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이후: 객체로서 영상을 상상하기」
권시우
“이후after라는 접두사는 뒤늦음belatedness을 의미한다.”1
나는 얼마 전에 N/A에서 개막한 《Ziggy Stardust》를 관람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모든 작업을 감상한 뒤 전시장을 돌아 나오던 와중에, 내가 미처 감상하지 못한 작업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해당 작업은 바로 류성실의 <대왕트래블 2020>(2020)이었는데, 그것은 아이패드로 짐작되는 작은 크기의 디바이스 상에 어떤 QR 코드를 송출하고 있었다. 내가 플로어 플랜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전시장의 벽 모퉁이에 설치된 디바이스는 딱히 관객의 주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굳이 나의 스마트폰으로 QR 코드에 접속하지 않은 채, 전시 관람을 마쳤다.
이는 단순히 해당 작업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물론 QR 코드는 어떤 영상의 링크와 연결되어 있겠지만, 그것은 나를 포함한 관객에게 영상을 감상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즉 QR 코드에 접속하는 일의 여부는 순전히 관객의 선택에 달렸으며, 나는 그저 접속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나에게 그러한 경험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해당 작업이 분명 영상 매체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상 자체는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영상 작업의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유튜브 시대에 영상은 자주 컨텐츠로 소비된다. 그런 의미에서 류성실은 자신이 제작한 영상을 디바이스 혹은 그것이 송출하는 QR 코드에 밀봉함으로써, 언제든지 언박싱unboxing할 수 있는 컨텐츠로 제공한다.
류성실, <대왕트래블 2020>, 2020
밀봉된 컨텐츠는 그 자체로 유효한 객체다. 혹은 나의 선택으로 인해, 그것은 현실에서 객체로 성사된다. 반면 QR 코드와 연결된 영상 컨텐츠는 객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그것은 언제나 객체 너머에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한다. 지금 시점에서 영상을 포함한 온갖 컨텐츠들은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이 주목하는 것은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 개별 컨텐츠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관계들의 역학이다. 이를테면 컨텐츠들이 무작위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새로운 의미는 또 다른 컨텐츠로 유통되면서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식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네트워크를 지향하되,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 네트워크는 갈수록 확장된다. 그러므로 그것의 전모는 언제나 재현을 위한 프레임을 초과한다. 결국 프레임 차원에서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은, 한때 컨텐츠들이 교차함으로써 발생한 노드node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노드를 밀봉된 컨텐츠로 환원하고 싶다. 네트워크 이론의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는 더 이상 우리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다만 우리는 컨텐츠가 밀봉돼 있는 상태를 일종의 블랙박스로 구조화하고, 그 결과물을 네트워크와 무관한 새로운 의미가 내재된 객체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객체를 해제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의미의 정체는 계속 유보된다.
내가 뒤늦게 발견한 류성실의 작업에서 성사된 것은 그저 객체와의 마주침이다. 이는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우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 이후에 영상 컨텐츠가 상연됐더라면, 객체에 내재된 새로운 의미가 결국 또 다른 컨텐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는 언제나 불가해한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혹은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 채, 나와 객체로서 마주칠 수 있다. 주지하듯 이때의 객체는 전시장 어딘가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우발성이 고조된다. 그러한 상황은 일종의 서사물을 지향하는 영상 작업과는 달리, 오히려 컨텐츠가 의도한 서사를 일축하고, 그로 인해 부각된 객체가 영상을 어떤 식으로든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객체는 그것이 다름 아닌 영상 컨텐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QR 코드를 송출하는 디바이스의 형태로 현실에서 드러난 것이다.
나는 이제 서사물이라는 장르가 다소 지루하다. 네트워크라는 범주 속에서 서사는 단지 무수한 컨텐츠로 분화된 채, 단속적인 리듬을 형성할 뿐이다. 우리가 그러한 리듬에 반응하는 데 점차 익숙해질수록 서사의 가치는 폭락한다. 무엇보다 서사물은 애초에 전시라는 형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시는 객체로서 물화된 표본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성사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해 영상은 객체를 지향하게 된다. 본 전시에서 제시된 듀킴의 연작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기능한다. 작가는 해당 작업에서 자신이 임의적으로 선별한 일련의 아이돌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 안무를 구사하는데, 그 과정을 포착한 짧은 시퀀스는 아이폰으로 상연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감상하는 와중에도 나의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하다. 심지어 아이폰의 액정에 꽂혀있는 알루미늄 화살은 다름 아닌 영상 컨텐츠가 재생되고 있는 화면을 저격한 결과다.
