙찰됐다. 바나나는 과연 리움 미술관의 어디에 덕트 테이프로 붙여질 것인가? 지금 시점에선 아무도 그에 대해 답변할 수 없지만, 어찌됐든 기사 거리로 삼을 만한 좋은 화두다. 그러나 내가 학부 시절에 컨템포러리 아트를 섭식했을 때는 2010년대 초입으로, 아직 그것이 바이럴 마케팅의 대상으로 낙점되기 이전이었다. 여러분에게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입니까? 당시에 존경해 마지 않았던 모 교수님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물론 학생들의 대다수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뭔가 정치적인 질문으로 통용됐다. 이때의 여러분은 다름아닌 나를 포함한 우리였고, 우리는 어쩌면 컨템포러리에 편입될 수도 있는 인재였는데, 그러한 상태가 과연 정치적으로 합당한 지에 대한 의문을 초래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우리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작가에게 저항함으로써, 도발적인 해학 같은 걸 구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글을 쓰고, 하여튼 뭔가를 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우리 학교가 인덕원 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변방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울 도심을 기준으로 봤을 때, 생각보다 까마득한 거리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 밀집해 있는 저가형 원룸들에 모여 살았다. 통학 거리는 대체로 10분 남짓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10분 남짓한 거리만을 오가면서, 학교 안팎에 거의 고여있었다. 그런 여러분에게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입니까? 그건 사실 정치적이기 이전에 벙찔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서구를 발단으로 확산된 동시대에 속해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는 BTS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동시대는 인덕원까지 포괄하지 못했다. 나와 나의 몇몇 친구들은 인덕원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나름대로 탐독했지만, 이미 그것은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에 박제된 사례들로 발견됐다.
줌 아웃과 줌 아웃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동시대의 지형에서 소멸될 운명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 사실에 딱히 유감스럽지는 않다. 어쩌면 나에게 학부 시절이란, 컨템포러리 아트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우리는 박제된 사례들과 함께, 때로는 그것들과 힘을 겨루면서 허구 속에 있었다. 인덕원은 그 자리에 고여있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동시대 그 자체였다. 졸업을 하고, 원룸 속에 수납돼 있던 짐들을 부랴부랴 챙긴 채로 마침내 인덕원을 빠져나오던 날, 동시대는 뒤늦게나마 완전히 종식됐다. 그 이후에 리움은 홍라희 관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한 일을 기점으로 폐관하다시피 했고, 나는 그 사실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동시대와 무관한 온갖 글들을 써댔으며, 지금 이 순간 리움이 나와 무관하게 회생하고 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라는 통조림이 내 머릿 속에서 빠져나와 덜그럭거린다. 나는 그 통조림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이 리움에 방류되면, 리움은 결국 허구가 될 것이다.
리움의 관객으로서 허구에 편입돼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그냥 잠깐 상상만 해본다. 사실 나는 아직 전시 예약 링크에 접속하지도 않았다. 리움에 갈지 말지는 A와 좀 더 상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전시는 올해 7월까지. 리움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게 될 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3. ‘원룸’의 밖, 도시 공간과 도시 몸들 : 개별적이지만 개성적이지 않은
2023. 1. 24 H
큐브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근거리 감각은 비단 예술공간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 공간과 그곳에서의 몸들이 이 같은 공공장소 내의 근거리 감각과 연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피트니스 센터에 운동 기구와 연동된 몸들이 그렇다. 피트니스 센터의 기구들은 각각 사용자를 기다리며, 고유한 부피와 장소를 가진다. 이 장소에 접속된 개별적인 몸은 ‘피트니스센터’라는 공동의 공간안에 있지만, 동시에 그곳에 온전히 접속하지 않고 개별공간을 형성한다. 이 몸들은 개별적인 몸들에게 통상적으로 따라올 법한 ‘개성’을 획득하기보단, 같은 동작을 행하며, (실질적으론) 같은 이상을 공유한다. 신체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공간에서 근접해있지만, 접촉의 차원에서 만나지 않는 몸들은, 다시 행위성의 차원에선 같은 방향을 향한다.
비단 피트니스 센터가 아니더라도, 개별 공간을 확보해주는 도시의 장치를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하철 공간에서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커널형 이어폰을 사용하여 개별 공간을 확보하는 것, 혹은 화장실 공간에서 변기의 배치 방식과 같은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신체 분비물은 결국 하나의 수로로 이어지지만, 화장실은 몸들이 서로를 보지 못하도록 공간이 분리시키고, 사회적 규범을 통해 시선을 차단한다. 사실상 도시 공간은 다수의 인원이 서로에게 과접촉하지 않으면서 공간을 공유하는 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는 도시 공간이 생겨난 후부터 공간과 사물들이 계속 발전해온 흐름이다. 현재 ‘큐브’와 같은 근거리의 공간성을 탐구함에 있어 이러한 개별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적 장치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원룸의 주거 형태나, 1인 미디어 장치(원거리 통신-GPS-지도-카메라—SNS연동체) 사용의 가속화와 관계되면서, 기존의 공적 공간에서 오류를 일으킬 정도로 감각을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개인이자, 사색적인 도시 산책자를 생산하는 화이트큐브의 공간성이나, 한 장소와 시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블랙박스가 구현하는 일시적 공동성은 무언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작동할 수 없는, 무언가 오류를 일으키는 잔여적인 공간이다. 현시대를 특징짓는 보편적인 공간성은 오히려 원룸, 피트니스센터 혹은 ‘개인 소유의 통신 디바이스-SNS-카메라 연동체’인 것 같다. 인구밀도가 높고, 통신망이 잘 구축된 서울은 이러한 큐브적 공간의 가속화가 비교적 잘 드러나는 도시이다.
#3.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2023. 1. 25 K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브는 전시장이다. 이곳에서 ‘화이트’는 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큐브가 전시장이 되기 위해선 ‘화이트’로 탈색될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노출 콘크리트의 유행은 빠르게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노출 콘크리트로 구현된 카페나 쇼핑몰, 심지어 주거 공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 거리로 여겨진다. 조롱의 골자는 그곳들이 노출하고 있는 콘크리트가 너무 과도한 나머지 실제의 폐허와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의 폐허는 정부 주도 하에 도심을 난개발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정권이 바뀌고 한때 그것에 야합했던 복잡한 이해관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됨으로써, 말 그대로 방치된 공간이다. 그곳은 원래 스스로 완전히 소멸하면서 대형 쇼핑몰이나 아파트 단지를 연성해내야 했지만, 이제 그런 환영적 순간을 기대하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부동산 버블을 의도했던 모든 연금술은 실패했다.
당신이 폐허에서 전시장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선 노출된 콘크리트를 갈아버리길 권유한다. 거의 문드러진 벽지를 제거하고, 그 위에 하얀 페인트를 덧바르고, 구멍난 부분들은 퍼티로 메우고, 뭐 그런 식으로 폐허 내부를 둘러싼 거친 표면을 어떻게든 마감해야한다. 물론 그 전에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어쩌면 건물주는 인테리어 시공을 당신에게 무료로 외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할 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공정을 거쳐서 겨우 전시장이 마련된다. 미처 갈아내지 못한 폐허의 잔재들은 그냥 무시하자. 어차피 화이트워싱은 완전히 새로운 하드웨어를 구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도록 망각한 채, 백색 복면을 뒤집어쓰는 행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큐브는 화이트큐브의 조형적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협소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신이 수행한 외주에도 불구하고, 큐브의 기저에는 여전히 폐허가 있다.
노출 콘크리트는 일종의 장식으로 남용됐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레트로 차원에서 회귀한 브루털리즘이 아니다.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 간신히 수납돼 있는 폐허는 때때로 환영처럼 보였다. 사실 지금의 도심 자체가 폐허가 연성하다 만 거대한 환영이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위화감을 해소할 공간으로 폐허를 낙점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폐허에 매혹된 이유는 그것이 일그러진 픽셀이었기 때문이다. 픽셀의 관문에 진입하고 나면, 그간 환영에 불과했던 도심의 음침한 하부 구조가 드러났다. 그건 사실 비밀리에 구동 중이던 하드웨어였다. 노출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채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보면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는 진짜 커피였다. 문제는 그 장면이 언제나 그렇듯이 점차 해시태그로 유포되면서, 이미지의 구천을 떠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폐허의 적나라한 질감은 해상도 차원에서 조정됐으며, 아시다시피 그런 해상도에 부합하려는 새로운 폐허들이 양산됐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털리즘은 새로운 폐허를 뒤늦게나마 합리화하기 위해 위키백과에서 훔쳐온 미사여구에 가깝다. 이 모든 건 도시 재생의 문법이 아니라, 일그러진 픽셀마저 환영의 일부로 회수하는 과정이었다.
티슈처럼 뽑아다 쓴 폐허의 잔재들이 하드웨어를 점령하고 은폐했다. 과도하게 노출된 콘크리트에 대한 조롱은 사실 실제의 폐허와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도심 속의 피난처를 모색했던 사람들이 폐허라는 해시태그가 초래한 ‘밸붕’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각인된 폐허는 환영이 픽셀 차원에서 무너져버린 상태가 보증했던 실재에 대한 감각 그 자체였다. 물성을 지닌 픽셀들이 콘크리트로 현전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거기에 가짜 커피를 쏟아버렸고, 힙스터들은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가 각자의 사진첩에 소장돼 있던 폐허를 삭제했다.
그러나 큐브가 갈아버린 콘크리트는 픽셀이 아니라, 그냥 거친 표면이다. 당신은 폐허를 일시에 삭제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세탁기에 우겨 넣어 찌든 때가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돌릴 수도 없다. 폐허는 가짜 커피를 닦아낸 더러운 행주로 널브러져 있지 않다. 다만 노출 콘크리트의 유행이 빠르게 지나간 이후에, 다시 방치된 공간일 뿐이다. 심지어 한때 노출 콘크리트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폐허에 질려버렸고, 그래서 폐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어쩌면 당신도 그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큐브는 화이트큐브에서 추출해낸 표본으로 구실하기 이전에, 노출 콘크리트에 대한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전지대로 회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전시장들이 방역을 철저히 준수하지는 않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정말 미처 갈아내지 못한 폐허의 잔재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사실 그건 회피의 제스처에 가깝다.
큐브 속에 남아있는 폐허의 잔재들은 다름아닌 밸붕의 징후다. 물론 나는 풀옵션이 구비된 오피스텔 원룸에서 살고 있지만, 가끔씩 내가 풀옵션과 함께 이곳에서 철거되는 악몽에 시달린다. 철거된 옵션들은 중고장터에서 거래되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게 사라진 이곳은 점차 시간에 침식되어 콘크리트로 삭아간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면, 멍한 채로 스탠드 조명이 어렴풋하게 비추고 있는 주변의 윤곽을 헤아리면서 공간을 해상도 차원에서 조정한다. 나의 눈을 언제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의 눈이 일그러진 픽셀을 발견하는 순간, 원룸은 악몽으로 돌변할 것이다. 한번 밸붕이 시작되면, 폐허는 픽셀 차원에서 증식하면서 공간의 해상도를 좀먹는다.
‘화이트’로 탈색된 큐브에 버퍼링이 걸릴 때마다, 그것의 기저에 있는 폐허를 실감한다. 큐브의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이 모든 균열들을 박멸했으면 좋겠다. 혹은 조명을 끄고 큐브 자체가 암전되거나. 그러나 우리는 결국 버퍼링에 적응해야한다. 큐브가 어설프게 구사하는 화이트큐브의 조형적 언어는 언제나 번역의 와중에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뉘앙스를 지닌다. 그것은 ‘화이트’와 폐허를 중재하는 대신, 그 사이에서 큐브라는 공간을 반복해서 호명하고 있다. 큐브는 완전 무결한 밀실이 아니다. 그곳으로 유입되는 작업들은 오히려 공간의 해상도에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때때로 버퍼링 상태에 최적화된 동세를 형성한다. 그러한 동세는 큐브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균형 감각을 환기시킨다. 큐브의 내부에 작용하는 애매한 중력은 더 이상 해상도의 문제가 아니라, 환영에 침잠해 있던 우리의 신체를 흔들어 깨운다. 그 순간에 느껴진 약간의 해방감을 곱씹으면서 큐브 밖의 도심을 배회하다 보면, 마치 내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다.
골목길에서 픽셀이 튄다. 잠깐 눈을 감고, 그곳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지 상상해본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이미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조금 멀미가 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계속 걷는다.
4. 큐브와 연동된 조각의 ‘가벼움’에 대해: 황재민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¹
2023. 1. 25 H
앞서 언급한 「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그것은 “큐브가 일종의 조각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조형적으로 재편할 것인가?”이다. 질문을 어떻게 대답할지와 별개로 질문의 전제, 즉 큐브 자체를 일종 조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큐브는 우선으로 원룸의 주거 조건과 그것이 발생시킨 특정한 근거리 감각과 연관되어 설명되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공간에 관련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큐브를 일종의 ‘조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가시적인 차원을 넘어서 큐브의 특정한 공간성이 조각 안에 삽입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조각이 (통상적인 관점과는 다르게)하나의 분리된 예술품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으로 작동한다는 뜻일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하기보다는 우회하여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황재민 필자의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에서 등장하는 조각의 ‘가벼움’에 대한 내용이다. 해당 글은 크게 두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1990년대 서구 미술이 제3세계에 수입, 번역되는 과정에서의 ‘오류’와 ‘지연’의 부정성의 조건에 주목한 호미 자바의 “틈새 공간”의 개념과 이를 설치미술과 겹쳐진 동시대 한국의 조각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조각에서의 ‘가벼움’을 조각의 중요한 조건으로 재배치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틈새 공간” 개념과 “가벼움”을 연결시켜 조각을 개별 대상을 넘어선 ‘장Field’으로, 즉 대상의 성질을 공간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자 한다. 즉 이것은 큐브의 공간성을 일종의 조각으로 바라보는 시점과 정확히 역방향으로, 조각이라는 대상의 ‘가벼움’이라는 한 성질을 공간적 개념인 ‘장(field)’으로 전개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단절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또 다른 ‘장’을 전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듯한데,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가벼움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가벼움의 장’에서 ‘가벼움’이란 더 이상 무거움의 결여가 아니며, 오히려 무거움이야말로 ‘가벼움이-아닌-것’으로 재배치될 것이다…더불어 ‘가벼움’은 지금 진행 중인 조각 실천이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조형 언어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현재 창작 중인 작가들이 좁은 작업실이나 재료에의 부담, 또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조각의 본래적 언어에 가까운 무거운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며, 역사적인 조각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한계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권오상의 조각이 지시하는 ‘가벼움’이 대항적 성격을 지녔기에 ‘오류’로 평가 받았다면, 현재 창작 중인 조각 작가들이 갖는 ‘가벼움’은 보다 순수하게 부정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각》의 문제 설정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가벼움’을 이어볼 수 있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현재의 실천이 모종의 한계 지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부정적 조건 또한 재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조각’이라는 ‘틈새 공간’에서 말이다.” (ibid.)
여기서 황재민은 조각에서의 ‘가벼움’을 일종의 펼쳐진 장으로 바라본다. 이 가벼움이라는 결괏값은 사실상 수많은 물질적 조건을 통과한 것으로써, 그는 좁은 작업실(협소한 작업 공간의 스케일), 재료에의 부담(경제적 차원), 신체적 한계(이는 둘 이상의 인력을 동원할 수 없는 조건과 관련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권시우의 큐브의 공간성을 설명하는 ‘원룸’의 거주 공간과 신생 공간 이후 산개한 전시 공간의 스케일, 마지막으로 ‘1인미디어장치(원거리 통신-GPS-지도-카메라—SNS 연동체)’를 겹쳐두면 현재 작가들의 몸에 연동되고 있는 모종의 공간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무거운 것’을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 조각을 가볍게 만들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가벼움이 무거움과 촉각성을 재배치한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무거운 조각을 제작하고 운반하기 위해서는 2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고, 다수를 모을 수 없는 경제적인, 물리적인, 심리적인 조건들이 조각을 가볍게 만든다. 또한 조각의 입체성은 작업을 보관할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창작자에게 지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며, 이는 조각의 물성과 역사(관습)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횡단하도록 만든다. 설치미술 이후 전개된 일련의 시도들, 특히 조각의 제작 및 보관의 조건들을 진지하게 재사유하는 시도들을 떠올리게 된다. 주변의 지인-공동체의 공간에 ‘대여’의 형식으로 작품을 임시 양도하는 형식(이주요 작가), 사적인 보관 창고를 공공 영역으로 개방해 공공 미술을 재전유하는 시도(《러브유어 디포》), 접어서 보관할 수 있고 가벼운 ‘종이’와 같은 2차원적 재료들을 통해 조각적인 환영을 재구성하는 것(황수연, 정유진, 최리아 작가), 쭈그러뜨려 부피를 줄이는 방식를 활용한 인플레터블 한 조각(강재원 작가), 제작하고 빠르게 폐기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그에 맞는 조각성을 탐구하는 시도(최하늘 작가), 데이터로 조각을 보관하는 방식(《수장고》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입체 작업과 조각들은 이처럼 현대의 도시공간의 빠른 속도감과 높은 공간 임대료와 불화한다. 동시에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입체물은 다시금 창작자와 관객에게 상실된 촉각성을 향한 추동, 즉 ‘조각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²
다시 황재민의 글로 돌아가 보자면 그는 글의 마무리에서 《각》에 등장하는 작업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리고 특히 홍자영 작가의 작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한때 ‘풍경이-아닌-것’으로 파악되었던 조각을 거슬러 올라, 홍자영의 작업은 가짜 풍경을 짓고 짐짓 돌이나 산이나 물인 척하는데, 시선이 근경-중경-원경으로 이어지는 미니어처로 이입되기를 강제 당할 때 잠시 풍경이 조각인 양 발생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드러나고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는 ‘가벼움’은 무언가의 결여나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고, 마땅히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 ‘틈새 공간’에서는 냉정한 시선에 앞서 도망치듯 과몰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다.(ibid.)
‘풍경’은 원거리로 떨어져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이자, 하나의 대상이 된 공간을 부르는 말이다. 이때 공간에 보는 사람의 몸은 속하지 않는다. 홍자영의 작업은 이 같은 ‘풍경’을 다시 조각적 대상으로 만든다. 이는 어떠한 특정한 공간성-시점이 조각이라는 대상으로 응결된 것임과 동시에 물리적인 전시장 안에 특정한 ‘틈새 공간’을 발생시키는 조각이다. 이는 각각 권시우와 황재민이 상상한 어떤 작동과 만난다. ‘조각’과 ‘공간’ 그리고 이와 연동되어 가는 조각가의 ‘몸’ 연동체 안에서 이들을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이곳에서 어떤 전환이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홍자영 작가의 <호>(2022), <석굴>(2022), <기암괴석>(2022)은 각각, 아래로 내려다보는 호를 그리는 미니어처 우물 조각, 프레임과 부조로 드러나는 석굴의 반-입체성, 얇은 나무판자 너머의 2차원의 네거티브 공간으로서 드러나는 부재한 돌의 외곽선을 가지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미니어처이자 프레임으로, 이차원적 이미지로, 혹은 떨어진 조각적 대상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변환된다. 이러한 프레임적 지각과 현상학적인 3차원 공간을 오가는 횡단의 관람성은 비단 홍자영 작가의 조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큐브’와 “가벼움의 장” 전반에 펼쳐져 있다.
