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나의 미술 친구들』

총총(권정현)「나의 미술 친구들 – 2화. 반할 수밖에 없는 세고 멋진 친구들」

나의 미술 친구들 2화 – 반할 수밖에 없는 세고 멋진 친구들

총총(권정현)


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주는 다양한 종류의 쾌감이 있다. 액션 영화에서 강력한 능력을 바탕으로 적을 파괴하는 여성 영웅 캐릭터,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여성 정치인 캐릭터, 복수심에 불타서 앞으로 돌진하는 여성 캐릭터. 이 멋진 여성들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있는 서사는 짜릿하고 통쾌하다. 이 다양한 종류의 쾌감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깨기도 하고, 또 그에 기대기도 하면서 복잡한 역학 속에서 자라난다. 대중문화의 강한 여성 캐릭터는 그렇게 관객으로 하여금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욕망과 판타지를 대리 경험하여 희열을 느끼게 한다. 나의 미술 친구들 중에도 그와 비슷하게 보는 이에게 희열과 쾌감을 선사하는 작업들이 있다. 거침없는 붓질, 커다란 부피와 깊이, 과감한 색과 형태를 보고 있으면, 액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흥분과 짜릿함이 느껴진다.


김민희, 〈하이? 빠이!〉, 캔버스에 유화, 162.2 x 130.3 cm, 2019.


김민희의 회화를 보고 있으면 ‘시원한 여름’의 기분이 든다. 분명 후덥지근한 여름인데, 한순간에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차가운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것 같다. 1980-90년대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다는 그림들은 채도가 높은 색들의 대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2020년 개인전 《고스트 비키니》의 대표작 〈하이? 빠이!〉에는 새빨간 비키니를 입은 여자 귀신이 등장한다. 하얀 소복을 입은 으스스한 귀신이 아니라 상큼한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관객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사라진다. 여귀의 일반적 모티브를 깨버리는 이 새로운 귀신은 알 수 없는 당돌함과 발랄함으로 보는 이를 당황하게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공포의 대상으로서 귀신이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하는데, 김민희의 회화에서 귀신은 사회적으로 억압된 여성의 현재적 욕망이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김민희, 〈EVE〉, 캔버스에 유화, 73x73cm, 2021.

김민희, 〈ASUKA〉, 캔버스에 유화, 60x60cm, 2021.


2021년 개인전 《이미지 앨범》에서는 1980년대 아니메와 망가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회화의 이미지로 새롭게 그려낸다. 〈ASUKA〉의 인물은 스케반(불량 여고생) 캐릭터이고, 〈EVE〉의 인물은 VR기술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이돌, 그야말로 테크노 여전사다. 이 캐릭터들은 원작의 캐릭터가 가진 인물의 매력을 넘어서 김민희의 회화 안에서 더 강력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푸른색 계열의 색을 사용하여 차갑지만 세련되게 그려진 이들은 원작에서 형성한 이미지에 더해 김민희가 부여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된다. 현재적 감각으로 변모한 여성들은 원작과는 다른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정수정, 〈Giving answers to Bosch〉, 캔버스에 유화, 72.7 x 293cm의 5단화, 2018.


정수정의 회화를 보고 있으면, ‘은은한 공포’가 슬며시 다가온다. 어쩐지 웃으며 인사를 건네지만 마음 속에 퍼런 서슬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화적 도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그림들은 다양한 여성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낯선 감각을 생성한다. 2018년 개인전 《Sweet Siren》에서 선보인 〈Giving answers to Bosch〉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수많은 요정이 등장하는 형태로 변형한다. 이 작업이 주는 쾌감은 단지 원작의 인물들을 여성 요정으로 전환했다는 차원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미지가 흔한 시대에, 적극적으로 도상적이고 구상적인 이미지가 주는 쾌감이 있다. 다섯 개의 캔버스를 이어붙인 작지 않은 크기의 평면에 여성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추상적 표현에서 벗어난 구체적인 도상이 디지털 회화가 아니라 작가의 손이 바로 닿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생기는 감각도 흥미롭다. 작가가 기계처럼 무감정적으로 추상적 형상을 그려내는 것도 아니고, 복잡한 이야기를 모호한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도 아니라, 작가의 감정을 실어서 두 손으로 쏟아낸 도상들은 일종의 매개가 되어 작가의 정서를 전달한다.  



정수정, 〈Tronie #4 Hawking〉,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 91x72cm, 2021.