듀킴, <Dreams come ture>, 2021
물론 이 모든 상황은 작가의 자기 부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나에게 현전하는 것은 바로 알루미늄 화살이 관통한 액정 자체이며, 그것이 초래한 균열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재생 중인 영상은 자연스레 물리적인 현실과 괴리된다. 즉 작가가 쏘아 올린 화살은 영상 컨텐츠를 미처 관통하지 못하고, 결국 저격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작업의 실패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작업은 저격이 실패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컨텐츠가 자체의 역량만으로 현실로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 채, 그것을 디바이스에 밀봉한다.
결국 우리는 다시 밀봉된 컨텐츠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체인데, 이제는 심지어 우리가 공허한 노드 대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끔 유도한다. 듀킴은 그러한 객체들을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에 산개함으로써, 객체의 저변에 있음직한 새로운 의미를 확장시킨다. 물론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해당 장소에서 마주치는 대상은 물화된 표본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객체로서 불가해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 네트워크 이후의 새로운 의미는 우리에 의해 막연하게 상상된 허구다. 그러나 이때의 허구는 단순히 무한하게 확장되는 게 아니라, 일련의 객체들이 형성하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즉 우리는 객체들의 관계 속에서만 상상을 거듭할 수 있고, 이로써 허구의 규모는 의도적으로 제한된다. 이를테면 본 작업에서 생성된 허구는 작가가 저격한 디바이스들이 균열된 상태에 종속돼 있다.
이때의 균열된 상태는 다름 아닌 영상 작업의 개연성을 무마시킨다. 즉 우리가 객체라는 블랙박스를 섣불리 해제하지 않는 이상, 본 작업에서 각각의 컨텐츠로 분할된 영상은 짧은 시퀀스를 반복 재생할 뿐이다. 그와 별개로 해당 컨텐츠를 밀봉하고 있는 일련의 객체들은 여전히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로써 상이한 시퀀스들은 오로지 객체들의 관계에 의해서 서로 의도치 않게 마찰을 빚는다. 이는 또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깝지만, 이번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류성실의 작업이 결국 영상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역으로 그에 대한 허구를 증폭시킨다면, 본 작업은 불가해한 객체를 매개로 형성된 마찰의 지점들을 무려 상상의 몽타주로 전환한다. 즉 도저히 접합되지 않는 시퀀스들은 상상의 몽타주를 통해, 순전히 허구적인 차원에서 상연되는 영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때의 영상은 물리적인 스크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객체들의 관계, 심지어 나를 포함하는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영상은 우리에게 회귀한다.
객체 너머에 물러서 있는 영상 컨텐츠는 말 그대로 컨텐츠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결국 네트워크 차원에서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 소진될 운명이다. 그러나 이는 컨텐츠를 밀봉하고 있다고 가정된 객체와는 무관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을 빌미로 블랙박스를 방치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독해를 요구하는 서사는 발생하지 않는다. 혹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네트워크라는 조건 하에서, 혹은 그 이후after에, 우리는 결국 서사를 파기할 수 밖에 없다. 반면 객체는 그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다. 비록 그것은 불가해하지만, 어찌됐든 언제나 우리에게 현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객체는 불가해함으로써, 상상을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는 영상의 맥락에서도 합당하다. 혹은 영상은 스스로를 생성하기 위해 일련의 객체들을 회집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때의 객체를 무려 매체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마침내 우발적인 사건은 종료된다. 즉 이제 상상은 보다 의도적으로 창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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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역, 현실문화A, 2022, p11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네트워크 이후: 객체로서 영상을 상상하기」
권시우
“이후after라는 접두사는 뒤늦음belatedness을 의미한다.”1
나는 얼마 전에 N/A에서 개막한 《Ziggy Stardust》를 관람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모든 작업을 감상한 뒤 전시장을 돌아 나오던 와중에, 내가 미처 감상하지 못한 작업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해당 작업은 바로 류성실의 <대왕트래블 2020>(2020)이었는데, 그것은 아이패드로 짐작되는 작은 크기의 디바이스 상에 어떤 QR 코드를 송출하고 있었다. 내가 플로어 플랜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와 별개로 전시장의 벽 모퉁이에 설치된 디바이스는 딱히 관객의 주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굳이 나의 스마트폰으로 QR 코드에 접속하지 않은 채, 전시 관람을 마쳤다.