¹ 황재민,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기 위한 과몰입」 중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 abs 4호. 전문은 https://absofficial.us/4/index.html
² 소외된 촉각성을 보충하는 것과 조각을 보관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빗겨나기 위한 또 다른 매체적 시도로 ‘퍼포먼스’를 바라볼 수 있다. 퍼포먼스는 입체적 물질성과신체적 촉각성을 순간적으로 발생시키고 소멸하며, 그렇기에 물질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없다. 1960-70년도의 퍼포먼스의 경우 시장에 판매할 수 없는‘비물질성’에서 매체적 전위성이 발생했다면, 현재의 퍼포먼스의 위상은 공간을 영구적으로 점유하지 않고 ‘물질성’을 발생시킬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해 보인다.
#4. 낮잠
2023. 1. 28 K
나는 상현 씨가 일전에 언급했던 공연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것은 블랙박스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진행됐던 것 같고, 거기에서 실제의 몸과 사물들이 뒤엉킨 채로 뭔가를 했다는 사실 정도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따져볼 만한 문제다.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현장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감각이다. 블랙박스의 어둠에 활력이 생긴다. 기어코 무대로 진입한 존재들은 어둠 속에서 생동하면서, 그 과정이 시퀀스로 분절되지 않는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연은 이미 끝났다. 무대와 함께 모든 것들이 철수됐으며, 그렇게 현장은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심지어 윤자영의 작업은 2023년 기준으로 6년 전에 처음 막을 올렸다. 그 당시에 헤쳐 모였던 관객들은 해당 작업이 상연됐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까? 설사 그들이 기꺼이 증언하더라도, 기억의 시퀀스들로 분절된 사실이 스스로 회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련의 작업들을 관통했던 것은 실재에 대한 감각이라고 추정된다. 그것은 뭔가 날카로워 보이며, 상현 씨의 말에 따르자면 스마트폰의 잠금 패턴을 예리하게 도려내 액정 너머에 구금돼 있던 이미지를 현장으로 유출시킨다. 비록 나에겐 증인의 자격이 없지만, 어찌됐든 나의 소중한 스마트폰이 파손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사실에, 그 사실을 미처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안도한다. 나는 오히려 스마트폰으로 침잠하고 싶다. 소셜 미디어의 과열된 여론에 몸소 참여하는 대신, 침대에 누워 그 모든 것들을 관전하다 낮잠이나 자고 싶다. 오늘은 낮잠을 4시간이나 잤다. 최근에 생긴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루틴이다. 어쩔티비. 베개맡에는 언제나 그랬듯 스마트폰이 놓여있다.
목격자가 아닌 이상, 현장에서 유출된 이미지가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탐정의 자세로 누구부터 심문할 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이미지는 결국 스마트폰으로 반려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업 관련한 키워드들을 구글 검색기에 넣고 돌리면, 무엇이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에게 탐정질은 어울리지 않다. 오래 전에 어떤 심포지엄에서 누군가는 그 당시에 전개됐던 서울의 미술을 가추법을 통해 정의했다. 이때의 가추법은 도심에 산개해 있는 폐허, 그곳에서 자라난 풀들,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귀여운 소품과 같은 사소한 증거들을 통해 의외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것들은 이미 작가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고, 비평은 작가가 무작위로 꺼내 보인 증거의 일부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도시 산책자의 경험을 환기한다.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언젠가 도심 속을 배회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각자의 기억들은 글이나 작업에서 우연찮게 교차한다. 그 순간 자체가 다름아닌 미술이다.
나는 산책이 싫고, 도심을 배회한 적도 거의 없다. 외출을 할 때면 일단 목적지부터 설정하고, 거기까지 내비게이션에 따라 자율 주행할 뿐이다. 그 사이에 도시에 숨겨진 증거들은 계속 누락된다. 도대체 무엇을 증거로 체택할 것인지 자문해보면, 역시나 그 해답은 스마트폰에 있다. 키보드 지판으로 어떤 사실의 정황을 입력하는 순간, 구글은 자체적으로 연산해낸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검색 결과가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으므로, 그것들을 구글보다 신뢰할 만한 알고리즘에 위탁해 최종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그게 바로 진짜 사실이다. 진짜 사실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는 과감하게 생략된다. 알고리즘은 목적지를 굳이 우회하는 대신, 그곳으로 당신을 워프시킨다. 문제는 이제 워프조차도 귀찮다는 사실이다. 되도록이면 그냥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 조금 나른한 상태로 최상위에 있는 검색 결과를 누른다. 양심상 나무위키는 선택에서 제외시킨다. 그것보다는 그럴싸한 항목들의 내용을 스크롤하다 보면, 블랙박스든 뭐든 사실은 적당히 명료해진다.
잠에서 깨고 보니 벌써 주변이 어둑하다. 오늘도 하루를 탕진한 기분이지만, 어찌됐든 침대 위에서 스크롤한 기억은 남아있다. 그 기억을 메모장 어플에 대충 적어둔다. 이제 비평은 그렇게 쌓인 메모들과 메모들 사이의 공백에 대해 진술하는 과정이다. 더 이상 탐정은 없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조만간 노트북 앞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이다. 그리고 메모의 내용을 참조해, 알고리즘의 연산 범위에 포함될 가치가 없어 보이는 또 다른 사실을 워드로 날조해낼 것이다. 가추법이 뭔지도 모른 채로 심포지엄의 발표자를 무작정 비판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액정 너머로 투신하는 척 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비정상적으로 참작해줬다. 그게 바로 원룸 속에 구금된 증인의 전모다.
원룸의 권리를 보장하라. 이것저것 보장하라. 속으로 외치면서, 편의점에 가기 위해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원룸에는 잠금 패턴이 없다. 어차피 담배만 사고 금방 돌아올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시리가 갑자기 뭐라고 대꾸해서 조금 놀랐다. 여기서 냉큼 꺼지라는 걸지도.
5. 미니어처와 마케트, 백색 무대와 바리케이드: 《조각충동》(2022)의 풍경
2023. 1. 31 H
전통적인 조각에서, 조각이 무거워지고 커질 때 우리는 그 대상을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무겁고 큰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의 협력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과정과 에너지가 소요된다. 이러한 무겁고 큰 기념비적인 조각은 동시에 많은 관객에 둘러싸여 보여질 수 있다. 또 이렇게 보여진 조각의 이미지는 여러 변수를 가진 관객의 동선에 의해 다양한 크기와 길이(duration)을 가지고 재편집된다. 이처럼 무거움과 커다람은 조각이 기념비성을 가지기 위한 물질적 지반이다. 반면 가볍고 작은 조각은 상대적으로 기념비성이 발생하기 어렵다.
앞서 설명한 “가벼움의 장”은 조각 제작의 과정에서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 또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관람성에 영향을 미친다. 조각이 가벼워지기 위해선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거나 스케일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가볍고 작아진 조각은 어떤 경우 미니어처와 같이 작동한다. 여기서 ‘가벼움’과 ‘작아짐’은 물리적인 무게와 크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각의 무게가 실제로 무거운 경우에도 관람의 차원에서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커다란 크기의 조각도, 개념적인 차원에서 굉장히 작게 작동할 수 있다. 나는 이번 글에서 가벼워지고 작아진 조각들, 특히 《조각충동》(2022)에서의 입체 작업들을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긴장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 한다. 또 전시 공간에서 놓인 (비)미술적 대상인 ‘무대’와 ‘바리케이드’와 같은 사물들이 조각을 바라보는 것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니어처는 실물 촬영이 불가능하거나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경우, 혹은 위험한 장면의 촬영에 사용되는 모형이다. 이는 원 크기의 작품을 만들기 전 작게 만드는 조각인 ‘마케트(Maquette)’와는 차이가 있다. 마케트는 원조각의 이전 단계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만들어질 큰 스케일의 조각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는 원본의 조각보다 먼저 세상에 등장하여 미래를 예견하고, 사실상 미래의 조각을 창출하는 대상이자, 그러면서도 작은 스케일의 독자적인 조각으로서 수행성(performative)을 가지는 무엇이다. 반면 미니어처는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현재의 대상을 축소하여 재현한다. 미니어처는 ‘이후적’ 대상이다. 이렇게 축소된 미니어처도 원본의 조각과는 다른 무엇이 되는데, 큰 스케일의 원본보다 훨씬 이동이 쉬워지며, 동시에 2차원적 이미지를 취하기(take) 쉬워지는 특성을 가진다. 즉, 미니어처가 특화된 것은 ‘소유’(take)행위와 이동 을 유발하는 것이다.¹
규모가 작다는 물리적인 스케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미니어처와 마케트는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적은 재료가 들고 이로 인해 조각가가 빠르게 입체물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케트와 미니어처와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마케트를 만드는 과정에선 작업대 위에서 중력을 받으며, 시-촉각적인 재료의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미니어처의 미덕은 실제 구현하고자 하는 원본을 충실히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때 재료의 고유한 무게와 오류들(재료의 저항)은 비교적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니어처는 사실상 작업대 위에서 중력을 받는, 물질적으로 무언가에 올려져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다. 미니어처는 조각이 발생하기 전 미리 편집된 대상이며, 떠다니는 이미지가 유령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미-편집된 대상은 새롭게 편집될 동선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는 커다란 규모의 조각이 관객의 동선과 다양한 경로의 편집을 유발하는 것과 비교된다. ‘이미 편집된’ 미니어처적인 조각의 중요한 특징은 둘 이상의 단위와 그사이의 미적인 연계 작용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미적인 연계 작용은 하나의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를 움직이는 관객 동선의 시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미니어처적인 조각은 바로 이 같은 동선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조각의 개별성과 자율성은 이상한 방식으로 회귀한다. 각각의 조각들은 미술관 공간의 지면에 곧바로 ‘닿아 있지’ 않고, 자신을 위한 개별적인 무대를 형성한다. 조각은 관객의 두 다리가 서 있는 동일한 미술관 바닥의 지면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연장의 무대처럼, 관객과 자신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면을 만든다.²
2022년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조각충동》에서는 전시의 주제인 조각과 함께 유독 다양한 형태의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통상적으로 조각을 놓는 장치인 좌대와 무대와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좌대는 일상적인 공간의 맥락에서 벗어난 특수한 대상을 만드는 장치이며, 바닥으로부터 시야에 잡히지 않는 60cm 공간을 채워 준다. 반면 무대는 비교적 낮은 두께의 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정한 영역을 나누어 연극적인 공간을 구획한다. 무대는 좌대처럼 하나의 사물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단, 벌어질 사건과 움직임을 위한 장치이다. 이 같은 특성으로 봤을 때, 《조각충동》에서 직접적으로 무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들은 다음과 같다. 오제성 작가의 조각을 받쳐주고 있는 ‘간이 나무 무대’, 고요손 작가의 좌대를 닮은 ‘백색의 넓은 무대’, 이동훈 작가의 5명의 군무 조각을 보여주기 위한 ‘백색 카페트 무대’, 최하늘 작가의 스마트폰 환경과 컴퓨팅 프로그램의 그리드 안에서 작동하는 ‘(투명)무대’, 일상의 연출된 쇼룸과 무대적 상황 사이에서 조각을 작동시키는 우한나 작가의 ‘짙은 남색의 구역’ 등이다.
미술에서의 ‘연극성’이 한때 미술의 역사에서 그토록 부정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각을 중심으로 한 전시에서 연극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무대의 등장은 의아하다. 더 의문스러운 것은, 이러한 무대가 끌어들이는 연극성은 60년대 미니멀리즘이 주창한 조각(대상)과 관객의 동사적 관계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금 더 문자 그대로의 ‘연극’과 ‘연극성’을 조각과 결합시키는 시도로 보인다.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연극성 이후 등장한 이 같은 ‘연극성’은 큐브의 시각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 조각들은 자신을 위한 무대라는 좁은 구역을 형성하면서, 현실의 지면 위에 놓이기보단 환영적인 차원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동시에 이는 2차원적인 촬영을 위한 무대가 되는데, 이때 공간은 관객의 동선을 기준으로 전시를 엮던 기존의 배치 방식과 비교했을 때 더 분절적으로 배치되며, 감각된다.³ 《조각충동》의 많은 작업들은 공공성을 가지는 커다란 규모의 전시 공간에서 동선을 통한 미적인 연계를 만들기보단, 개별적인 좁은 구역을 형성한다.
무대와 함께 조각 관람에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물은 ‘바리케이드’다. 바리케이드는 조각과 관객을 분리시키는,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이 그토록 거부했던 ‘좌대’의 현대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론 바닥에 붙어 있는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리케이드를 매개로 할 때 대상은 조각이라는 가상적 영역으로 다시 포획된다. 여기서 조각은 보호되어야 하는 개별적인 대상이다. 물론 전시가 열린 북서울시립미술관의 특성상 가족 단위의 관객이 많고, 바리케이드는 작품 파손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리케이드가 동원된 것은 무거운 동상과 달리 파손에 취약한 “가벼운” 조각품들의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많은 전시장 지킴이를 배치할 수 없는 예산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실용적인 선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 도시에서 미술품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적 조건과 “가벼움의 장”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의 취약한 조건이 그 자체로 드러난 상황이다. 여기서 홍성민 작가의 조각과 사물, 그리고 접근금지 장치인 바리케이드와 관련된 코멘트를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물(物 thing)이 애초 거기에 있는 거라면, 사물(事物object)은 배치되고 산물(産物 product)은 진열된다… 문제는(나의 문제일지도) 작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흘러 들어온다. 조밀하게 인접한 작품과 작품 즉, 첫번째 주 전시장 공간의 협소함은 대상과의 현상학적 체험 따윈 고려하지 않은 모양새…큐레이터에겐 작가들의 물(物thing)을 상징으로 배치하여 사물로 옮김이 허용되나 그것이 진열로 보이는건 곤란하다. 산물이 되어버리기 때문. 사물에서 물로 거슬러 이동하려는 작품들을 더욱 반대로 산물로 이끄는건 작품들 사이를 구획짓는 동시에 접근금지 기능의 장치물들… 그 어떤 물thing 도 접근금지 장치물과 작품설명 그리고 입구와 출구를 강제하는 선형적 동선을 만나서는 산물로의 귀결을 피하기 어렵다. 선형적 동선과 진열은 친연적이다.⁴
무대와 바리케이드는 조각과 관객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하나의 조각과 다른 조각을 분리시킨다. 여기서 조각은 각자의 협소한 공간을 형성하면서, ‘동선’을 무화한다.(동시에 물리적 이동에서 좀 더 자유로워 진다.) 때때로 조각은 산물(product)이 되어 납작해진다. 납작해진 산물은 촬영-소유(take)하기 쉬워진다. 이 같은 산물은 보는 이와 특정한 관계를 맺는, ‘정면’을 가진 대상(obejct)과는 다르다. 정면을 가진 대상은 몸의 각도를 조금씩 변화를 주며, 보여지는 면을 살랑거리며 흔든다. 이들은 이러한 춤을 추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반면 산물은 우리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납작해지며, 주머니 속으로 넣고 잊게 만든다. 현재의 조각은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긴장을 가지고 공간에 존재하며, 지면에서 자신의 발을 때어내고 있다. 무대와 바리케이드는 영역을 구분하고, 좁아 든다. 점점 좁아진 영역은 종국에는 조각에서 하나의 ‘신체’, 나아가 그 조각이 가진 ‘피부’까지 좁아 들 것이다. ‘큐브’에 살고, 보여지는 우리가 말하게 되는 것은, 겨우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살끝이 될 것만 같다.
¹ ‘미니어처’는 본래 아주 작은 크기의 초상화로서 목걸이 등의 장신구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17세기 이후부터 미니어처는 사본 삽화를 뜻하게 되었고, 작은 크기의초상화를 부르는 ‘미니어처’는 이러한 사본 삽화와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메달이라는 두 가지 전통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현대에서 미니어처는 영화나 사진촬영에 사용되는 실물보다 작은 모형을 뜻하게 됐다. 이처럼 미니어처는 2차원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소유-촬영(take)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² 현대의 미술 공간에 등장한 관객과 조각 사이의 이 같은 경계면은 연극과 영화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장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드니 디드로가 주장한 연극 무대와객석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인 ‘제4의 벽’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화 이론가 시모어 스턴이 발전시킨 개념인 “어두운 협곡(Chasm of Darkness)”으로, 이는 스크린과관객을 분리 시키며 관객이 스스로의 신체를 잊게 만드는 건축적 조건을 뜻한다.
³ 앞서 인용한 강연 <전시가 움직임을 설계하는 방법들>(김지연 큐레이터)에서 이처럼 관객의 동선을 유도하던 기존의 전시 배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현상에 대해언급한다. 최근 전시들에서 가벽이 사라지는 경향과 함께 이러한 배치는 “동선이 연결된다는 느낌보다는 공간들이 모두 ‘쪼개져’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쪼개진공간은 기존의 큐레토리얼한 관습의 기준으론 잘 배치되지 않은 전시로 느껴지지만, 어떤 한 시점에 작업들의 위치를 고정시키면 완벽한 짜임이 나오는 특수한 배치를가진다. 강연자는 이러한 방식이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씬을 넣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⁴ 해당 코멘트는 미술가이자 연출가, 교육자인 홍성민 작가의 개인 SNS에서 기재한 《조각충동》리뷰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5. 밸런스 게임
2023. 1. 31 K
조각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달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는 그게 별로 주저되지 않는다. 내가 실제로 감상했고, 그 전에 알고 있던 조각 작업들에 대한 인상을 취합하다 보면 조각은 적당히 명료해진다. 결국 모든 건 해상도의 문제다. 물론 조각에는 물성이 있고, 그래서 중량을 쳐야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애초에 나에게 그걸 소화할 만한 신체가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황재민이 언급했듯,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한때 조각이 역사주의로 소급되는 과정에서, 조각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작업들의 현행적 맥락을 제약하고 있다는 진단 하에, 조각이 아닌 것을 수용할 수 있게끔 조각을 포함한 매체를 기꺼이 추상화시켰다.¹ 그런 의미에서 조각은 단순히 개념적으로 확장되기보다, 스스로를 고유한 매체로 호명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한 채, 여타 매체들과 교유하기 위한 확장된 장으로 편입되고 만다. 즉 조각은 이제 확장된 장에서 계속 합의되는 와중에 있는 공통의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위상을 파악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조각인가? 그 이유는 바로 조각이 미술사에 등재된 유일한 기념비이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함락시킨 이후에야 비로소 매체라는 개념을 재창안하려는 시도가 기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각은 함락됐고, 우리는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지난한 공백기를 지나, 침묵에 휩싸인 여론 속에서 이미지라는 화두가 부상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조각이 아닌 것이 아니라, 그저 웹을 포함한 디지털 환경에서 융통되는 환영의 자산으로 납득됐을 뿐이다. 이미지를 둘러싼 담화에 초대받은 히토 슈타이얼 같은 패널들은 자신을 이미지라고 소개한 뒤에 쿠키 데이터의 잔해 속으로 투신해버렸다. 그 과정은 에세이 영화 속에서 길을 잃은 모든 영상 작업들로 상연됐다. 모두가 주체성을 위반하고 있는 열화된 화자였다.