2020년 개인전 《빌런들의 별》과 2021년 개인전 《Falconry 매사냥》에서는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도상적 이미지에 힘을 더한다. 액션 영화의 여성 악당, 매를 다루는 응사를 모티프로 한 인물들은 각 인물의 매력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단지 캐릭터의 강렬한 성격이 전부는 아니다. 정수정은 화폭 위에 다양한 색을 대담하게 펼치고 붓질에 거침이 없으며 물감이 과감하게 흐르도록 한다. 화면 곳곳에서 물감을 뿌린 듯한 얼룩과 물감이 흘러내린 얼룩이 나타난다. 그 과감한 표현은 명확한 형상을 고수하는 오래된 회화의 전통을 깨부수고 지금의 회화를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은 선언처럼 보인다.



 홍기하, 〈Vanilla〉, sandstone, 102x80x73cm, 2020.

홍기하 개인전 《Vanilla》  전시전경, 프로젝트스페이스영등포, 서울, 2021.


홍기하의 조각을 보고 있으면, 액션 영화를 보는 듯한 쾌감이 있다. 크고 단단한 돌이나 하얗고 매끈한 석고로 만든 작업들은 그야말로 ‘시원시원하다’는 감각을 준다. 물론 거기에 섬세함이나 세밀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작고 세밀한 부분까지 빠뜨리지 않고 다듬고 다듬은 결과물이라는 것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드러난다. 2021년의 개인전 《바닐라》는 ‘평범하고 밋밋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바닐라’를 제목으로 쓰고 있다. 홍기하는 동시대 조각의 어떤 경향을 ‘바닐라’로 설명하고, 그와 다른 조각을 하겠다는 의지를 작업으로 보여준다. 조각의 재료로 스티로폼, 아이소핑크 같이 가벼운 재료가 많이 사용되는 요즈음에, 높이 1미터에 이르는 크고 무거운 돌을 깎고 갈아서 만든 작업은 관객을 시각적으로 압도한다. 그보다는 작은 크기의 석고 조각들도 세고 묵직한 힘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다. 둥근 곡선과 뾰족한 모서리가 같이 있어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조각은 완전한 조형성을 실험하려는 조각적 시도의 산물이겠지만, 언뜻 그것은 조각에 대한 어떤 관념과 맞서 싸우려는 의지를 담은 무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끄러운 면과 공존하는 날카로운 부분들은 작가의 날선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홍기하, 〈Vanilla〉, gypsum, 65x80x130cm, 2021.


얼마 전 홍익대학교 야외공간에서 진행한 개인전 《SOLO》에서는 대략 2미터에 이르는 돌 조각 세 점을 전시했다. 관객은 키보다 큰 돌 조각을 보기 위해서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고, 무릎을 구부리고 아래를 자세히 보고, 발걸음을 움직여서 사방의 면을 보아야 했다. 작고 아담한 것, 크지만 텅 빈 것이 아니라, 크고 육중한 돌의 감각은 단지 눈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했다.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인 돌을 다시 다듬고 다듬으며 그 위에 또 시간을 쌓아간 작가의 손길이 전해지는 조각을 보는 것에는 감탄을 넘어선 짜릿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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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비슷한 여성 캐릭터 사이에서도 진일보한 캐릭터는 우리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종의 역할에 부응하면서도 그 틀을 일부분 깨고 나오면서 생겨난다. 대중문화에는 그런 캐릭터가 많지 않지만, 때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에 부응하면서도 관객이 쉽게 예상하는 경로를 이탈해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때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확장하게 된다. 세 작가의 작업은 결코 어느 한 통념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경계를 질문하고 횡단하면서 기존의 경계를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변화시킨다. 여성의 욕망을 환기하고, ‘여성스럽지 않은 것’을 표현하고, 여성적 작업에 대한 관념을 전환하는 작업들이 주는 새로운 감각은 너무 세고 멋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고 통쾌하다.



총총(권정현) chongchong (Junghyun Kwon)

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들과 협업하여 전시를 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기획한 전시로는 《믿음의 자본》(서울시립미술관 SeMA벙커, 2021), 《우한나 : 마 모아띠에》(송은아트큐브, 2020), 《팽팽팽 – 탈바가지의 역습》(의외의조합, 2020) 등이 있다. 미술비평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 멤버로 활동하면서 '총총'이란 필명으로 글을 쓴다. 총총이 지향하는 글쓰기와 권정현이 지향하는 글쓰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