이는 단순히 해당 작업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물론 QR 코드는 어떤 영상의 링크와 연결되어 있겠지만, 그것은 나를 포함한 관객에게 영상을 감상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즉 QR 코드에 접속하는 일의 여부는 순전히 관객의 선택에 달렸으며, 나는 그저 접속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내렸을 뿐이다. 나에게 그러한 경험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해당 작업이 분명 영상 매체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상 자체는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영상 작업의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유튜브 시대에 영상은 자주 컨텐츠로 소비된다. 그런 의미에서 류성실은 자신이 제작한 영상을 디바이스 혹은 그것이 송출하는 QR 코드에 밀봉함으로써, 언제든지 언박싱unboxing할 수 있는 컨텐츠로 제공한다.
류성실, <대왕트래블 2020>, 2020
밀봉된 컨텐츠는 그 자체로 유효한 객체다. 혹은 나의 선택으로 인해, 그것은 현실에서 객체로 성사된다. 반면 QR 코드와 연결된 영상 컨텐츠는 객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을 파악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그것은 언제나 객체 너머에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한다. 지금 시점에서 영상을 포함한 온갖 컨텐츠들은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네트워크 이론이 주목하는 것은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 개별 컨텐츠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관계들의 역학이다. 이를테면 컨텐츠들이 무작위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고, 새로운 의미는 또 다른 컨텐츠로 유통되면서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식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네트워크를 지향하되,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듯 네트워크는 갈수록 확장된다. 그러므로 그것의 전모는 언제나 재현을 위한 프레임을 초과한다. 결국 프레임 차원에서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은, 한때 컨텐츠들이 교차함으로써 발생한 노드node에 불과하다. 나는 그러한 노드를 밀봉된 컨텐츠로 환원하고 싶다. 네트워크 이론의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는 더 이상 우리에게 현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다만 우리는 컨텐츠가 밀봉돼 있는 상태를 일종의 블랙박스로 구조화하고, 그 결과물을 네트워크와 무관한 새로운 의미가 내재된 객체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객체를 해제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새로운 의미의 정체는 계속 유보된다.
내가 뒤늦게 발견한 류성실의 작업에서 성사된 것은 그저 객체와의 마주침이다. 이는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우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 이후에 영상 컨텐츠가 상연됐더라면, 객체에 내재된 새로운 의미가 결국 또 다른 컨텐츠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객체는 언제나 불가해한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혹은 그래야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 채, 나와 객체로서 마주칠 수 있다. 주지하듯 이때의 객체는 전시장 어딘가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우발성이 고조된다. 그러한 상황은 일종의 서사물을 지향하는 영상 작업과는 달리, 오히려 컨텐츠가 의도한 서사를 일축하고, 그로 인해 부각된 객체가 영상을 어떤 식으로든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를테면 객체는 그것이 다름 아닌 영상 컨텐츠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QR 코드를 송출하는 디바이스의 형태로 현실에서 드러난 것이다.
나는 이제 서사물이라는 장르가 다소 지루하다. 네트워크라는 범주 속에서 서사는 단지 무수한 컨텐츠로 분화된 채, 단속적인 리듬을 형성할 뿐이다. 우리가 그러한 리듬에 반응하는 데 점차 익숙해질수록 서사의 가치는 폭락한다. 무엇보다 서사물은 애초에 전시라는 형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시는 객체로서 물화된 표본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성사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사실에 의해 영상은 객체를 지향하게 된다. 본 전시에서 제시된 듀킴의 연작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기능한다. 작가는 해당 작업에서 자신이 임의적으로 선별한 일련의 아이돌 걸그룹의 노래에 맞춰 안무를 구사하는데, 그 과정을 포착한 짧은 시퀀스는 아이폰으로 상연된다. 그러나 그것들을 감상하는 와중에도 나의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하다. 심지어 아이폰의 액정에 꽂혀있는 알루미늄 화살은 다름 아닌 영상 컨텐츠가 재생되고 있는 화면을 저격한 결과다.