나는 히토 슈타이얼이 아니지만, 최소한 모두의 일원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각을 다시 상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조각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서 불시에 등장했다. 물론 조각의 연대기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암암리에 지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확장돼 버린 장을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사건을 연출하진 못했고, 그래서 이미지가 작성한 메일링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물론 조각도 딱히 초대 메일을 수신할 의사는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3D 프린팅을 통해 현실로 반려된 이미지는 한 동안 조각 취급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조각이 회생한 곳이 이미지에 잠식된 무중력의 시공이라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조각은 별 수 없이 무중력을 감내하는 것만으로, 혹은 그 과정에서 취하게 된 엉성한 포즈로 인해,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이미지의 해상도에 생긴 균열은 단순히 픽셀이 일그러진 상태가 아니라, 이미지를 초과한 실재의 징후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때의 징후는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으로서, 어쩌면 그것을 소실점 삼아 무중력의 시공을 새롭게 재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건은 조각의 내적 논리를 재고할 수 있는 계기다. 이는 단순히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을 넘어, 그간 은밀하게 유지됐던 이미지와의 적대 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시도로 귀결된다. 그간 유사 오브제라는 모호한 범주 속에서 용해됐던 조각의 관습들로 조각을 증류하기 위해선, 결국 이미지라는 필터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밸런스다. 조각이 언제까지나 실재의 징후로만 통용될 수는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서 무중력의 시공에 효과적으로 적응해야한다. 조각만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해상도에 대한 감각을 내파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식의 접근은 조각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부과한다. 이 정도로 비대해진 중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현실의 지반은 단단하지 않다.
최하늘이 자신의 작업들을 망라하는 과정에서 도출해낸 가벼운 조각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조각을 감량하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² 조각은 자신이 이미지가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반드시 덩어리mass가 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작가는 기존의 조각과 대응할 만한 덩어리를 일필휘지로 잘라내고, 그 결과 드러난 단면들을 재료로 삼아 이미지처럼 취합하거나, 현장에서 산개시킨다. 이로써 한때 조각이 유도했던 자기-지시성은, 도저히 조각으로 완결되지 않는 상태 속에서 계속 분산된다. 그런 식으로 성사된 복수의 시점을 따라, 조각의 재료들은 얼마든지 현장에서 벗어나 다양한 곳으로 운송될 수 있다. 재료의 도착지는 미술관일 수도, 면세 구역일 수도, 작가의 작업실일 수도, 심지어 내가 거주하는 오피스텔 원룸일 수도 있다.
물론 나에겐 재료의 저작권에 대한 어떤 지분도 없지만, 가벼운 조각의 지침에 따라 재료가 폐기되기 전에 그냥 그것을 수거하고 싶다. 단순히 조각에 매혹됐기 때문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진 조각의 정황을 토대로 나의 위상을 가늠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시가 막을 내린 이후, 조각은 자연스레 유실됐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각의 재료들을 매개했던 시선의 역학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간신히 수거해온 재료는 지금 이곳에 있다. 다만 원룸 어딘가에 수납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접히고 구부러졌을 뿐이다. 나는 고작해야 조각이 아닌 것만을 소화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이미지가 아닌 것은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다. 무중력의 시공은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 시야 너머로 확장된 조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큐브는 조각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조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 환경이다. 큐브의 스케일을 초과하지 않는 한, 조각은 얼마든지 자신의 중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실제 스케일에 구애받지 않는 밸런스를 모색하게 된다. 나는 큐브 속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납돼 있는 조각들에 대비해 신체의 비율을 측정해 나간다. 사실 조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부정성을 경유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대신, 우선 서로에게 현전하기를 바란다.
¹ 황재민,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기 위한 과몰입」, abs 4호
² 가벼운 조각은 원래 조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전시 이후에 손쉽게 폐기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상됐지만, 작업의방법론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중요한 개념적 소실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작가가 대형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 이전의 일이다.
6. 큐브 미술이 발생시키는 역공간(Liminal Space)
2023. 2. 8 H
하나의 가벼워지고 작아진 조각이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조각은 때때로 관객을 큐브의 가장자리로 데려가고, 그 끝을 인식하게 한다. 이는 사적 공간인 원룸의 사각형 벽 너머를 향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조각이 발생시키는 일종의 역공간(Liminal Space)¹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역공간은 문지방처럼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 사이에 전이 지대를 형성하는 공간을 뜻한다. 리미널리티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과 경험하는 일을 동시에 접붙이며, 사적인 장소와 공적인 장소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는 공간 형성의 변이적이고 동사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전시 《조각충동》에서 정지현 작가의 <공공조각파일>은 중심 형상을 반-가시적으로 비워내면서,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그 형상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reloading) 조각이다. 작가는 작업실 근처 웅크린 여인 동상의 표면을 알루미늄망으로 떠내어 음각의 형상을 얻었다. 이후 그 망들을 수평으로 중첩시키고, 수직으로 쌓아 높이를 가진 조각을 만든다. 이 조각은 몇 가지 방식으로 관객이 원본 형상을 온전히 떠올릴 수 없게 한다. 먼저 알루미늄망이라는 재료의 한계로, 조각은 흐릿하고 불확실한 형상만을 보여준다. 또 각각의 망은 원본과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고, 겹쳐지며, 혼선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마지막으로 얇게 떠온 이차원적 형상을 서로 수직으로 교차시켜 쌓아 올려, 한 위치에서 형상의 일부만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즉 가로로 4등분 된 하나의 상은 하나의 시점에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즉 관객은 계속해서 조각을 돌면서 떠내 온 표피의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짜 맞춰야 한다. 형상의 일부분을 더듬는 동안, 얇게 드러난 두께는 겨우 서 있는 알루미늄망의 물성과 미술관의 바닥 공간을 인식시킨다. 마치 컴퓨터의 ‘조각 모음’처럼 흩어진 데이터들을 모으는 이러한 과정은 관객에게 눈앞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물성을 가진 어떤 대상을 불러오는 불가능한 훈련을 하게 만든다. 이때 관객은 자신의 몸과 동일한 바닥에 놓인 조각과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이 지금 있지 않은 어떤 공간을 지금 이곳과 연결시키는 동사적 행위를 만들어 낸다.
<공공조각파일>은 대상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동일한 중심 형상을 보여주는 무거운 기념비의 방식을 빗겨난다. 이는 떠낸 형상을 불확실하게 재생하게 만드는 사이-가시적인 기념비다. 여기서 보이는 형상은 관객의 이동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며, 기억의 한계로 항상 불완전한 상태로 형성된다. 그렇지만 이는 여전히 관객들의 시선을 조각 주변으로 모이게 한다. 이 시선은 항상 투과적이며, 눈의 초점이 맺히는 곳은 때론 불러오고자 하는 조각의 이미지로, 때로는 그것을 떠낸 알루미늄망의 물성으로, 때로는 너머의 빈 공간으로, 때론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너편의 또 다른 타인의 신체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기념비성은 사실 물질적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동 자체를 유발시키는 조각의 힘과 관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공공조각파일>에서 원본의 조각상과 접촉하여 지표적 흔적을 떠온 재료로서 알루미늄망의 역량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가상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는 마치 3D 스캔이 실제 대상을 떠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는 2차원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이어 붙여 가상의 3차원의 형상을 얻어내는 것이며, 사실상 특수하게 배열된 2.5D의 형상을 가진 조각이다.²
<공공조각파일>이 서로 다른 두 곳, 즉 도시에서 버려진 조형물이 놓인 특정한 장소와 북서울 시립미술관의 공간 사이에서 역공간을 창출하는 조각이었다면, 지나간 시간을 현재와 이어내는 새로운 회고의 형식을 실험한 조각 전시가 있었다. WESS에서 열린 《조각 여정》³이 그것이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내는 형식은 사실 많은 미술관 규모의 전시들(그리고 박물관)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큐브 공간성의 조건 안에서,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것(여성조각가의 삶과 그 조각들)을 새롭게 기억한다. 여기서 '사라져가는 것’은 사실상 ‘기억’ 자체이기도 한데, 《조각 여정》은 계속해서 새로운 예술 대상을 생산해내는 미술계의 속도에 대해 전면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기억하기’라는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몸과 여정으로 이어낸다.
《조각 여정》에서 조각들이 배치된 방식은 여타 미술관의 회고전과는 다르다. 미술관의 회고전은 연대기 순서로 작업을 배치하고, 시기별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분명히 하며, 때론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다. 반면 《조각 여정》은 원정대가 직접 조각가의 사적인 작업실 안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구두로 대화를 나눈 것이 중요하다. 그 대화는 직간접적으로 작업실로부터 전시장에 가져온 (여성)조각가의 조각에 링크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져온 조각은 일종의 ‘하이퍼 링크’로 기능하며, 조각이 만들어진 과거의 시대적 조건, 그리고 그 조각을 만들어낸 사람(여성 조각가)의 몸을 현재의 시공간과 연결시킨다. 이때 전시장에서 조각들은 선형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배치되기보단, 조각과 조각 사이, 몸과 몸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배치되어있다. 관객은 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거의 시대와 여성 조각가의 몸을 통과한 대상과 그것들의 촉성을 비교하고, 연결하며 새로운 시간의 지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모여진 과거의 여성-조각과 현재의 여성-조각 사이의 시간적인 연결은 일종의 연대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기존의 무겁고 큰 남성적 기념비들처럼 하나의 형상을 세우지 않는다. 7개의 중견 여성 조각가의 조각과, 이유성, 홍기하의 조각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며 서로 나누고 있는 대화는 다중적인 방식으로 서 있으며, 수평적 지대위에 놓여 있다. 이 같은 모여듦(gathering)을 만드는 조각의 역량을 역공간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시간적-기념비의 사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기념비는 세워진 상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인 “Monument”보단, 그곳에 모인 주체들의 기억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Memorial”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념비는 모두에게 동일한 형상을 보여주기보단, 각각의 관객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며, 기억과 함께 계속해서 흩어지는 성질을 가진다. 클라우드에게 기억을 위탁하는, 그래서 선후 맥락과 긴 시간성을 구성하는 유기체적 기억의 능력이 쇠퇴하는 시대에 《조각 여정》은, 하이퍼링크를 만들어내는 조각의 힘과 몸의 여정을 동반한 구두 대화를 매개로 새로운 형태의 기념비성을 향해 나아간다.
¹ 역공간(Liminal space)은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제3의 공간 유형을 말한다. 리미널(Liminal)이란 '문간방, 문턱(threshold)', 또는 '경계'를 의미하는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한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네덜란드 인류학자 판 헤네프는 모든 문화 유형에 나타나는 ‘통과 의례’를 3가지로 분류하였다. 이는(일상생활로부터의)분리, (문지방을 뜻하는)전이, (세속적 집단으로 다시 돌아오는)재통합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 동안 제의의 주체들은 일종의애매성의 시기와 영역, 즉 어떤 결과로 생긴 사회적인 지위나 문화적 상태들의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 중간상태(social limbo)를 통과하게 된다.” 이‘사회적 중간 상태’와 그것을 형성하는 대상-공간-인간의 결합체에서 역공간성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응용 및 재현에 관한 연구」, 조대원, 임종엽, 대한건축학회(2003)
² 히토 슈타이얼은 3D 스캔 방식의 이 같은 2.5D성에 관해 다루었다. 자세한 내용은, 히토슈타이얼,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현실을 리핑하기: 3D의사각지대와 깨진 데이터”
³ 《조각 여정》(2022)은 WESS에서 노해나가 기획하고, 노해나, 이유성, 홍기하 3인이 원정대로 중견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대화하며 만들어진 전시이다. 참여작가는 김정숙, 배형경, 백연수, 윤영자, 이경희, 임송자, 황지선 7인이다. 전시장에는 이 7인의 조각가의 작업에 반응하여 만들어진 이유성과 홍기하의 조각이 함께배치되어있었다.
#6. 에필로그
2023. 2. 8 K
간만에 ‘취미가’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취미관>에 대한 개요를 훑어봤다. 사실 딱히 개요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포스터 아래에는 행사를 소개하는 단 두 개의 문장만이 나열돼 있다.
“132명(팀)의 특별한 에디션, 작업의 부산물, 작품과 굿즈, 소장품, 특별히 선별된 물품을 4개월간 선보입니다. 다양한 작가의 시간과 취미(taste)를 구매해보세요!”
132명이라는 인원에 새삼 놀랐다. 내 기억 상으로 ‘취미가’는 그 당시에 존재했던 여느 신생공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다. 그곳에 132명이 만든 작업들이 헤쳐 모였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작업의 크기가 아니다. 대체로 굿즈라는 형식을 준수한 채, 계급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충분히 소장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축소돼 있었다. 물론 이때의 크기는 중량과 부피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중량이 너무 높아질 경우, 작업이 수납될 예정인 투명 아크릴 박스들의 구조체는 무너질 것이다. 부피가 너무 커질 경우, 작업은 투명 아크릴 박스를 초과한 채, 그 너머의 공간을 침해할 것이다.
중량이든 부피든 간에, 결국 중요한 것은 참여 작가들이 각자의 작업을 납품하기 위해선, 일단 공간의 규모를 준거 삼아 특정한 합의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즈는 취미의 산물이기 이전에, 일련의 작업들이 일시적으로 공유했던 스케일 감각을 대변한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작업이 최소 크기로 수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에게 할당된 투명 아크릴 박스를 공간 차원에서 점유하기 위한 전략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더 이상 작업은 수납되지 않는다. 투명 아크릴 박스는 작가가 다양한 시점을 넘나들면서 관리할 수 있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환경이다.
132개라고 추정되는 큐브들이 도면에 따라 조립되어 몇 개의 구조체를 형성하고 있다. 구조체들 사이를 배회하다 보면, 이곳이 마치 큐브 단지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는 큐브보다 거대하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이곳을 전지적인 시점으로 관찰하는 중이다.
이제 '취미가'는 별도로 전시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아마도 큐브 단지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이후에 투명 아크릴 박스들은 모두 해체되어 어딘가에서 폐기됐다. 지구 환경을 고려했을 때, 재활용할 수 없는 폐기물은 모두 인류의 낭비벽이 초래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당장 인류의 일부가 거주할 만한 세이프존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대체 지구 환경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쓰레기장의 공모자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겐 인류세의 윤리를 추종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없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를 포함한<취미관>의 관객들이 큐브 자체를 매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몇몇 관객들은 자신이 취사 선택한 작업들을 구매했다. 나는 최하늘의 작업 한 점을 집으로 모셔왔다. 물론 이 모든 건 최하늘이 대형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 이전의 일이다.
큐브 안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때로는 그런 시도가 기성 세대가 유포한 성장 서사의 왜곡된 판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당신이 큐브에 귀속돼 있다는 건, 어쩌면 중산층의 궤도에서 영원히 이탈됐다는 사실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나와 동세대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큐브를 관문 삼아 브랜드 아파트의 세계로 입신한 사례는 거의 부재하다. 내가 지금까지 다달이 모은 주택 청약금으로는 전세 계약도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 감소의 시대는 끝났다. 현실에 대한 기대는 계속 감소되다가 지금의 저점에 이르렀고, 그 상태가 항구적으로 유지될 것이란 체념만이 남아있다. 큐브의 입주민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계급과 지위 고하가 유사한 것 같다. 시장의 폭락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누군가의 세대를 감별할 수 있는 유용한 기준이다. 2008년 즈음의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매일 등교하거나, 등교 거부권을 행사한 채 놀고 먹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2008년 즈음의 내가 놀고 먹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이 운 좋게도 풍비박산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신생공간 시기에 굿즈를 소비하면서 나름대로 미술을 향유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일정한 저점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통장 잔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미술계에서 미투가 한창 확산됐을 때, 나는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자칭 비평가로서 세이프존에 속해있었다. 여전히 미술계의 일원으로서 나름의 연대 책임을 느끼지만, 그런 느낌을 굳이 장황하게 해명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뒤늦게나마 교차 검증해서 무해한 존재로 요약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시점에서 재고하고 싶은 것은, 사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을 만큼 서로를 등한시하는 큐브의 입주민들의 출처다. 우리는 큐브에 격리돼 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목적으로 그렇게 됐다. 큐브라는 밀실은 그런 미묘한 차이들을 일상적으로 묵살시킨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층간 소음에 별로 항의하고 싶지 않다. 노이즈 캔슬링으로 상쇄하면 그만이다.
큐브들의 구조체가 쓰레기로 전락하던 순간에, 아무도 그것을 딱히 문제시하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데, 무려 132명의 작가들이 '취미가'라는 공간에 회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큐브가 그들을 환대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자에게 할당된 큐브는 차이화를 생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동했다. 물론 투명 아크릴 박스의 규격은 대체로 동일하지만, 그곳을 점유하기 위한 전략까지 합의할 필요는 없었고, 그에 대한 결과물은 모두에게 말 그대로 투명하게 공개됐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관>은 단순히 작업을 위한 쇼윈도를 제공한 게 아니다. 사건의 전모는 대략 이러하다. 관객들은 진열된 작업을 스캔하는 대신, 각자의 전지적인 시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큐브를 관찰하게끔 유도됐다. 내가 큐브보다 거대하다는 이유만으로, 큐브 단지를 함부로 짓밟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큐브들이 미묘하게 형성하고 있는 차이를 가늠하고, 이를 토대로 작업의 가치를 책정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큐브와 그곳에 입주해 있는 작업들과 나의 상관관계는 계속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어쩌면 나는 <취미관>에서의 경험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참여 작가들 중에 큐브를 그냥 쇼윈도로 활용한 사례도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조차도 나름의 전략으로 통용됐다는 사실이다. 즉 쇼윈도가 아닌 큐브들 사이에서 쇼윈도인 큐브는 애초의 의도와 무관하게 변별적인 대상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큐브들은 공생했다.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건, 단순히 '취미가'의 폐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큐브 단지에 조성된 생태계를 경험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직까지 남아있던 신생공간의 관객들을 새로운 소비자 유형으로 전환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찮게 연출된 장면에 가깝다. 사실 그 당시에 큐브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취미가’의 웹사이트 어딘가에 링크로 나열돼 있는 몇몇 글들에서 주목했던 건 역시나 굿즈를 일종의 조형적 방법론으로 심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물론 굿즈는 여전히 신생공간의 라이프스타일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그러나 나는 <취미관>을 기점으로 더 이상 굿즈 형식의 작업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기회도 의욕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부연할 수 있는 <취미관>에 대한 개요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이사를 치르는 동안, 안타깝게도 최하늘의 작업은 유실됐다. 도대체 어디로?
큐브의 입주민들로 구성된 공동체 같은 걸 모색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집에서 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벌이는 포트럭 파티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두가 알고 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 누군가와 의도치 않게 동승하게 되면, 우리는 괜히 각자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서로를 경계한다. 아니면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거나. 그런 누군가를 억지로 초대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를 넘어선 범죄에 가깝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에 정확히 몇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인중개사에 별도로 문의할 필요가 있지만, 애초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피스텔 환경을 고려해 재활용 쓰레기들을 적당히 분류해서 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스럽다. 이 건물은 큐브들의 구조체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큐브의 입주민들이 지금 이대로 살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각자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계약을 연장하거나 부동산 어플로 찾은 새로운 거처로 미련없이 떠나면 그만이다. 참고로 나는 올해 말에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모두와의 작별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서 나의 반려 고양이가 죽었고, 그보다 한참 전에 나는 스마트폰으로 SNS에 접속해 뜬금없이 내가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여전히 그에 대한 여파를 수습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큐브를 점유하고 있는 동안 어떤 일들을 감수했고, 지금도 감수하고 있을까? 애초에 132명의 참여 작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시를 관람하는 도중에 우연찮게 그들 중 누군가와 마주칠 때가 있다. 사실 그들과 무관한 낯선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친다. 딱히 반가운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모두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내심 안도한다. 우리는 큐브나 큐브가 아닌 곳에서 걸어 나와, 큐브나 큐브가 아닌 곳에서 마주쳤는데, 어찌됐든 각자의 방식으로 큐브를 둘러싼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안부는 자꾸만 묘연해진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이유만으로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할 수는 없다. 다만 모두의 초대를 거절한 채, 큐브와 관련해서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큐브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다양한 경로들이 서로 교차하거나, 그보다 자주 어긋났으면 좋겠다. 나는 작년에 《PACK WEEK》의 프리뷰 행사에 방문했다. VIP라고 적힌 명찰을 목에 걸고, 기획자의 안내에 따라 판매 목적으로 각기 다르게 진열된 작업들 사이를 어색하게 돌아다녔다. 두 번째 섹션에서 공예 형식으로 구현된 작업들이 큐브 속에 담겨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취미관>의 투명 아크릴 박스를 떠올렸다. 공예품은 확실히 굿즈보다 호화스러워 보였고, 실제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큐브는 순식간에 진공 상태의 밀실이 됐다. 큐브와 큐브 사이에 생략된, 혹은 그 동안 내가 외면했던 시간 속으로 침잠했다. 큐브 미술에 대한 공상은 그 순간을 발단으로 삼아 시작됐다.
A의 원룸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다른 원고를 쓰다가 질려버렸다. 저편에 있는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무선 헤드셋을 낀 채로 시끄럽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욕설이 난무했다. 노이즈 캔슬링을 하기 위한 이어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트북을 접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당신은 2008년에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면, 저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것 같았다. 짐을 서둘러 챙겨서 A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소음이 윙윙거렸다.
「큐브 미술: 새로운 공간성을 위한 12개의 단상들」
권시우, 하상현
* 권시우와 하상현은 ‘큐브 미술’을 논의하기 위해, 각자의 공간에서 쓴 글을 주고 받으면서 하나로 엮었다. 권시우의 글은 K로, 하상현의 글은 H로 표기했다.
1. 서소문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자유낙하: 미술관에서 튕겨 나온 ‘큐브’
2023. 1. 17 H
화이트큐브를 발명한 알프레드 바아의 1929년 전시에서, 당시 MOMA 전시장의 높이는 약 3m였다. 현재 미술관의 스케일은 4.5미터에서 6미터 사이로, 비일상적인 공간을 지향하며 점차 스케일을 키우고 있다. 미술품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또 공공의 담론을 형성하는 장치로서 미술관은 특정한 공간 스케일과 함께 작동한다.
나와 권시우는 최근 한 전시에서 미술관의 규모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또 동시에 그것에서 튕겨져 나온다는 이상한 감각을 공유했는데, 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¹의 “키키스미스 개인전-자유낙하”이다. 한 전시에서 동시에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된 것은, 해당 전시가 탁월하게 한 작가의 회고전을 물리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선 개별 전시에 대한 이야기보단, 전시를 담는 공간과 그것의 스케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권시우의 글 「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에서 “큐브 미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이소의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최근 한국 소설이 그리는 ‘집’의 좌표평면」²에서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집, 특히 실제 주거 수준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하우스’에 대한 논의와 관련된 “큐브 문학”이라는 표현을 미술 공간에 확장시킨 것이다. 그는 본인을 포함한 젊은 미술가들이 생활하는 거주 공간의 형태가 여러 개의 방을 가지지 못한 원룸이라는 사실과 미술대학 졸업 후 젊은 작가들이 전시를 할 수 있는 갤러리의 스케일에 대한 논의를 겹쳐둔다. 나는 이러한 “큐브” 공간과 조각과 맺는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이 생겼고, 해당 내용을 심화해서 써보자는 제안을 했다.
먼저 미술관의 스케일을 자각하게 만든 회고전인 “자유낙하”를 되짚어 보고 싶다. 회고전(回顧, retrospective)은 횡(시간)과 종(형식)으로 한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 형태이다. 회고는 뒤를 돌아보고 돌아본 그것들을 다시 현재로 향하도록 하는 움직임이며, 이는 작가의 아주 오래전 작업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작업을 이어 내, 관객에게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하나의 작업 이후 다음 작업을 배치하고, 그 둘을 촘촘히 이어내는 설계된 동선을 통해 작동한다. 벽에서 다음 벽으로, 그리고 벽에서부터 중앙에 솟아 오른 동상에게 눈길을 뺏기며, 조각상을 돌다, 이내 유리로 된 쇼케이스안의 작은 오브제들을 바라보고, 쇼케이스 안에서 눈의 동선을 그리면서. 이처럼 하나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관람의 시간을 통해 작가의 (비)가시적인 세계, 심지어 창작을 하던 자신도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업 세계의 지도가 공간에 펼쳐진다. 이 같은 회고의 움직임은 미술관의 축적된 지식으로 구현된다.
나는 한편으로 미술관이 부리는 마술적 시공간에 빠져들면서도, 또 다른 관람의 상태가 간섭하는 것을 느꼈다. 이는 작업의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머릿속에 데이터들과 대조하여 빠르게 분류,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회고의 움직임과, 빠르게 캡처하는 감각은 서로 부딪힌다. 캡처의 속도감은 작업의 디테일로부터 제작 과정을 추-상상하는 행위와 그 상상된 제작 과정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또 캡처의 관람 방식은 유리로 제작된 쇼케이스나, 사각형 프레임을 통해 작업을 바라보았을 때 특히 강화되었다. (이 때문에 여러 겹의 유리를 겹쳐, 독수리의 형상과 질감을 중첩-분리하여 구현해 낸 키키스미스의 최근 작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왜 미술관의 회고전에서 작업의 방대한 시간적인 차원을 짐작하게 되면서도, 그것에 충분히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감각을 느낀 것일까? 이것이 큐브 공간과 관련이 있을까? 지금으로서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감각이 미술을 보여주는 공간의 스케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원거리를 조망하는 회고의 움직임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커다란 스케일을 다룬다. 반면 전시물을 캡처하는 감각은 특정한 근거리의 감각³이며, 시간적인 차원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간 대상을 회고하기보단, 데이터가 저장되는 움직임이고, 대상을 분류하지만, 특별히 의미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각인 되어 있는 어떤 관람의 방식이다. 이는 비슷한 거리와 각도에서 예술 대상을 만나고, 그 거리까지 도달한 이전과 이후의 시간과 동선,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망각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¹ 전시가 열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의 전시장의 높이는 4.5미터이다.
² 이소, 「버티고 움직이고 미끄러지면서—최근 한국 소설이 그리는 ‘집’의 좌표평면」, 문학과 사회 140호(2022)
³ 이것은 초근거리 감각과도 구분되는 거리 감각이며, 쉽게 접할 수 있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거리와 관계가 있어 보인다. 촬영 시 특수한 접사렌즈를 사용하지 않는다면피사체에 일정 거리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이 때문에 ‘캡처 감각’이 발생하는 거리의 다이나믹은 크지 않다.
#1. 커피 앤 시가렛
2023. 1. 18 K
키보드로부터. 벌써 작년의 일인데, 사실 작년이라고 해봤자 불과 한달 전의 일이다. 상현 씨와 다른 지인들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연말 회담 비슷한 것을 가졌다. 카페 이름은 ‘커피 앤 시가렛’이었는데, 카페에서 마땅히 담배를 피울 곳이 없어서 다소 의아했던 기억. 게다가 카페는 어느 고층 빌딩의 고층 어딘가에 수납돼 있어서, 담배를 피우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내려가 빌딩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래서 내 기억상으로는 담배 피우기를 그냥 포기했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것부터가 뭔가 조짐이 안 좋았다. 흡연자로서는 원래 ‘커담’이 묘미이거나, 커피를 몸 속에 주유한 순간부터 담배가 어느 정도 필수라고 생각하는 편. 상현 씨는 비흡연자로서 ‘커피 앤 시가렛’에서 모이자고 한 건가? 일행 중 누군가는 약간의 숙취를 토로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차분했으며, 나는 금단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니까 ‘커피 앤 시가렛’은(흡연자에 대한) 일종의 기만이다. 마치 커담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나를 유혹했지만, 정작 이곳은 흡연을 환대하지 않는다. 흡연을 하려면 빌딩에서 탈출해야한다. 그렇다고 도중에 탈출해버리면, 애초에 그건 커담이 아니지 않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아마 내 몸 속에 주유된 커피는 모두 소진될 것이다. 커피와 시가렛은 매개되지 않는다. 이건 ‘커피 앤 시가렛’의 음모다.
우리를 포함해, 카페 속에 있는 모두가 그런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인구 밀도가 높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테이블이 만석이 됐다. 심지어 웨이팅 손님들까지 있다는 사실에 나는 혼자서 마음 속으로 경악했다. 포토샵으로 우리를 제외한 모두를 크롭해서 이곳에서 삭제하고 싶었는데, 문제는 내가 포토샵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에 다소 자괴감을 느끼며, 커피를 건배. 간만에 모인 우리는 우선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물론 단톡방에서 이미 다들 잘 지내냐고 물어봤지만, 그냥 그렇게 했다. 이 테이블은 단톡방 유저들의 정모 같은 것으로서, 무엇보다 대면의 감각이 중요하고, 대면으로 각자의 근황을 토로하는 것은 확실히 단톡방에서 주절거리는 텍스트와는 느낌이 다르다. 현실에선 텍스트의 질감 같은 게 있다. 질감이 있는 텍스트가 나를 관통하고, 여러분을 관통하고, 만석인 테이블 사이를 관통하고, 결과적으로 ‘커피 앤 시가렛’은 질감으로 웅성거린다. 내가 질감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뭔가 낯설다. 낯설 때마다 담배가 마렵다. 나는 질감의 일부다. 계속되는 근황 토크 사이로 다른 테이블에서의 웅성거림이 개입한다. 그래도 나는 대화에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키보드로부터. 그날 모인 당사자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가 미술가였다. 이왕 모인 김에 이곳에서 탈출해 시립미술관으로 가기로 했다. 시립미술관에선 키키 스미스의 첫 아시아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다. 개인전의 부제는 자유 낙하. 사실 부제를 확인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키키 스미스가 아니라, 히토 슈타이얼이 쓴 동명의 글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유 낙하 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방향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으며, 심지어 어디로 낙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심각한 길치로서, 네이버 지도 어플이 없으면 아마 혼자서 시립미술관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엄청 헤맬 것이다. 그래서 일행들이 가는 대로 갔다. 그들은 네이버 지도를 대리하는 인간 네비게이션이었고, 시립미술관을 향해 걷는 동안 인간 네비게이션들과 간헐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네비게이션에 반응하는 나. 나에 반응하는 네비게이션. 그러나 길치로서의 나는 네비게이션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에 딱히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은 채로 마침내 시립미술관에 도착했다. 과장을 많이 보태자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자유 낙하한 기분. 개인적으로 미술관 방문은 오랜만이었다. 작년에는 이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주로 미술관이 아닌 큐브들을 전전하면서 전시를 관람했다. 일전에 쓴 어떤 글에서 나는 큐브가 반드시 원룸은 아니지만, 원룸과 유사한 맥락에서 협소하게 정의된 공간이라고 언급했다. 내가 가담하고 있는 미술계에는 더 이상 공유지가 없거나, 다만 큐브라는 형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큐브 미술에 종사하고 있다. 큐브로서의 전시장은 고층 빌딩이나 낙후된 상가, 그 외에 큐브보다 거대한 건물 어딘가에 수납돼 있다. 수납돼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경험은 때때로 기묘하다. 나를 포함한 관객은 수납돼 있는 공간 속에 관객으로서 수납돼 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문득 내가 수납될 정도의 크기로 축소된 미니어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미니어처인 채로 전시장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각자의 일정 때문에 미술관 1층에서의 전시 섹션만을 관람했다. 나머지 섹션들은 언젠가 다시 보겠지. 전시장에서 나오는 길에 상현 씨에게 지나가듯 스케일의 감각에 대해서 얘기했다. 미술관이 나에 비해서 너무 거대한 것 같다고, 그래서 1층 전시장에서 약간의 공황 증세에 시달린 채로 작업들 사이를 배회했다고 주절거렸다. 키키 스미스가 만든 조각들이 있었고, 사진도 있었고, 회화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그냥 풍경처럼 스캔해 버렸다. 스캔된 이미지는 너무 모호했다. 저화질이었다. 나는 저화질의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전시장 안의 다른 관객들처럼 걸어 다녔다. 그러나 걷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각이 거의 없었다. 저화질의 눈만이 공중에 떠다니는 느낌. 나는 우주에 폐기된 인공위성 같은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미술관에서 탈출했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지. 방향 감각 상실. 사실 나에겐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담배가 마려웠고, 이번엔 그냥 피웠다.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짐.
2-1. 화이트큐브, 그리고 ‘큐브’: 백색의 탈락
2023. 1. 20 H
권시우가 언급한 ‘큐브’라는 단어는 흥미롭다. 이는 우선 전시의 형식이자 공간을 지칭하는 화이트 큐브에서 백색을 탈락시킨 단어로 볼 수 있다. 백색으로 벽과 배경을 칠한 화이트큐브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맥락을 지운 특수한 공간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장소를 지워 가상적인 공백을 만들고 그 위에 새로 예술-사물을 둔다. 이는 쓰여진 글을 화이트로 덮고, 새로운 말을 눌러 새겨 넣는 일과 비슷하다. 이때 발생하는 몇 가지 공간적 특징이 있다. 화이트큐브는 눈앞의 사물을 환영으로 가리지 않는 것을 지향한다. 그것은 밝은 빛을 통해 사물을 드러낸다. 공간 전체를 높은 조도로 비추며, 사물에 일어난 현상과 흔적을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 관객이 사물에 가까이 다가가, 조야함과 정밀함, 손자국과 매끈한 표면을 모두 관람의 대상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또 화이트 큐브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는 관객의 몸을 가리지 않는다. 관람자에게 스스로의 몸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하고, 바깥 세계에서 때어 온 가상적으로 배치된 예술-사물들 사이를 산보하게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인 나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도록 한다.
무언가를 지우고 생겨난 공간에서 다시 무언가를 가리지 않고자 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자연광이 밤과 낮의 시간을 따라 사물을 어두운 것에서 밝은 것으로, 다시 밝은 것에서 어두운 것으로 보이게 하며, 변화하는 대상으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화이트큐브의 조명은 대상을 무시간적인 것으로 만든다. 미술의 역사 안에서 이 같은 밝게 비춰진 벽과 바닥, 무시간적 조명은 공간을 일상을 벗어난 초월적인 무언가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화이트 큐브의 백색에서 이탈되어 드러나는 ‘큐브’의 공간성은 어떨까? 이는 관람자인 ‘내’가 물리적인 백색 공간에 있는 것과 무관하게, 이 같은 백색의 기능이 오작동하거나,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경계에서 발생한다.
‘큐브’가 백색으로부터 이탈한 어떠한 공간을 지칭한다면, 그것은 일상적 삶의 공간의 맥락으로 돌아오는, 혹은 일상의 공간을 재맥락화한 공간일까? 부엌에서 전시를 선보인 한스 울리히 오블리스트의 <더 키친쇼>(1991)와 같은 화이트 큐브 이후의 장소 특정적인 미술공간, 혹은 제도비판 미술 이후 재맥락화된 화이트 큐브, 또는 니콜라부리오가 지향한 ‘관계성을 창출하는 공간’과 같이 말이다. 그렇지 않다. ‘큐브’가 원룸이라는 개인의 실제적인 주거 공간과 닿아 있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룸의 사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을 미술의 맥락에서 작동시킨다기보단, 인간이 사는 원룸과 그 스케일이 사후적으로 발생시킨 공간성과 관련된다. 큐브는 오히려 화이트큐브 이전의 전시 공간인16세기 ‘경이로운 방-캐비넷’의 시각성을 닮았다. 캐비넷은 전시 공간의 시초가 된 개인의 수집 공간인 ‘스투디올로(지금의 스튜디오)’ 이후 사람들에게 낯설고 희귀한 사물을 모아 보여준 공간으로, 한꺼번에 다수의 작품을 시각적 유사성에 기반해 전시하였다. 큐브의 시각성은 이처럼 화이트큐브 이전의 원초적인 경이로움을 자극하는 전시 형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를 “케비넷의 전시방식이 현대화된 것”이라고 표현했다.¹
이처럼 큐브는 미술관 제도 밖의 일상 공간을 전시의 공간으로 삼은 것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큐브는 미술관의 스케일에서 가능한 무언가가 이탈되고 탈락된 보기의 방식과 관련되며, 원초적인 보기의 충동과 그것을 공중에게 보여주는 시원적인 전시 형태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권시우의 글에서 ‘큐브’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방인 원룸의 사이즈를 지칭하기도 하고, 대안공간과 신생 공간 이후 산개한 전시 공간의 스케일, 그리고 그 스케일과 붙어 있는 작가와 관객들의 미적 공간 감각을 지칭하기도 한다.
원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의 방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단어 그대로 와 다르게 사실상 ‘방’이라는 개념이 없는 주거 공간이다. 방이 가족 단위의 구성원들을 위해 분화된 공간을(부엌, 거실, 안방, 작은 방) 뜻하는 표현이라면, 그래서 ‘자기만의 방²’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원룸은 사실상 (상대적으로 위치 지어진) 방과는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대도시로 이주하며 거주하게 된 고립된 섬과 같은 공간이다. 이곳에선 침실과 부엌이, 거실과 책방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 공간에는 나를 잡아끄는 아이도, 잔소리하는 어른도, 나를 보듬어주는 조부모도 없다. 그곳에는 타인이 없는, 섬에 고립된 유아론적인 ‘나’가 거주한다. 좁은 방을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밖으로 나간다. 커피숍, 식당, 지하철, 미술관, 피트니스센터, 술집과 클럽, 때때로 타인의 원룸. 그리고 이내 다시 자신의 원룸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유튜브와 릴스, SNS 공간을, 타인의 원룸을 지켜본다.