듀킴, <Dreams come ture>, 2021
물론 이 모든 상황은 작가의 자기 부정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나에게 현전하는 것은 바로 알루미늄 화살이 관통한 액정 자체이며, 그것이 초래한 균열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재생 중인 영상은 자연스레 물리적인 현실과 괴리된다. 즉 작가가 쏘아 올린 화살은 영상 컨텐츠를 미처 관통하지 못하고, 결국 저격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작업의 실패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작업은 저격이 실패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컨텐츠가 자체의 역량만으로 현실로 거듭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 채, 그것을 디바이스에 밀봉한다.
결국 우리는 다시 밀봉된 컨텐츠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체인데, 이제는 심지어 우리가 공허한 노드 대신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끔 유도한다. 듀킴은 그러한 객체들을 자신에게 할당된 장소에 산개함으로써, 객체의 저변에 있음직한 새로운 의미를 확장시킨다. 물론 나를 포함한 관객들이 해당 장소에서 마주치는 대상은 물화된 표본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객체로서 불가해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 네트워크 이후의 새로운 의미는 우리에 의해 막연하게 상상된 허구다. 그러나 이때의 허구는 단순히 무한하게 확장되는 게 아니라, 일련의 객체들이 형성하는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즉 우리는 객체들의 관계 속에서만 상상을 거듭할 수 있고, 이로써 허구의 규모는 의도적으로 제한된다. 이를테면 본 작업에서 생성된 허구는 작가가 저격한 디바이스들이 균열된 상태에 종속돼 있다.
이때의 균열된 상태는 다름 아닌 영상 작업의 개연성을 무마시킨다. 즉 우리가 객체라는 블랙박스를 섣불리 해제하지 않는 이상, 본 작업에서 각각의 컨텐츠로 분할된 영상은 짧은 시퀀스를 반복 재생할 뿐이다. 그와 별개로 해당 컨텐츠를 밀봉하고 있는 일련의 객체들은 여전히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로써 상이한 시퀀스들은 오로지 객체들의 관계에 의해서 서로 의도치 않게 마찰을 빚는다. 이는 또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깝지만, 이번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류성실의 작업이 결국 영상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역으로 그에 대한 허구를 증폭시킨다면, 본 작업은 불가해한 객체를 매개로 형성된 마찰의 지점들을 무려 상상의 몽타주로 전환한다. 즉 도저히 접합되지 않는 시퀀스들은 상상의 몽타주를 통해, 순전히 허구적인 차원에서 상연되는 영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때의 영상은 물리적인 스크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객체들의 관계, 심지어 나를 포함하는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될 뿐이다. 그런 식으로 영상은 우리에게 회귀한다.
객체 너머에 물러서 있는 영상 컨텐츠는 말 그대로 컨텐츠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결국 네트워크 차원에서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위해 소진될 운명이다. 그러나 이는 컨텐츠를 밀봉하고 있다고 가정된 객체와는 무관한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컨텐츠에 대한 무관심을 빌미로 블랙박스를 방치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독해를 요구하는 서사는 발생하지 않는다. 혹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네트워크라는 조건 하에서, 혹은 그 이후after에, 우리는 결국 서사를 파기할 수 밖에 없다. 반면 객체는 그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다. 비록 그것은 불가해하지만, 어찌됐든 언제나 우리에게 현전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동시에 객체는 불가해함으로써, 상상을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는 영상의 맥락에서도 합당하다. 혹은 영상은 스스로를 생성하기 위해 일련의 객체들을 회집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때의 객체를 무려 매체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마침내 우발적인 사건은 종료된다. 즉 이제 상상은 보다 의도적으로 창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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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역, 현실문화A, 2022, p11
권시우 Kwon Siwoo
권시우는 미술 비평가다. 한때 웹진 ‘집단오찬’을 운영하면서, 신생공간의 시기에 전개됐던 각종 활동들에 대한 비평적 피드백을 집필하는 데 주력했다. 현재는 SNS로 대변되는 데이터 환경의 동역학에 의해서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이미지라는 단위, 그리고 그것과 일상 차원에서 (재)매개된 사용자 개인의 특정적인 경험을 주요한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