¹ 해당 내용은 2021년 9월 서울무용센터에서 주최한 대담, <전시가 움직임을 설계하는 방법들>에서 김지연 큐레이터의 ‘케비넷’에 대한 논의를 큐브 공간과 겹쳐둔 것이다. 김지연 큐레이터는 미디어시티 서울과 같은 전시에서 가벽이 사라지고, 각목과 스크린, (특히) 지향성 스피커를 사용하여 개별공간을 확보한 전시 형식을 관람하며 “케비넷의 전시방식이 현대화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² 버지니아울프는 사회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개별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문제로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했다. 이는 남성 중심의 규범으로 촘촘히 구성되어 있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버니지아 울프 『자기만의 방』)
2-2. 블랙박스와 ‘큐브’ : 검은 화면과 바로크적 충동
2023. 1. 22 H
‘큐브’라는 공간을 화이트큐브의 백색의 기능이 오작동하는, 그래서 미술관이 지향하는 관람성이 어떤 식으로든 미끄러지는 공간으로 본다면, 반대로 우리는 또 다른 공간, 극장의 검은 공간인 블랙박스와 큐브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극장의 관람성, 특히 아고라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극장의 공공성과 큐브 시각성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어 보인다. 과거 극장의 공동체적 공공성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떠올려 보자면, 먼저 이는 거주 공간의 관점에서 극장 관객이 한 지역에 장기간 혹은 평생 거주하는 조건과 이와 연동된 군주제(또 귀족사회)와 관련이 있었다. 또 매체 환경의 관점에서 이는 주된 볼거리가 극장에서 한정되어 있던 시대에 작동했다. 반면 원룸과 큐브의 시각성은 대도시에서 장기적인(혹은 영구적인) 거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옮겨 다닐 수 있는 모듈화 된 집과 그러한 모듈과 함께 이동하기에 최적화된 스마트폰-영상 매체(OTT 서비스와 SNS 공간)와 함께 작동한다.¹
이러한 차이 때문에 일견 블랙박스와 큐브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극장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장치인 검은 공간과 그것이 환영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극장이라고 하면 떠올릴 어두운 공간인 ‘블랙박스’는 사실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널리 사용된, 인공적으로 발명된 공간이다.² 그것의 시초가 된 공간은 작곡가 바그너와 건축가 고트프리 젬퍼의 ‘뮌헨 오페라 하우스’로, 이는 시작 단계에서부터 기계장치로 환영을 만드는 파노라마와 디오라마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바그너의 극장은 또다시 영화관의 건축적 구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 발명된 공간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눈앞에 있는 “스크린”의 환영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어둠’이 필요했고, 관객 자신의 신체, 주변의 현실 공간과 제약들을 잊게 하는 ‘검은 공간’이 발명되었다.
이렇게 발명된 어둠을 “바그너식 어둠(Wagnerian Darkness)”³라고 부른다. 바그너식 어둠은, 앞서 말했듯 현실 공간의 위계를 잊게 하고, 관객의 몸을 보이지 않게 해 눈앞의 스크린-이미지의 공간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객 신체의 사라짐’은 완전하게 이뤄질 수 없으며, 항상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어떤 몸’으로 남아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이를테면 극장 초기에서부터 그곳에 만들어진 어둠은 위계적이고 도덕적인 현실 공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들을 불러들였다. 그곳은 결혼한 남녀가 자신의 아이를 집에 두고 불륜이 일어나는 장소였고, 가부장제와 이성애적 규범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온갖 퀴어들과, 부도덕한 몸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그곳은 에로티시즘과 파토스적 충동이 꽃피는 장소였다.⁴
큐브와 블랙박스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블랙박스를 ‘극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한정해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생산해낸 ‘어둠’과 그것의 관람성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과, 이 어둠이 애초부터 (연극, 무용, 음악 연주회를 위한)공연장과 (영화 상영을 위한)영화관의 경계에서 탄생하고 유통되어왔다는 사실이다. 이 어둠은 물리적인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특정한 보기의 방식을 신체에 삽입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블랙박스의 어두운 공간이 일차적으론 보는 관객의 몸을 사라지게 하지만, 밝은 빛이 사라진 공간에 또 다른 비가시적 몸들, 파토스적 욕망을 가진 육체들이 출몰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즉 이때 몸은 보이거나(극장의 위계적 공간 위에서 왕과 후원자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스크린에 완전히 몰입하고 꿈의 공간으로 가기 위해 자신의 신체를 잊는)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나 동시에 보이는 이중적인 (비)가시성의 상태로서 존재한다. 이때 몸은 두 차원을 끊임없이 왕복하거나 두 차원 모두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앞서 화이트큐브가 큐브의 특정한 근거리 감각과 함께 오작동한다고 설명했다. 이때 큐브의 시각성이 미술관의 현상학적이고 물리적인 환경과 무관하게 혹은 그것과 평행해서 작동하는 것처럼, 블랙박스의 ‘어둠’이 작동하는 조건은 반드시 공간의 물리적인 어두움과 관련되지 않을 수 있다. 이때 어둠은 ‘박스’처럼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좁은 구역에서도 작동하는 무엇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빛을 뿜고 있지 않은 검은 액정 화면이 차지하는 구역으로서 어둠이다. 이 검은 화면은 재맥락화된 블랙박스이며, 다양한 사이즈의 이차원 평면을 통해 작동한다. 재맥락화된 블랙박스는 사실상 과거와 같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어두운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를 블랙스크린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는 온전히 스크린 ‘속’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크린 속 환영과 함께 스크린의 물리적인 얇은 두께면을 인지하게 만드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블랙박스와 블랙스크린 사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러한 중첩된 어두운 공간을 다룬 몇 개의 작업들이 떠오른다.
작가 김무영은 퍼포먼스 <Nimbus>(2019)에서 액션영화 촬영 현장의 몸짓을 전시 공간에 불러온다. 쓰러지는 나무와 구조물, 총알을 피하는 움직임, 멋진 착지 장면과 같은 클리셰적인 동작들, 그리고 이를 촬영하는 촬영자의 움직임이 공간에 뒤섞인다. 관객은 발생하는 상황 사이를 밝은 전시장 공간을 이동하며 퍼포먼스를 관람한다. 이때 퍼포머의 움직임은 철저히 스크린으로 매개된 영화적 환영을 구현하는 동작이기 때문에, 이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객은 완전히 장면에 몰입할 수 없다. 화면에 접속하지 못하고, 이내 이탈해 그 검은 액정을 차갑게 바라보는 감각은 브레히트적인 거리감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의외로 작업은 이내 ‘정서적’이고 모든 것이 과잉된 방향으로 흐른다. 퍼포머의 몸짓이 이렇게 감각되는 물리적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중력인데, 구현하려는 이차원상의 신체-이미지에 아래 방향으로 중력이 계속 작용해 결국 바닥에 붙어버린 취약한 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감독의 지시에 따라 모든 대상이 상호작용하는 촬영 현장의 유아론적인 성격은 이내 ‘어둡고’ ‘좁은’ 공간을 형성하고, 그곳에는 바닥에 붙어 있지만 서로 뒤엉키고자 하는 파토스적인 몸들을 모여들게 한다. 이러한 과잉의 감각을 추동하는 것을 ‘바로크적 충동'으로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룸의 조건하에서 충분히 구현될 수 없는 역동성, 사치스러움, 과잉의 감각을 향해 트라우마적으로 돌진해 가는 움직임. 그것을 차갑고 검은 액정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서도, 그 액정을 격정적으로 부수고, 손과 살에 깨진 유리조각과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고자 하는 충동, 이때 검은 액정은 때때로 이상한 각도로 반사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여 준다.
윤자영 연출의 <여름밤의 링크>(2017)는 이 같은 바로크적 충동을 극장에서 구현한 작업으로 볼 수 있다. 화목한 가정과 상류층을 상징하는 피겨스케이팅의 얄팍한 환상을 다룬 이 작업은, 마찰력이 작아진 얼음 위에서만 가능한 피겨스케이팅의 동작을 값싸고 하얀, 미끄러지지 않는 무대 플로어 위에서 수행한다. 고도의 동작을 구현하기 위한 예산과 훈련과정이 없이 머릿속으로 상상된 이차원적 이미지는 무대 위에 물리적인 환경에서 처참하게 미끄러진다. 하지만 김무영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작업은 이를 브레히트적으로 폭로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어깨 높이까지 우스꽝스럽게 확대된 피겨스케이팅의 칼날은 퍼포머의 허릿살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게 움직이며, 공연의 흐름과 무관하게 갑자기 침입하는 과장된 연극 톤의 대사는 증폭된 사운드와 함께 관객을 위협한다. 폭로된 환영을 경험하는 몸의 감각은, 이미지를 초과해 360도 회전하여 다시 관객의 몸을 둘러싼다. 이러한 폭력적인 과잉의 감각은 아르토의 연극적 지향인 ‘잔혹극’⁵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들이 구사하는 이 같은 재맥락화된 블랙박스는 ‘큐브’가 미술관의 환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제도비판 미술과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장을 브레히트적으로 폭로해 어둠과 환영을 거둬내지 않는다. 그보다는 작가들은 ‘원룸’과 같이 개별화되고 유아론적인 환영의 세계, 네모나게 좁아진 몸의 상상된 이미지를 어떻게 다시 외부로 노출시키며, 동시에 이를 공동의(적어도 타인의) 감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지 질문하고, 그 조건을 더듬는다. 이들의 작업은 사태를 멀리서 떨어져 공간을 폭로하는 ‘풍자’나 ‘비판'의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작업은 좁은 공간 속 과잉적이고 장식적인 자신의 신체를 또 다른 (물리적)공간에 열어내는 행위, 즉 바로크적 충동 자체이다.
¹ 지그먼트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전통적인 근대성을 딱딱한 고체로, 후기 근대성을 연속적이고 유동적인 유체성으로 설명한다. 이때 노동과 자본, 생산자와 소비자와같은 개념들은 더 이상 각자가 명확히 구분되는 견고한 강체가 아니라 모호하고 개인화된 네트워크상의 개념이 된다. 본 글에서 중앙 집중화된 권력과 그와 연동된 극장의 관객성은, 현대 도시에서의 거주 공간을 계속 이동하는 주체들에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때 공간은 붙박이적인 무겁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액체나 기체같이유동적으로 흐르고 섞이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지그먼트 바우먼의 『액체근대』 3장: 시/공간, “뱉어내는 장소들, 먹어 치우는 장소들, 비(非)-장소들, 그리고 빈 공간들” 참조
² 블랙박스가 발명되기 이전의 극장은 원래 ‘밝은 공간’이었다. 이는 극장을 보는 관객의 몸, 특히 왕, 귀족, 후원자의 신체를 드러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극장에서 펼쳐진 예술 작품과 현실의 관객의 몸은 강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관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³ 바그너식 어둠은, 현실 공간과 그곳에 작동되는 위계를 잊게 하고, 공간과 관객의 몸을 사라지게 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물리적인 장치들이 필요했다. 이는 검은 벽, 오래 앉을 수 있는 의자, 환기구 시스템, 극장 조명을 위한 전기의 발명, 화재 경보시스템 등이 있었다.
⁴ 바그너식 어둠의 발명과 그곳에 모여든 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Noam M. Elcott, 『Bodies in the Dark Cinemas, Spectatorship, Discipline Residue』, “Spaceless Darkness”, 2021년 4월 김무영 작가가 제공한 영문본 텍스트.
⁵ 앙토냉 아르토의 잔혹극에서의 “‘잔혹’은 결코 피나 직접적인 폭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 더 추악한 형태의 폭력, 근원적이며 삶과 관계 깊은 폭력을 의미한다. 비록 그가 소재로서 피와 폭력으로서의 잔혹함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소재에 불과할 뿐,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잔혹극은 아니다.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진정한자유가 존재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든지, 하늘은 고정돼있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각인시켜준다든지 등의 폭력이 바로 아르토가 주장하는 잔혹함이다. 이는후대의 실존주의와 관련된 절망에 가까운 폭력을 어느 정도 연상케 한다.”, Jjaloff, “앙토냉 아르토- 잔혹극 (1) 잔혹극의 이론, 폭력과 근원적 신화의 분출”
#2. A의 원룸에서
2023. 1. 21 K
나는 페북 피드를 확인하다가, 리움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개인전이 개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발견했고, 그 사실을 A에게 넌지시 말해줬다.
"덕 테이프에 붙인 작업도 오려나." A가 중얼거렸고, 다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덕 테이프는 뭐고, 거기에 붙인 작업은 뭐지? A에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어차피 구글로 검색하면 되니까. 검색해보니 덕 테이프는 강력 접착 테이프의 일종이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사실 덕 테이프에 뭘 붙인 게 아니라, 덕 테이프로 바나나를 어딘가에 붙여놨다. 농담 같은 작업이었는데, 별로 웃기지는 않았다. 심지어 작업 제목은'코미디언'이었다. 2019년 작.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1960년 태생이고,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이며, 그의 작업은 대체로 도발적인 해학을 구현하고 있다, 라고 구글의 검색 결과는 설명해줬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도발이나 해학 같은 게 아니라, 그가 그것들을 무려 전세계를 무대로 삼아 농담조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스타 작가라는 점이다. 참고로 <코미디언>은 2020년 기준으로 구겐하임에 소장됐다. 바나나를 전시장 벽면이든 어디에든 덕 테이프로 붙여놓으면 미술 작업이 되고, 심지어 그것은 구겐하임이 소장할 만큼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어쩌면 (스타) 작가는 그런 과정 자체를 도발적으로 해학하기 위해 해당 작업을 구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스타는 농담만으로 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나는 농담에 별로 재주가 없다. 설사 내가 스타였다고 하더라도, 농담만으로 돈을 벌거나 나의 농담을 초대형 미술관에게 소장품으로 제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번 리움에서의 개인전에 <코미디언>이 포함돼 있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고, 그냥 몰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 어찌됐든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포함한 스타 작가는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이다. 지금 시점의 내가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을 새삼 복기했을 때, 그것들은 굉장히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워 보인다. 사실 그건 별로 새삼스럽지 않은데, 마우리치오 카텔란, 데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뭐 그런 작가들을 연상하다 보면, 그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의 미술 시장의 버블에서 패권을 장악한 채, 버블이 가득 담긴 황금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물론 컨템포러리 아트는 시장만으로 해명할 수 없는 나름의 동역학이 존재하지만, 최소한 나는 이 글에서만큼은 그것을 사치의 미학이라고 개괄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컨템포러리 아트의 소산과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나의 가난을 교차 검증하고 싶지는 않다. 그 사이의 간극은 너무 광범위하고, 그것을 내가 갚아야 할 채무들과 온갖 모바일 고지서 따위로 채워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별세계의 사람에 가깝다. 다른 별에 속해 있으니, 딱히 실존 인물로 가늠되지도 않고, 사실 리움에서의 개인전 소식을 알지 못했으면, 어쩌면 그는 통조림으로 가공된 채 내 머릿 속의 구석진 자리 어딘가에 영원히 방치돼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나 리움이나 리움이 회고할 예정인 컨템퍼러리 아트 같은 것은 허구에 가깝다. 혹은 허구에 대한 무용담이거나.
무용담은 계속해서 증폭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글에서 증폭되고, 국내외를 막론한 온갖 기자들이 그것의 일부를 마구잡이로 복붙하고, 그런 식으로 취합된 뉴스들은 스레드 형식으로 이어진다. <코미디언>은 2019년 기준으로 12만 달러에 낙찰됐다. 바나나는 과연 리움 미술관의 어디에 덕트 테이프로 붙여질 것인가? 지금 시점에선 아무도 그에 대해 답변할 수 없지만, 어찌됐든 기사 거리로 삼을 만한 좋은 화두다. 그러나 내가 학부 시절에 컨템포러리 아트를 섭식했을 때는 2010년대 초입으로, 아직 그것이 바이럴 마케팅의 대상으로 낙점되기 이전이었다. 여러분에게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입니까? 당시에 존경해 마지 않았던 모 교수님이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물론 학생들의 대다수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뭔가 정치적인 질문으로 통용됐다. 이때의 여러분은 다름아닌 나를 포함한 우리였고, 우리는 어쩌면 컨템포러리에 편입될 수도 있는 인재였는데, 그러한 상태가 과연 정치적으로 합당한 지에 대한 의문을 초래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우리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작가에게 저항함으로써, 도발적인 해학 같은 걸 구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글을 쓰고, 하여튼 뭔가를 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우리 학교가 인덕원 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변방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울 도심을 기준으로 봤을 때, 생각보다 까마득한 거리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학교 근처에 밀집해 있는 저가형 원룸들에 모여 살았다. 통학 거리는 대체로 10분 남짓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10분 남짓한 거리만을 오가면서, 학교 안팎에 거의 고여있었다. 그런 여러분에게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입니까? 그건 사실 정치적이기 이전에 벙찔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우리는 서구를 발단으로 확산된 동시대에 속해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는 BTS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동시대는 인덕원까지 포괄하지 못했다. 나와 나의 몇몇 친구들은 인덕원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나름대로 탐독했지만, 이미 그것은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에 박제된 사례들로 발견됐다.
줌 아웃과 줌 아웃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동시대의 지형에서 소멸될 운명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 사실에 딱히 유감스럽지는 않다. 어쩌면 나에게 학부 시절이란, 컨템포러리 아트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우리는 박제된 사례들과 함께, 때로는 그것들과 힘을 겨루면서 허구 속에 있었다. 인덕원은 그 자리에 고여있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동시대 그 자체였다. 졸업을 하고, 원룸 속에 수납돼 있던 짐들을 부랴부랴 챙긴 채로 마침내 인덕원을 빠져나오던 날, 동시대는 뒤늦게나마 완전히 종식됐다. 그 이후에 리움은 홍라희 관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한 일을 기점으로 폐관하다시피 했고, 나는 그 사실을 의식할 겨를도 없이 동시대와 무관한 온갖 글들을 써댔으며, 지금 이 순간 리움이 나와 무관하게 회생하고 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라는 통조림이 내 머릿 속에서 빠져나와 덜그럭거린다. 나는 그 통조림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이 리움에 방류되면, 리움은 결국 허구가 될 것이다.
리움의 관객으로서 허구에 편입돼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그냥 잠깐 상상만 해본다. 사실 나는 아직 전시 예약 링크에 접속하지도 않았다. 리움에 갈지 말지는 A와 좀 더 상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전시는 올해 7월까지. 리움에서 누군가를 마주치게 될 지 어떨지 잘 모르겠다.
3. ‘원룸’의 밖, 도시 공간과 도시 몸들 : 개별적이지만 개성적이지 않은
2023. 1. 24 H
큐브에서 작동하는 특정한 근거리 감각은 비단 예술공간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많은 도시 공간과 그곳에서의 몸들이 이 같은 공공장소 내의 근거리 감각과 연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피트니스 센터에 운동 기구와 연동된 몸들이 그렇다. 피트니스 센터의 기구들은 각각 사용자를 기다리며, 고유한 부피와 장소를 가진다. 이 장소에 접속된 개별적인 몸은 ‘피트니스센터’라는 공동의 공간안에 있지만, 동시에 그곳에 온전히 접속하지 않고 개별공간을 형성한다. 이 몸들은 개별적인 몸들에게 통상적으로 따라올 법한 ‘개성’을 획득하기보단, 같은 동작을 행하며, (실질적으론) 같은 이상을 공유한다. 신체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공간에서 근접해있지만, 접촉의 차원에서 만나지 않는 몸들은, 다시 행위성의 차원에선 같은 방향을 향한다.
비단 피트니스 센터가 아니더라도, 개별 공간을 확보해주는 도시의 장치를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지하철 공간에서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커널형 이어폰을 사용하여 개별 공간을 확보하는 것, 혹은 화장실 공간에서 변기의 배치 방식과 같은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신체 분비물은 결국 하나의 수로로 이어지지만, 화장실은 몸들이 서로를 보지 못하도록 공간이 분리시키고, 사회적 규범을 통해 시선을 차단한다. 사실상 도시 공간은 다수의 인원이 서로에게 과접촉하지 않으면서 공간을 공유하는 일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는 도시 공간이 생겨난 후부터 공간과 사물들이 계속 발전해온 흐름이다. 현재 ‘큐브’와 같은 근거리의 공간성을 탐구함에 있어 이러한 개별화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적 장치들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이것이 원룸의 주거 형태나, 1인 미디어 장치(원거리 통신-GPS-지도-카메라—SNS연동체) 사용의 가속화와 관계되면서, 기존의 공적 공간에서 오류를 일으킬 정도로 감각을 재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개인이자, 사색적인 도시 산책자를 생산하는 화이트큐브의 공간성이나, 한 장소와 시간에 모이고 흩어지는, 블랙박스가 구현하는 일시적 공동성은 무언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작동할 수 없는, 무언가 오류를 일으키는 잔여적인 공간이다. 현시대를 특징짓는 보편적인 공간성은 오히려 원룸, 피트니스센터 혹은 ‘개인 소유의 통신 디바이스-SNS-카메라 연동체’인 것 같다. 인구밀도가 높고, 통신망이 잘 구축된 서울은 이러한 큐브적 공간의 가속화가 비교적 잘 드러나는 도시이다.
#3. 콘크리트 디스토피아
2023. 1. 25 K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브는 전시장이다. 이곳에서 ‘화이트’는 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큐브가 전시장이 되기 위해선 ‘화이트’로 탈색될 필요가 있다. 서울에서 노출 콘크리트의 유행은 빠르게 지나갔다. 빠르게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노출 콘크리트로 구현된 카페나 쇼핑몰, 심지어 주거 공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 거리로 여겨진다. 조롱의 골자는 그곳들이 노출하고 있는 콘크리트가 너무 과도한 나머지 실제의 폐허와 거의 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의 폐허는 정부 주도 하에 도심을 난개발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정권이 바뀌고 한때 그것에 야합했던 복잡한 이해관계가 일시적으로 중단됨으로써, 말 그대로 방치된 공간이다. 그곳은 원래 스스로 완전히 소멸하면서 대형 쇼핑몰이나 아파트 단지를 연성해내야 했지만, 이제 그런 환영적 순간을 기대하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부동산 버블을 의도했던 모든 연금술은 실패했다.
당신이 폐허에서 전시장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선 노출된 콘크리트를 갈아버리길 권유한다. 거의 문드러진 벽지를 제거하고, 그 위에 하얀 페인트를 덧바르고, 구멍난 부분들은 퍼티로 메우고, 뭐 그런 식으로 폐허 내부를 둘러싼 거친 표면을 어떻게든 마감해야한다. 물론 그 전에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어쩌면 건물주는 인테리어 시공을 당신에게 무료로 외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할 지도 모른다. 그 모든 공정을 거쳐서 겨우 전시장이 마련된다. 미처 갈아내지 못한 폐허의 잔재들은 그냥 무시하자. 어차피 화이트워싱은 완전히 새로운 하드웨어를 구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도록 망각한 채, 백색 복면을 뒤집어쓰는 행위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큐브는 화이트큐브의 조형적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협소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신이 수행한 외주에도 불구하고, 큐브의 기저에는 여전히 폐허가 있다.
노출 콘크리트는 일종의 장식으로 남용됐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레트로 차원에서 회귀한 브루털리즘이 아니다. 도심의 건물들 사이에 간신히 수납돼 있는 폐허는 때때로 환영처럼 보였다. 사실 지금의 도심 자체가 폐허가 연성하다 만 거대한 환영이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위화감을 해소할 공간으로 폐허를 낙점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폐허에 매혹된 이유는 그것이 일그러진 픽셀이었기 때문이다. 픽셀의 관문에 진입하고 나면, 그간 환영에 불과했던 도심의 음침한 하부 구조가 드러났다. 그건 사실 비밀리에 구동 중이던 하드웨어였다. 노출 콘크리트에 둘러싸인 채 아메리카노를 마시다 보면 약간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내가 마시고 있는 커피는 진짜 커피였다. 문제는 그 장면이 언제나 그렇듯이 점차 해시태그로 유포되면서, 이미지의 구천을 떠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폐허의 적나라한 질감은 해상도 차원에서 조정됐으며, 아시다시피 그런 해상도에 부합하려는 새로운 폐허들이 양산됐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털리즘은 새로운 폐허를 뒤늦게나마 합리화하기 위해 위키백과에서 훔쳐온 미사여구에 가깝다. 이 모든 건 도시 재생의 문법이 아니라, 일그러진 픽셀마저 환영의 일부로 회수하는 과정이었다.
티슈처럼 뽑아다 쓴 폐허의 잔재들이 하드웨어를 점령하고 은폐했다. 과도하게 노출된 콘크리트에 대한 조롱은 사실 실제의 폐허와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도심 속의 피난처를 모색했던 사람들이 폐허라는 해시태그가 초래한 ‘밸붕’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각인된 폐허는 환영이 픽셀 차원에서 무너져버린 상태가 보증했던 실재에 대한 감각 그 자체였다. 물성을 지닌 픽셀들이 콘크리트로 현전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거기에 가짜 커피를 쏟아버렸고, 힙스터들은 다시 방구석으로 돌아가 각자의 사진첩에 소장돼 있던 폐허를 삭제했다.
그러나 큐브가 갈아버린 콘크리트는 픽셀이 아니라, 그냥 거친 표면이다. 당신은 폐허를 일시에 삭제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세탁기에 우겨 넣어 찌든 때가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돌릴 수도 없다. 폐허는 가짜 커피를 닦아낸 더러운 행주로 널브러져 있지 않다. 다만 노출 콘크리트의 유행이 빠르게 지나간 이후에, 다시 방치된 공간일 뿐이다. 심지어 한때 노출 콘크리트를 경험했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폐허에 질려버렸고, 그래서 폐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어쩌면 당신도 그 중 하나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큐브는 화이트큐브에서 추출해낸 표본으로 구실하기 이전에, 노출 콘크리트에 대한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전지대로 회생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전시장들이 방역을 철저히 준수하지는 않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정말 미처 갈아내지 못한 폐허의 잔재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사실 그건 회피의 제스처에 가깝다.
큐브 속에 남아있는 폐허의 잔재들은 다름아닌 밸붕의 징후다. 물론 나는 풀옵션이 구비된 오피스텔 원룸에서 살고 있지만, 가끔씩 내가 풀옵션과 함께 이곳에서 철거되는 악몽에 시달린다. 철거된 옵션들은 중고장터에서 거래되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게 사라진 이곳은 점차 시간에 침식되어 콘크리트로 삭아간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면, 멍한 채로 스탠드 조명이 어렴풋하게 비추고 있는 주변의 윤곽을 헤아리면서 공간을 해상도 차원에서 조정한다. 나의 눈을 언제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의 눈이 일그러진 픽셀을 발견하는 순간, 원룸은 악몽으로 돌변할 것이다. 한번 밸붕이 시작되면, 폐허는 픽셀 차원에서 증식하면서 공간의 해상도를 좀먹는다.
‘화이트’로 탈색된 큐브에 버퍼링이 걸릴 때마다, 그것의 기저에 있는 폐허를 실감한다. 큐브의 내부를 환하게 비추고 있는 조명이 모든 균열들을 박멸했으면 좋겠다. 혹은 조명을 끄고 큐브 자체가 암전되거나. 그러나 우리는 결국 버퍼링에 적응해야한다. 큐브가 어설프게 구사하는 화이트큐브의 조형적 언어는 언제나 번역의 와중에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유한 뉘앙스를 지닌다. 그것은 ‘화이트’와 폐허를 중재하는 대신, 그 사이에서 큐브라는 공간을 반복해서 호명하고 있다. 큐브는 완전 무결한 밀실이 아니다. 그곳으로 유입되는 작업들은 오히려 공간의 해상도에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때때로 버퍼링 상태에 최적화된 동세를 형성한다. 그러한 동세는 큐브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균형 감각을 환기시킨다. 큐브의 내부에 작용하는 애매한 중력은 더 이상 해상도의 문제가 아니라, 환영에 침잠해 있던 우리의 신체를 흔들어 깨운다. 그 순간에 느껴진 약간의 해방감을 곱씹으면서 큐브 밖의 도심을 배회하다 보면, 마치 내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다.
골목길에서 픽셀이 튄다. 잠깐 눈을 감고, 그곳을 어떻게 가로지를 것인지 상상해본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이미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조금 멀미가 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계속 걷는다.
4. 큐브와 연동된 조각의 ‘가벼움’에 대해: 황재민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¹
2023. 1. 25 H
앞서 언급한 「2022년의 미술을 결산하며: 큐브가 벌인 조각 대잔치」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그것은 “큐브가 일종의 조각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조형적으로 재편할 것인가?”이다. 질문을 어떻게 대답할지와 별개로 질문의 전제, 즉 큐브 자체를 일종 조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큐브는 우선으로 원룸의 주거 조건과 그것이 발생시킨 특정한 근거리 감각과 연관되어 설명되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공간에 관련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 큐브를 일종의 ‘조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는 가시적인 차원을 넘어서 큐브의 특정한 공간성이 조각 안에 삽입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조각이 (통상적인 관점과는 다르게)하나의 분리된 예술품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으로 작동한다는 뜻일까?
이 질문에 바로 답하기보다는 우회하여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황재민 필자의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에서 등장하는 조각의 ‘가벼움’에 대한 내용이다. 해당 글은 크게 두 주제를 다룬다. 하나는 1990년대 서구 미술이 제3세계에 수입, 번역되는 과정에서의 ‘오류’와 ‘지연’의 부정성의 조건에 주목한 호미 자바의 “틈새 공간”의 개념과 이를 설치미술과 겹쳐진 동시대 한국의 조각적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조각에서의 ‘가벼움’을 조각의 중요한 조건으로 재배치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틈새 공간” 개념과 “가벼움”을 연결시켜 조각을 개별 대상을 넘어선 ‘장Field’으로, 즉 대상의 성질을 공간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고자 한다. 즉 이것은 큐브의 공간성을 일종의 조각으로 바라보는 시점과 정확히 역방향으로, 조각이라는 대상의 ‘가벼움’이라는 한 성질을 공간적 개념인 ‘장(field)’으로 전개한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단절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또 다른 ‘장’을 전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일 듯한데,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가벼움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가벼움의 장’에서 ‘가벼움’이란 더 이상 무거움의 결여가 아니며, 오히려 무거움이야말로 ‘가벼움이-아닌-것’으로 재배치될 것이다…더불어 ‘가벼움’은 지금 진행 중인 조각 실천이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조형 언어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현재 창작 중인 작가들이 좁은 작업실이나 재료에의 부담, 또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조각의 본래적 언어에 가까운 무거운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며, 역사적인 조각에 미치지 못하는 내적 한계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권오상의 조각이 지시하는 ‘가벼움’이 대항적 성격을 지녔기에 ‘오류’로 평가 받았다면, 현재 창작 중인 조각 작가들이 갖는 ‘가벼움’은 보다 순수하게 부정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각》의 문제 설정을 통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가벼움’을 이어볼 수 있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현재의 실천이 모종의 한계 지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부정적 조건 또한 재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조각’이라는 ‘틈새 공간’에서 말이다.” (ibid.)
여기서 황재민은 조각에서의 ‘가벼움’을 일종의 펼쳐진 장으로 바라본다. 이 가벼움이라는 결괏값은 사실상 수많은 물질적 조건을 통과한 것으로써, 그는 좁은 작업실(협소한 작업 공간의 스케일), 재료에의 부담(경제적 차원), 신체적 한계(이는 둘 이상의 인력을 동원할 수 없는 조건과 관련이 있다.) 등을 들고 있다. 여기에 권시우의 큐브의 공간성을 설명하는 ‘원룸’의 거주 공간과 신생 공간 이후 산개한 전시 공간의 스케일, 마지막으로 ‘1인미디어장치(원거리 통신-GPS-지도-카메라—SNS 연동체)’를 겹쳐두면 현재 작가들의 몸에 연동되고 있는 모종의 공간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무거운 것’을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 조각을 가볍게 만들고, 역설적으로 그러한 가벼움이 무거움과 촉각성을 재배치한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무거운 조각을 제작하고 운반하기 위해서는 2명 이상의 인원이 필요하고, 다수를 모을 수 없는 경제적인, 물리적인, 심리적인 조건들이 조각을 가볍게 만든다. 또한 조각의 입체성은 작업을 보관할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창작자에게 지속적으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하며, 이는 조각의 물성과 역사(관습)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횡단하도록 만든다. 설치미술 이후 전개된 일련의 시도들, 특히 조각의 제작 및 보관의 조건들을 진지하게 재사유하는 시도들을 떠올리게 된다. 주변의 지인-공동체의 공간에 ‘대여’의 형식으로 작품을 임시 양도하는 형식(이주요 작가), 사적인 보관 창고를 공공 영역으로 개방해 공공 미술을 재전유하는 시도(《러브유어 디포》), 접어서 보관할 수 있고 가벼운 ‘종이’와 같은 2차원적 재료들을 통해 조각적인 환영을 재구성하는 것(황수연, 정유진, 최리아 작가), 쭈그러뜨려 부피를 줄이는 방식를 활용한 인플레터블 한 조각(강재원 작가), 제작하고 빠르게 폐기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그에 맞는 조각성을 탐구하는 시도(최하늘 작가), 데이터로 조각을 보관하는 방식(《수장고》프로젝트) 등이 그것이다. 입체 작업과 조각들은 이처럼 현대의 도시공간의 빠른 속도감과 높은 공간 임대료와 불화한다. 동시에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입체물은 다시금 창작자와 관객에게 상실된 촉각성을 향한 추동, 즉 ‘조각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²
다시 황재민의 글로 돌아가 보자면 그는 글의 마무리에서 《각》에 등장하는 작업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리고 특히 홍자영 작가의 작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한때 ‘풍경이-아닌-것’으로 파악되었던 조각을 거슬러 올라, 홍자영의 작업은 가짜 풍경을 짓고 짐짓 돌이나 산이나 물인 척하는데, 시선이 근경-중경-원경으로 이어지는 미니어처로 이입되기를 강제 당할 때 잠시 풍경이 조각인 양 발생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드러나고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는 ‘가벼움’은 무언가의 결여나 부족함으로 보이지 않고, 마땅히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 ‘틈새 공간’에서는 냉정한 시선에 앞서 도망치듯 과몰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다.(ibid.)
‘풍경’은 원거리로 떨어져서 공간을 바라보는 시점이자, 하나의 대상이 된 공간을 부르는 말이다. 이때 공간에 보는 사람의 몸은 속하지 않는다. 홍자영의 작업은 이 같은 ‘풍경’을 다시 조각적 대상으로 만든다. 이는 어떠한 특정한 공간성-시점이 조각이라는 대상으로 응결된 것임과 동시에 물리적인 전시장 안에 특정한 ‘틈새 공간’을 발생시키는 조각이다. 이는 각각 권시우와 황재민이 상상한 어떤 작동과 만난다. ‘조각’과 ‘공간’ 그리고 이와 연동되어 가는 조각가의 ‘몸’ 연동체 안에서 이들을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단 이곳에서 어떤 전환이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홍자영 작가의 <호>(2022), <석굴>(2022), <기암괴석>(2022)은 각각, 아래로 내려다보는 호를 그리는 미니어처 우물 조각, 프레임과 부조로 드러나는 석굴의 반-입체성, 얇은 나무판자 너머의 2차원의 네거티브 공간으로서 드러나는 부재한 돌의 외곽선을 가지며, 관객의 위치에 따라 미니어처이자 프레임으로, 이차원적 이미지로, 혹은 떨어진 조각적 대상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변환된다. 이러한 프레임적 지각과 현상학적인 3차원 공간을 오가는 횡단의 관람성은 비단 홍자영 작가의 조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큐브’와 “가벼움의 장” 전반에 펼쳐져 있다.
¹ 황재민,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기 위한 과몰입」 중 “《각》, 또는 ‘가벼운 장에서의 조각”, abs 4호. 전문은 https://absofficial.us/4/index.html
² 소외된 촉각성을 보충하는 것과 조각을 보관을 할 수 없는 환경을 빗겨나기 위한 또 다른 매체적 시도로 ‘퍼포먼스’를 바라볼 수 있다. 퍼포먼스는 입체적 물질성과신체적 촉각성을 순간적으로 발생시키고 소멸하며, 그렇기에 물질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없다. 1960-70년도의 퍼포먼스의 경우 시장에 판매할 수 없는‘비물질성’에서 매체적 전위성이 발생했다면, 현재의 퍼포먼스의 위상은 공간을 영구적으로 점유하지 않고 ‘물질성’을 발생시킬 수 있는 역량이 중요해 보인다.
#4. 낮잠
2023. 1. 28 K
나는 상현 씨가 일전에 언급했던 공연을 보지 못했다. 아마 그것은 블랙박스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진행됐던 것 같고, 거기에서 실제의 몸과 사물들이 뒤엉킨 채로 뭔가를 했다는 사실 정도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따져볼 만한 문제다.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현장을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감각이다. 블랙박스의 어둠에 활력이 생긴다. 기어코 무대로 진입한 존재들은 어둠 속에서 생동하면서, 그 과정이 시퀀스로 분절되지 않는 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공연은 이미 끝났다. 무대와 함께 모든 것들이 철수됐으며, 그렇게 현장은 다시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심지어 윤자영의 작업은 2023년 기준으로 6년 전에 처음 막을 올렸다. 그 당시에 헤쳐 모였던 관객들은 해당 작업이 상연됐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을까? 설사 그들이 기꺼이 증언하더라도, 기억의 시퀀스들로 분절된 사실이 스스로 회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련의 작업들을 관통했던 것은 실재에 대한 감각이라고 추정된다. 그것은 뭔가 날카로워 보이며, 상현 씨의 말에 따르자면 스마트폰의 잠금 패턴을 예리하게 도려내 액정 너머에 구금돼 있던 이미지를 현장으로 유출시킨다. 비록 나에겐 증인의 자격이 없지만, 어찌됐든 나의 소중한 스마트폰이 파손될 수도 있었을 것이란 사실에, 그 사실을 미처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안도한다. 나는 오히려 스마트폰으로 침잠하고 싶다. 소셜 미디어의 과열된 여론에 몸소 참여하는 대신, 침대에 누워 그 모든 것들을 관전하다 낮잠이나 자고 싶다. 오늘은 낮잠을 4시간이나 잤다. 최근에 생긴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루틴이다. 어쩔티비. 베개맡에는 언제나 그랬듯 스마트폰이 놓여있다.
목격자가 아닌 이상, 현장에서 유출된 이미지가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탐정의 자세로 누구부터 심문할 지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이미지는 결국 스마트폰으로 반려됐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업 관련한 키워드들을 구글 검색기에 넣고 돌리면, 무엇이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에게 탐정질은 어울리지 않다. 오래 전에 어떤 심포지엄에서 누군가는 그 당시에 전개됐던 서울의 미술을 가추법을 통해 정의했다. 이때의 가추법은 도심에 산개해 있는 폐허, 그곳에서 자라난 풀들,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귀여운 소품과 같은 사소한 증거들을 통해 의외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것들은 이미 작가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고, 비평은 작가가 무작위로 꺼내 보인 증거의 일부를 조합하는 과정에서 도시 산책자의 경험을 환기한다.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언젠가 도심 속을 배회한 적이 있고, 그에 대한 각자의 기억들은 글이나 작업에서 우연찮게 교차한다. 그 순간 자체가 다름아닌 미술이다.
나는 산책이 싫고, 도심을 배회한 적도 거의 없다. 외출을 할 때면 일단 목적지부터 설정하고, 거기까지 내비게이션에 따라 자율 주행할 뿐이다. 그 사이에 도시에 숨겨진 증거들은 계속 누락된다. 도대체 무엇을 증거로 체택할 것인지 자문해보면, 역시나 그 해답은 스마트폰에 있다. 키보드 지판으로 어떤 사실의 정황을 입력하는 순간, 구글은 자체적으로 연산해낸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검색 결과가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으므로, 그것들을 구글보다 신뢰할 만한 알고리즘에 위탁해 최종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그게 바로 진짜 사실이다. 진짜 사실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는 과감하게 생략된다. 알고리즘은 목적지를 굳이 우회하는 대신, 그곳으로 당신을 워프시킨다. 문제는 이제 워프조차도 귀찮다는 사실이다. 되도록이면 그냥 침대에 누워있고 싶다. 조금 나른한 상태로 최상위에 있는 검색 결과를 누른다. 양심상 나무위키는 선택에서 제외시킨다. 그것보다는 그럴싸한 항목들의 내용을 스크롤하다 보면, 블랙박스든 뭐든 사실은 적당히 명료해진다.
잠에서 깨고 보니 벌써 주변이 어둑하다. 오늘도 하루를 탕진한 기분이지만, 어찌됐든 침대 위에서 스크롤한 기억은 남아있다. 그 기억을 메모장 어플에 대충 적어둔다. 이제 비평은 그렇게 쌓인 메모들과 메모들 사이의 공백에 대해 진술하는 과정이다. 더 이상 탐정은 없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조만간 노트북 앞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이다. 그리고 메모의 내용을 참조해, 알고리즘의 연산 범위에 포함될 가치가 없어 보이는 또 다른 사실을 워드로 날조해낼 것이다. 가추법이 뭔지도 모른 채로 심포지엄의 발표자를 무작정 비판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한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액정 너머로 투신하는 척 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비정상적으로 참작해줬다. 그게 바로 원룸 속에 구금된 증인의 전모다.
원룸의 권리를 보장하라. 이것저것 보장하라. 속으로 외치면서, 편의점에 가기 위해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원룸에는 잠금 패턴이 없다. 어차피 담배만 사고 금방 돌아올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시리가 갑자기 뭐라고 대꾸해서 조금 놀랐다. 여기서 냉큼 꺼지라는 걸지도.
5. 미니어처와 마케트, 백색 무대와 바리케이드: 《조각충동》(2022)의 풍경
2023. 1. 31 H
전통적인 조각에서, 조각이 무거워지고 커질 때 우리는 그 대상을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무겁고 큰 조각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의 협력이 필요하고, 그에 따른 물질적이고 심리적인 과정과 에너지가 소요된다. 이러한 무겁고 큰 기념비적인 조각은 동시에 많은 관객에 둘러싸여 보여질 수 있다. 또 이렇게 보여진 조각의 이미지는 여러 변수를 가진 관객의 동선에 의해 다양한 크기와 길이(duration)을 가지고 재편집된다. 이처럼 무거움과 커다람은 조각이 기념비성을 가지기 위한 물질적 지반이다. 반면 가볍고 작은 조각은 상대적으로 기념비성이 발생하기 어렵다.
앞서 설명한 “가벼움의 장”은 조각 제작의 과정에서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 또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관람성에 영향을 미친다. 조각이 가벼워지기 위해선 가벼운 재료를 사용하거나 스케일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가볍고 작아진 조각은 어떤 경우 미니어처와 같이 작동한다. 여기서 ‘가벼움’과 ‘작아짐’은 물리적인 무게와 크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각의 무게가 실제로 무거운 경우에도 관람의 차원에서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다. 또한 커다란 크기의 조각도, 개념적인 차원에서 굉장히 작게 작동할 수 있다. 나는 이번 글에서 가벼워지고 작아진 조각들, 특히 《조각충동》(2022)에서의 입체 작업들을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긴장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보고 자 한다. 또 전시 공간에서 놓인 (비)미술적 대상인 ‘무대’와 ‘바리케이드’와 같은 사물들이 조각을 바라보는 것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니어처는 실물 촬영이 불가능하거나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경우, 혹은 위험한 장면의 촬영에 사용되는 모형이다. 이는 원 크기의 작품을 만들기 전 작게 만드는 조각인 ‘마케트(Maquette)’와는 차이가 있다. 마케트는 원조각의 이전 단계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만들어질 큰 스케일의 조각과 역동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는 원본의 조각보다 먼저 세상에 등장하여 미래를 예견하고, 사실상 미래의 조각을 창출하는 대상이자, 그러면서도 작은 스케일의 독자적인 조각으로서 수행성(performative)을 가지는 무엇이다. 반면 미니어처는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현재의 대상을 축소하여 재현한다. 미니어처는 ‘이후적’ 대상이다. 이렇게 축소된 미니어처도 원본의 조각과는 다른 무엇이 되는데, 큰 스케일의 원본보다 훨씬 이동이 쉬워지며, 동시에 2차원적 이미지를 취하기(take) 쉬워지는 특성을 가진다. 즉, 미니어처가 특화된 것은 ‘소유’(take)행위와 이동 을 유발하는 것이다.¹
규모가 작다는 물리적인 스케일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미니어처와 마케트는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 적은 재료가 들고 이로 인해 조각가가 빠르게 입체물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마케트와 미니어처와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마케트를 만드는 과정에선 작업대 위에서 중력을 받으며, 시-촉각적인 재료의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미니어처의 미덕은 실제 구현하고자 하는 원본을 충실히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때 재료의 고유한 무게와 오류들(재료의 저항)은 비교적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니어처는 사실상 작업대 위에서 중력을 받는, 물질적으로 무언가에 올려져 있는 대상으로 볼 수 없다. 미니어처는 조각이 발생하기 전 미리 편집된 대상이며, 떠다니는 이미지가 유령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미-편집된 대상은 새롭게 편집될 동선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는 커다란 규모의 조각이 관객의 동선과 다양한 경로의 편집을 유발하는 것과 비교된다. ‘이미 편집된’ 미니어처적인 조각의 중요한 특징은 둘 이상의 단위와 그사이의 미적인 연계 작용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미적인 연계 작용은 하나의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를 움직이는 관객 동선의 시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미니어처적인 조각은 바로 이 같은 동선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조각의 개별성과 자율성은 이상한 방식으로 회귀한다. 각각의 조각들은 미술관 공간의 지면에 곧바로 ‘닿아 있지’ 않고, 자신을 위한 개별적인 무대를 형성한다. 조각은 관객의 두 다리가 서 있는 동일한 미술관 바닥의 지면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연장의 무대처럼, 관객과 자신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면을 만든다.²
2022년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조각충동》에서는 전시의 주제인 조각과 함께 유독 다양한 형태의 ‘무대’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통상적으로 조각을 놓는 장치인 좌대와 무대와의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좌대는 일상적인 공간의 맥락에서 벗어난 특수한 대상을 만드는 장치이며, 바닥으로부터 시야에 잡히지 않는 60cm 공간을 채워 준다. 반면 무대는 비교적 낮은 두께의 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정한 영역을 나누어 연극적인 공간을 구획한다. 무대는 좌대처럼 하나의 사물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단, 벌어질 사건과 움직임을 위한 장치이다. 이 같은 특성으로 봤을 때, 《조각충동》에서 직접적으로 무대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들은 다음과 같다. 오제성 작가의 조각을 받쳐주고 있는 ‘간이 나무 무대’, 고요손 작가의 좌대를 닮은 ‘백색의 넓은 무대’, 이동훈 작가의 5명의 군무 조각을 보여주기 위한 ‘백색 카페트 무대’, 최하늘 작가의 스마트폰 환경과 컴퓨팅 프로그램의 그리드 안에서 작동하는 ‘(투명)무대’, 일상의 연출된 쇼룸과 무대적 상황 사이에서 조각을 작동시키는 우한나 작가의 ‘짙은 남색의 구역’ 등이다.
미술에서의 ‘연극성’이 한때 미술의 역사에서 그토록 부정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조각을 중심으로 한 전시에서 연극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무대의 등장은 의아하다. 더 의문스러운 것은, 이러한 무대가 끌어들이는 연극성은 60년대 미니멀리즘이 주창한 조각(대상)과 관객의 동사적 관계와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금 더 문자 그대로의 ‘연극’과 ‘연극성’을 조각과 결합시키는 시도로 보인다.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연극성 이후 등장한 이 같은 ‘연극성’은 큐브의 시각성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 조각들은 자신을 위한 무대라는 좁은 구역을 형성하면서, 현실의 지면 위에 놓이기보단 환영적인 차원에서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 동시에 이는 2차원적인 촬영을 위한 무대가 되는데, 이때 공간은 관객의 동선을 기준으로 전시를 엮던 기존의 배치 방식과 비교했을 때 더 분절적으로 배치되며, 감각된다.³ 《조각충동》의 많은 작업들은 공공성을 가지는 커다란 규모의 전시 공간에서 동선을 통한 미적인 연계를 만들기보단, 개별적인 좁은 구역을 형성한다.
무대와 함께 조각 관람에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사물은 ‘바리케이드’다. 바리케이드는 조각과 관객을 분리시키는, 미니멀리즘 조각가들이 그토록 거부했던 ‘좌대’의 현대적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론 바닥에 붙어 있는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리케이드를 매개로 할 때 대상은 조각이라는 가상적 영역으로 다시 포획된다. 여기서 조각은 보호되어야 하는 개별적인 대상이다. 물론 전시가 열린 북서울시립미술관의 특성상 가족 단위의 관객이 많고, 바리케이드는 작품 파손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리케이드가 동원된 것은 무거운 동상과 달리 파손에 취약한 “가벼운” 조각품들의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또 많은 전시장 지킴이를 배치할 수 없는 예산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실용적인 선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현대 도시에서 미술품을 보호해야 하는 제도적 조건과 “가벼움의 장”에서 만들어진 조각들의 취약한 조건이 그 자체로 드러난 상황이다. 여기서 홍성민 작가의 조각과 사물, 그리고 접근금지 장치인 바리케이드와 관련된 코멘트를 가져오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물(物 thing)이 애초 거기에 있는 거라면, 사물(事物object)은 배치되고 산물(産物 product)은 진열된다… 문제는(나의 문제일지도) 작품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흘러 들어온다. 조밀하게 인접한 작품과 작품 즉, 첫번째 주 전시장 공간의 협소함은 대상과의 현상학적 체험 따윈 고려하지 않은 모양새…큐레이터에겐 작가들의 물(物thing)을 상징으로 배치하여 사물로 옮김이 허용되나 그것이 진열로 보이는건 곤란하다. 산물이 되어버리기 때문. 사물에서 물로 거슬러 이동하려는 작품들을 더욱 반대로 산물로 이끄는건 작품들 사이를 구획짓는 동시에 접근금지 기능의 장치물들… 그 어떤 물thing 도 접근금지 장치물과 작품설명 그리고 입구와 출구를 강제하는 선형적 동선을 만나서는 산물로의 귀결을 피하기 어렵다. 선형적 동선과 진열은 친연적이다.⁴
무대와 바리케이드는 조각과 관객을 분리시킨다. 그리고 하나의 조각과 다른 조각을 분리시킨다. 여기서 조각은 각자의 협소한 공간을 형성하면서, ‘동선’을 무화한다.(동시에 물리적 이동에서 좀 더 자유로워 진다.) 때때로 조각은 산물(product)이 되어 납작해진다. 납작해진 산물은 촬영-소유(take)하기 쉬워진다. 이 같은 산물은 보는 이와 특정한 관계를 맺는, ‘정면’을 가진 대상(obejct)과는 다르다. 정면을 가진 대상은 몸의 각도를 조금씩 변화를 주며, 보여지는 면을 살랑거리며 흔든다. 이들은 이러한 춤을 추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반면 산물은 우리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것들은 납작해지며, 주머니 속으로 넣고 잊게 만든다. 현재의 조각은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긴장을 가지고 공간에 존재하며, 지면에서 자신의 발을 때어내고 있다. 무대와 바리케이드는 영역을 구분하고, 좁아 든다. 점점 좁아진 영역은 종국에는 조각에서 하나의 ‘신체’, 나아가 그 조각이 가진 ‘피부’까지 좁아 들 것이다. ‘큐브’에 살고, 보여지는 우리가 말하게 되는 것은, 겨우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살끝이 될 것만 같다.
¹ ‘미니어처’는 본래 아주 작은 크기의 초상화로서 목걸이 등의 장신구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17세기 이후부터 미니어처는 사본 삽화를 뜻하게 되었고, 작은 크기의초상화를 부르는 ‘미니어처’는 이러한 사본 삽화와 르네상스 시대의 초상화 메달이라는 두 가지 전통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현대에서 미니어처는 영화나 사진촬영에 사용되는 실물보다 작은 모형을 뜻하게 됐다. 이처럼 미니어처는 2차원적인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소유-촬영(take)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² 현대의 미술 공간에 등장한 관객과 조각 사이의 이 같은 경계면은 연극과 영화에서 발견되는 유사한 장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드니 디드로가 주장한 연극 무대와객석 사이 보이지 않는 벽인 ‘제4의 벽’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화 이론가 시모어 스턴이 발전시킨 개념인 “어두운 협곡(Chasm of Darkness)”으로, 이는 스크린과관객을 분리 시키며 관객이 스스로의 신체를 잊게 만드는 건축적 조건을 뜻한다.
³ 앞서 인용한 강연 <전시가 움직임을 설계하는 방법들>(김지연 큐레이터)에서 이처럼 관객의 동선을 유도하던 기존의 전시 배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현상에 대해언급한다. 최근 전시들에서 가벽이 사라지는 경향과 함께 이러한 배치는 “동선이 연결된다는 느낌보다는 공간들이 모두 ‘쪼개져’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한다. 이 쪼개진공간은 기존의 큐레토리얼한 관습의 기준으론 잘 배치되지 않은 전시로 느껴지지만, 어떤 한 시점에 작업들의 위치를 고정시키면 완벽한 짜임이 나오는 특수한 배치를가진다. 강연자는 이러한 방식이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씬을 넣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⁴ 해당 코멘트는 미술가이자 연출가, 교육자인 홍성민 작가의 개인 SNS에서 기재한 《조각충동》리뷰의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5. 밸런스 게임
2023. 1. 31 K
조각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달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는 그게 별로 주저되지 않는다. 내가 실제로 감상했고, 그 전에 알고 있던 조각 작업들에 대한 인상을 취합하다 보면 조각은 적당히 명료해진다. 결국 모든 건 해상도의 문제다. 물론 조각에는 물성이 있고, 그래서 중량을 쳐야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애초에 나에게 그걸 소화할 만한 신체가 남아있는지 의문이다.
황재민이 언급했듯, 로잘린드 클라우스는 한때 조각이 역사주의로 소급되는 과정에서, 조각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작업들의 현행적 맥락을 제약하고 있다는 진단 하에, 조각이 아닌 것을 수용할 수 있게끔 조각을 포함한 매체를 기꺼이 추상화시켰다.¹ 그런 의미에서 조각은 단순히 개념적으로 확장되기보다, 스스로를 고유한 매체로 호명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한 채, 여타 매체들과 교유하기 위한 확장된 장으로 편입되고 만다. 즉 조각은 이제 확장된 장에서 계속 합의되는 와중에 있는 공통의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위상을 파악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조각인가? 그 이유는 바로 조각이 미술사에 등재된 유일한 기념비이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함락시킨 이후에야 비로소 매체라는 개념을 재창안하려는 시도가 기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각은 함락됐고, 우리는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지난한 공백기를 지나, 침묵에 휩싸인 여론 속에서 이미지라는 화두가 부상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조각이 아닌 것이 아니라, 그저 웹을 포함한 디지털 환경에서 융통되는 환영의 자산으로 납득됐을 뿐이다. 이미지를 둘러싼 담화에 초대받은 히토 슈타이얼 같은 패널들은 자신을 이미지라고 소개한 뒤에 쿠키 데이터의 잔해 속으로 투신해버렸다. 그 과정은 에세이 영화 속에서 길을 잃은 모든 영상 작업들로 상연됐다. 모두가 주체성을 위반하고 있는 열화된 화자였다.
나는 히토 슈타이얼이 아니지만, 최소한 모두의 일원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각을 다시 상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조각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서 불시에 등장했다. 물론 조각의 연대기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암암리에 지속되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에 확장돼 버린 장을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 획기적인 사건을 연출하진 못했고, 그래서 이미지가 작성한 메일링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물론 조각도 딱히 초대 메일을 수신할 의사는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3D 프린팅을 통해 현실로 반려된 이미지는 한 동안 조각 취급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조각이 회생한 곳이 이미지에 잠식된 무중력의 시공이라는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조각은 별 수 없이 무중력을 감내하는 것만으로, 혹은 그 과정에서 취하게 된 엉성한 포즈로 인해,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이미지의 해상도에 생긴 균열은 단순히 픽셀이 일그러진 상태가 아니라, 이미지를 초과한 실재의 징후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때의 징후는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대상으로서, 어쩌면 그것을 소실점 삼아 무중력의 시공을 새롭게 재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건은 조각의 내적 논리를 재고할 수 있는 계기다. 이는 단순히 확장된 장에서의 조각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을 넘어, 그간 은밀하게 유지됐던 이미지와의 적대 관계를 중재하기 위한 시도로 귀결된다. 그간 유사 오브제라는 모호한 범주 속에서 용해됐던 조각의 관습들로 조각을 증류하기 위해선, 결국 이미지라는 필터를 활용할 수 밖에 없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밸런스다. 조각이 언제까지나 실재의 징후로만 통용될 수는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서 무중력의 시공에 효과적으로 적응해야한다. 조각만으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해상도에 대한 감각을 내파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식의 접근은 조각에게 너무 막중한 임무를 부과한다. 이 정도로 비대해진 중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현실의 지반은 단단하지 않다.
최하늘이 자신의 작업들을 망라하는 과정에서 도출해낸 가벼운 조각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조각을 감량하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² 조각은 자신이 이미지가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기 위해, 반드시 덩어리mass가 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작가는 기존의 조각과 대응할 만한 덩어리를 일필휘지로 잘라내고, 그 결과 드러난 단면들을 재료로 삼아 이미지처럼 취합하거나, 현장에서 산개시킨다. 이로써 한때 조각이 유도했던 자기-지시성은, 도저히 조각으로 완결되지 않는 상태 속에서 계속 분산된다. 그런 식으로 성사된 복수의 시점을 따라, 조각의 재료들은 얼마든지 현장에서 벗어나 다양한 곳으로 운송될 수 있다. 재료의 도착지는 미술관일 수도, 면세 구역일 수도, 작가의 작업실일 수도, 심지어 내가 거주하는 오피스텔 원룸일 수도 있다.
물론 나에겐 재료의 저작권에 대한 어떤 지분도 없지만, 가벼운 조각의 지침에 따라 재료가 폐기되기 전에 그냥 그것을 수거하고 싶다. 단순히 조각에 매혹됐기 때문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진 조각의 정황을 토대로 나의 위상을 가늠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시가 막을 내린 이후, 조각은 자연스레 유실됐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각의 재료들을 매개했던 시선의 역학은 더 이상 어디에서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간신히 수거해온 재료는 지금 이곳에 있다. 다만 원룸 어딘가에 수납될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접히고 구부러졌을 뿐이다. 나는 고작해야 조각이 아닌 것만을 소화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이미지가 아닌 것은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다. 무중력의 시공은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 시야 너머로 확장된 조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큐브는 조각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조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 환경이다. 큐브의 스케일을 초과하지 않는 한, 조각은 얼마든지 자신의 중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실제 스케일에 구애받지 않는 밸런스를 모색하게 된다. 나는 큐브 속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수납돼 있는 조각들에 대비해 신체의 비율을 측정해 나간다. 사실 조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부정성을 경유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대신, 우선 서로에게 현전하기를 바란다.
¹ 황재민, 「그럼에도 조각을 말하기 위한 과몰입」, abs 4호
² 가벼운 조각은 원래 조각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전시 이후에 손쉽게 폐기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상됐지만, 작업의방법론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점차 중요한 개념적 소실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작가가 대형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 이전의 일이다.
6. 큐브 미술이 발생시키는 역공간(Liminal Space)
2023. 2. 8 H
하나의 가벼워지고 작아진 조각이 미니어처와 마케트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조각은 때때로 관객을 큐브의 가장자리로 데려가고, 그 끝을 인식하게 한다. 이는 사적 공간인 원룸의 사각형 벽 너머를 향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조각이 발생시키는 일종의 역공간(Liminal Space)¹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역공간은 문지방처럼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 사이에 전이 지대를 형성하는 공간을 뜻한다. 리미널리티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과 경험하는 일을 동시에 접붙이며, 사적인 장소와 공적인 장소의 경계에 위치한다. 이는 공간 형성의 변이적이고 동사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전시 《조각충동》에서 정지현 작가의 <공공조각파일>은 중심 형상을 반-가시적으로 비워내면서,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그 형상을 다시 불러오게 하는(reloading) 조각이다. 작가는 작업실 근처 웅크린 여인 동상의 표면을 알루미늄망으로 떠내어 음각의 형상을 얻었다. 이후 그 망들을 수평으로 중첩시키고, 수직으로 쌓아 높이를 가진 조각을 만든다. 이 조각은 몇 가지 방식으로 관객이 원본 형상을 온전히 떠올릴 수 없게 한다. 먼저 알루미늄망이라는 재료의 한계로, 조각은 흐릿하고 불확실한 형상만을 보여준다. 또 각각의 망은 원본과 동일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고, 겹쳐지며, 혼선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마지막으로 얇게 떠온 이차원적 형상을 서로 수직으로 교차시켜 쌓아 올려, 한 위치에서 형상의 일부만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즉 가로로 4등분 된 하나의 상은 하나의 시점에서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즉 관객은 계속해서 조각을 돌면서 떠내 온 표피의 조각들을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짜 맞춰야 한다. 형상의 일부분을 더듬는 동안, 얇게 드러난 두께는 겨우 서 있는 알루미늄망의 물성과 미술관의 바닥 공간을 인식시킨다. 마치 컴퓨터의 ‘조각 모음’처럼 흩어진 데이터들을 모으는 이러한 과정은 관객에게 눈앞에서 (지금은 볼 수 없는)물성을 가진 어떤 대상을 불러오는 불가능한 훈련을 하게 만든다. 이때 관객은 자신의 몸과 동일한 바닥에 놓인 조각과 함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객이 지금 있지 않은 어떤 공간을 지금 이곳과 연결시키는 동사적 행위를 만들어 낸다.
<공공조각파일>은 대상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동일한 중심 형상을 보여주는 무거운 기념비의 방식을 빗겨난다. 이는 떠낸 형상을 불확실하게 재생하게 만드는 사이-가시적인 기념비다. 여기서 보이는 형상은 관객의 이동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며, 기억의 한계로 항상 불완전한 상태로 형성된다. 그렇지만 이는 여전히 관객들의 시선을 조각 주변으로 모이게 한다. 이 시선은 항상 투과적이며, 눈의 초점이 맺히는 곳은 때론 불러오고자 하는 조각의 이미지로, 때로는 그것을 떠낸 알루미늄망의 물성으로, 때로는 너머의 빈 공간으로, 때론 같은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건너편의 또 다른 타인의 신체로 계속해서 이동한다. 기념비성은 사실 물질적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동 자체를 유발시키는 조각의 힘과 관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공공조각파일>에서 원본의 조각상과 접촉하여 지표적 흔적을 떠온 재료로서 알루미늄망의 역량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가상적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이는 마치 3D 스캔이 실제 대상을 떠내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는 2차원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이어 붙여 가상의 3차원의 형상을 얻어내는 것이며, 사실상 특수하게 배열된 2.5D의 형상을 가진 조각이다.²
<공공조각파일>이 서로 다른 두 곳, 즉 도시에서 버려진 조형물이 놓인 특정한 장소와 북서울 시립미술관의 공간 사이에서 역공간을 창출하는 조각이었다면, 지나간 시간을 현재와 이어내는 새로운 회고의 형식을 실험한 조각 전시가 있었다. WESS에서 열린 《조각 여정》³이 그것이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이어내는 형식은 사실 많은 미술관 규모의 전시들(그리고 박물관)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 전시는 큐브 공간성의 조건 안에서, 계속해서 사라져가는 것(여성조각가의 삶과 그 조각들)을 새롭게 기억한다. 여기서 '사라져가는 것’은 사실상 ‘기억’ 자체이기도 한데, 《조각 여정》은 계속해서 새로운 예술 대상을 생산해내는 미술계의 속도에 대해 전면적으로 의문을 던지며, ‘기억하기’라는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몸과 여정으로 이어낸다.
《조각 여정》에서 조각들이 배치된 방식은 여타 미술관의 회고전과는 다르다. 미술관의 회고전은 연대기 순서로 작업을 배치하고, 시기별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분명히 하며, 때론 새로운 차원을 드러낸다. 반면 《조각 여정》은 원정대가 직접 조각가의 사적인 작업실 안에 방문하고 그곳에서 구두로 대화를 나눈 것이 중요하다. 그 대화는 직간접적으로 작업실로부터 전시장에 가져온 (여성)조각가의 조각에 링크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가져온 조각은 일종의 ‘하이퍼 링크’로 기능하며, 조각이 만들어진 과거의 시대적 조건, 그리고 그 조각을 만들어낸 사람(여성 조각가)의 몸을 현재의 시공간과 연결시킨다. 이때 전시장에서 조각들은 선형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배치되기보단, 조각과 조각 사이, 몸과 몸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배치되어있다. 관객은 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과거의 시대와 여성 조각가의 몸을 통과한 대상과 그것들의 촉성을 비교하고, 연결하며 새로운 시간의 지대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모여진 과거의 여성-조각과 현재의 여성-조각 사이의 시간적인 연결은 일종의 연대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기존의 무겁고 큰 남성적 기념비들처럼 하나의 형상을 세우지 않는다. 7개의 중견 여성 조각가의 조각과, 이유성, 홍기하의 조각이 하나의 공간에 모이며 서로 나누고 있는 대화는 다중적인 방식으로 서 있으며, 수평적 지대위에 놓여 있다. 이 같은 모여듦(gathering)을 만드는 조각의 역량을 역공간을 발생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시간적-기념비의 사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기념비는 세워진 상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인 “Monument”보단, 그곳에 모인 주체들의 기억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Memorial”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념비는 모두에게 동일한 형상을 보여주기보단, 각각의 관객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며, 기억과 함께 계속해서 흩어지는 성질을 가진다. 클라우드에게 기억을 위탁하는, 그래서 선후 맥락과 긴 시간성을 구성하는 유기체적 기억의 능력이 쇠퇴하는 시대에 《조각 여정》은, 하이퍼링크를 만들어내는 조각의 힘과 몸의 여정을 동반한 구두 대화를 매개로 새로운 형태의 기념비성을 향해 나아간다.
¹ 역공간(Liminal space)은 하나의 장소 또는 다른 장소도 아닌, 제3의 공간 유형을 말한다. 리미널(Liminal)이란 '문간방, 문턱(threshold)', 또는 '경계'를 의미하는라틴어 리멘(Limen)을 어원으로 한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네덜란드 인류학자 판 헤네프는 모든 문화 유형에 나타나는 ‘통과 의례’를 3가지로 분류하였다. 이는(일상생활로부터의)분리, (문지방을 뜻하는)전이, (세속적 집단으로 다시 돌아오는)재통합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간단계인 ‘전이’의 단계 동안 제의의 주체들은 일종의애매성의 시기와 영역, 즉 어떤 결과로 생긴 사회적인 지위나 문화적 상태들의 속성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일종의 사회적 중간상태(social limbo)를 통과하게 된다.” 이‘사회적 중간 상태’와 그것을 형성하는 대상-공간-인간의 결합체에서 역공간성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리미널 스페이스의 특성과 건축적 응용 및 재현에 관한 연구」, 조대원, 임종엽, 대한건축학회(2003)
² 히토 슈타이얼은 3D 스캔 방식의 이 같은 2.5D성에 관해 다루었다. 자세한 내용은, 히토슈타이얼,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 “현실을 리핑하기: 3D의사각지대와 깨진 데이터”
³ 《조각 여정》(2022)은 WESS에서 노해나가 기획하고, 노해나, 이유성, 홍기하 3인이 원정대로 중견 여성 조각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대화하며 만들어진 전시이다. 참여작가는 김정숙, 배형경, 백연수, 윤영자, 이경희, 임송자, 황지선 7인이다. 전시장에는 이 7인의 조각가의 작업에 반응하여 만들어진 이유성과 홍기하의 조각이 함께배치되어있었다.
#6. 에필로그
2023. 2. 8 K
간만에 ‘취미가’의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취미관>에 대한 개요를 훑어봤다. 사실 딱히 개요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포스터 아래에는 행사를 소개하는 단 두 개의 문장만이 나열돼 있다.
“132명(팀)의 특별한 에디션, 작업의 부산물, 작품과 굿즈, 소장품, 특별히 선별된 물품을 4개월간 선보입니다. 다양한 작가의 시간과 취미(taste)를 구매해보세요!”
132명이라는 인원에 새삼 놀랐다. 내 기억 상으로 ‘취미가’는 그 당시에 존재했던 여느 신생공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였다. 그곳에 132명이 만든 작업들이 헤쳐 모였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일련의 작업들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작업의 크기가 아니다. 대체로 굿즈라는 형식을 준수한 채, 계급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충분히 소장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축소돼 있었다. 물론 이때의 크기는 중량과 부피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중량이 너무 높아질 경우, 작업이 수납될 예정인 투명 아크릴 박스들의 구조체는 무너질 것이다. 부피가 너무 커질 경우, 작업은 투명 아크릴 박스를 초과한 채, 그 너머의 공간을 침해할 것이다.
중량이든 부피든 간에, 결국 중요한 것은 참여 작가들이 각자의 작업을 납품하기 위해선, 일단 공간의 규모를 준거 삼아 특정한 합의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즈는 취미의 산물이기 이전에, 일련의 작업들이 일시적으로 공유했던 스케일 감각을 대변한다. 이는 단순히 개별 작업이 최소 크기로 수렴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에게 할당된 투명 아크릴 박스를 공간 차원에서 점유하기 위한 전략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더 이상 작업은 수납되지 않는다. 투명 아크릴 박스는 작가가 다양한 시점을 넘나들면서 관리할 수 있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환경이다.
132개라고 추정되는 큐브들이 도면에 따라 조립되어 몇 개의 구조체를 형성하고 있다. 구조체들 사이를 배회하다 보면, 이곳이 마치 큐브 단지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는 큐브보다 거대하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이곳을 전지적인 시점으로 관찰하는 중이다.
이제 '취미가'는 별도로 전시장을 운영하지 않는다. 아마도 큐브 단지는 더 이상 개발되지 않을 것이다. 행사가 끝난 이후에 투명 아크릴 박스들은 모두 해체되어 어딘가에서 폐기됐다. 지구 환경을 고려했을 때, 재활용할 수 없는 폐기물은 모두 인류의 낭비벽이 초래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당장 인류의 일부가 거주할 만한 세이프존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대체 지구 환경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 모두가 쓰레기장의 공모자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겐 인류세의 윤리를 추종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이 없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나를 포함한<취미관>의 관객들이 큐브 자체를 매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몇몇 관객들은 자신이 취사 선택한 작업들을 구매했다. 나는 최하늘의 작업 한 점을 집으로 모셔왔다. 물론 이 모든 건 최하늘이 대형 인플루언서로 거듭나기 이전의 일이다.
큐브 안에서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해 고민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때로는 그런 시도가 기성 세대가 유포한 성장 서사의 왜곡된 판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당신이 큐브에 귀속돼 있다는 건, 어쩌면 중산층의 궤도에서 영원히 이탈됐다는 사실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나와 동세대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큐브를 관문 삼아 브랜드 아파트의 세계로 입신한 사례는 거의 부재하다. 내가 지금까지 다달이 모은 주택 청약금으로는 전세 계약도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 감소의 시대는 끝났다. 현실에 대한 기대는 계속 감소되다가 지금의 저점에 이르렀고, 그 상태가 항구적으로 유지될 것이란 체념만이 남아있다. 큐브의 입주민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체로 계급과 지위 고하가 유사한 것 같다. 시장의 폭락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누군가의 세대를 감별할 수 있는 유용한 기준이다. 2008년 즈음의 나는 겨우 고등학생이었다.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매일 등교하거나, 등교 거부권을 행사한 채 놀고 먹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2008년 즈음의 내가 놀고 먹을 수 있었던 건, 우리 집이 운 좋게도 풍비박산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신생공간 시기에 굿즈를 소비하면서 나름대로 미술을 향유할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경제적으로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일정한 저점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통장 잔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미술계에서 미투가 한창 확산됐을 때, 나는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자칭 비평가로서 세이프존에 속해있었다. 여전히 미술계의 일원으로서 나름의 연대 책임을 느끼지만, 그런 느낌을 굳이 장황하게 해명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뒤늦게나마 교차 검증해서 무해한 존재로 요약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 시점에서 재고하고 싶은 것은, 사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을 만큼 서로를 등한시하는 큐브의 입주민들의 출처다. 우리는 큐브에 격리돼 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목적으로 그렇게 됐다. 큐브라는 밀실은 그런 미묘한 차이들을 일상적으로 묵살시킨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층간 소음에 별로 항의하고 싶지 않다. 노이즈 캔슬링으로 상쇄하면 그만이다.
큐브들의 구조체가 쓰레기로 전락하던 순간에, 아무도 그것을 딱히 문제시하지 않았다. 돌이켜보건데, 무려 132명의 작가들이 '취미가'라는 공간에 회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큐브가 그들을 환대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각자에게 할당된 큐브는 차이화를 생성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작동했다. 물론 투명 아크릴 박스의 규격은 대체로 동일하지만, 그곳을 점유하기 위한 전략까지 합의할 필요는 없었고, 그에 대한 결과물은 모두에게 말 그대로 투명하게 공개됐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관>은 단순히 작업을 위한 쇼윈도를 제공한 게 아니다. 사건의 전모는 대략 이러하다. 관객들은 진열된 작업을 스캔하는 대신, 각자의 전지적인 시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큐브를 관찰하게끔 유도됐다. 내가 큐브보다 거대하다는 이유만으로, 큐브 단지를 함부로 짓밟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큐브들이 미묘하게 형성하고 있는 차이를 가늠하고, 이를 토대로 작업의 가치를 책정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큐브와 그곳에 입주해 있는 작업들과 나의 상관관계는 계속 유동적으로 변화했다.
어쩌면 나는 <취미관>에서의 경험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참여 작가들 중에 큐브를 그냥 쇼윈도로 활용한 사례도 더러 있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조차도 나름의 전략으로 통용됐다는 사실이다. 즉 쇼윈도가 아닌 큐브들 사이에서 쇼윈도인 큐브는 애초의 의도와 무관하게 변별적인 대상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큐브들은 공생했다. 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 건, 단순히 '취미가'의 폐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큐브 단지에 조성된 생태계를 경험했지만, 사실 그것은 아직까지 남아있던 신생공간의 관객들을 새로운 소비자 유형으로 전환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연찮게 연출된 장면에 가깝다. 사실 그 당시에 큐브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취미가’의 웹사이트 어딘가에 링크로 나열돼 있는 몇몇 글들에서 주목했던 건 역시나 굿즈를 일종의 조형적 방법론으로 심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물론 굿즈는 여전히 신생공간의 라이프스타일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그러나 나는 <취미관>을 기점으로 더 이상 굿즈 형식의 작업을 소비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기회도 의욕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부연할 수 있는 <취미관>에 대한 개요다. 그 사이에 몇 번의 이사를 치르는 동안, 안타깝게도 최하늘의 작업은 유실됐다. 도대체 어디로?
큐브의 입주민들로 구성된 공동체 같은 걸 모색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집에서 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벌이는 포트럭 파티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두가 알고 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 누군가와 의도치 않게 동승하게 되면, 우리는 괜히 각자가 쓰고 있는 마스크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서로를 경계한다. 아니면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거나. 그런 누군가를 억지로 초대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를 넘어선 범죄에 가깝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에 정확히 몇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공인중개사에 별도로 문의할 필요가 있지만, 애초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피스텔 환경을 고려해 재활용 쓰레기들을 적당히 분류해서 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스럽다. 이 건물은 큐브들의 구조체와 마찬가지로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큐브의 입주민들이 지금 이대로 살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각자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계약을 연장하거나 부동산 어플로 찾은 새로운 거처로 미련없이 떠나면 그만이다. 참고로 나는 올해 말에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모두와의 작별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에서 나의 반려 고양이가 죽었고, 그보다 한참 전에 나는 스마트폰으로 SNS에 접속해 뜬금없이 내가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을 폭로했다. 여전히 그에 대한 여파를 수습하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큐브를 점유하고 있는 동안 어떤 일들을 감수했고, 지금도 감수하고 있을까? 애초에 132명의 참여 작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전시를 관람하는 도중에 우연찮게 그들 중 누군가와 마주칠 때가 있다. 사실 그들과 무관한 낯선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친다. 딱히 반가운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모두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감하고 내심 안도한다. 우리는 큐브나 큐브가 아닌 곳에서 걸어 나와, 큐브나 큐브가 아닌 곳에서 마주쳤는데, 어찌됐든 각자의 방식으로 큐브를 둘러싼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분주하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안부는 자꾸만 묘연해진다. 그럼에도 불가피하게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이유만으로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할 수는 없다. 다만 모두의 초대를 거절한 채, 큐브와 관련해서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큐브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다양한 경로들이 서로 교차하거나, 그보다 자주 어긋났으면 좋겠다. 나는 작년에 《PACK WEEK》의 프리뷰 행사에 방문했다. VIP라고 적힌 명찰을 목에 걸고, 기획자의 안내에 따라 판매 목적으로 각기 다르게 진열된 작업들 사이를 어색하게 돌아다녔다. 두 번째 섹션에서 공예 형식으로 구현된 작업들이 큐브 속에 담겨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취미관>의 투명 아크릴 박스를 떠올렸다. 공예품은 확실히 굿즈보다 호화스러워 보였고, 실제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그렇게 큐브는 순식간에 진공 상태의 밀실이 됐다. 큐브와 큐브 사이에 생략된, 혹은 그 동안 내가 외면했던 시간 속으로 침잠했다. 큐브 미술에 대한 공상은 그 순간을 발단으로 삼아 시작됐다.
A의 원룸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다른 원고를 쓰다가 질려버렸다. 저편에 있는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무선 헤드셋을 낀 채로 시끄럽게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욕설이 난무했다. 노이즈 캔슬링을 하기 위한 이어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노트북을 접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당신은 2008년에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면, 저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것 같았다. 짐을 서둘러 챙겨서 A의 원룸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소음이 윙윙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