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나의 미술 친구들』

총총 (권정현)「나의 미술 친구들-3화. 규칙이 있어서 아름다운 친구들 」

나의 미술 친구들 - 3화. 규칙이 있어서 아름다운 친구들



아쉽게도 실제로 수학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종종 영화 속에서 수학자를 본적은 있다. 영화 속 천재 수학자는 끼니도 잊어가면서 칠판 꼭대기부터 아래까지빼곡하게 수식을 쓰면서 문제를 해결한다. 통속적인 재현이 만들어낸 편견일 수도 있지만, 암호 같은 숫자가 고유한 질서에 의해 빼곡하게 쌓이면서 만들어지는세계는 그야말로 ‘예술’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아름답다. 수와 예술은 완전히반대되는 양극에 있을 것 같지만, 막대기의 가운데를 구부려서 만든 원처럼 양극은 쉽게 만난다. 어떤 수식이 예술처럼 아름답듯이, 어떤 예술은 수학처럼 아름답다.

[도판]

오민, <ABA Video>, 2016. 시간 기반 설치, 단채널 프로젝션, 12채널 오디오, 12분 50초, 아케미 나가오(안무), 홍초선(사운드)과의 협업. (이미지제공: 오민)


오민, <ABA Video Score>, 2016. 시간 기반 설치, 단채널 모니터, 스테레오 오디오, 2분 35초, 홍초선(사운드)과의 협업. (이미지 제공: 오민)



오민의 작업을 처음 봤을 때, 깔끔하고 정돈된 화면의 분위기가 먼저 시선을 끌었다. 단정한 색깔의 배경과 가지런한 소품들이 리듬에 맞춰 놓였다 옮겨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ABA> 연작 중 하나인 <ABA Video>(2016)는 10여 분의비디오 작품으로, 퍼포머가 컵, 연필, 붓, 화분 같은 각각 다른 크기와 형태, 재질의 작은 사물을 테이블과 주변에 놓고 옮기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색과 형태가 단정한 사물들이 조심스럽게 옮겨지고, 테이블은 마치 강박증 환자의 책상처럼 작은 사물들이 열과 행을 맞춰 타인은 쉽게 알 수 없는 나름의 질서에 따라 정리된다. 깔끔하게 정리되는 사물들을 보는 것이 묘한 쾌감을 준다. 연작의 또 다른 작업인 <ABA Video Score>(2016)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이미지를 보게된다. 회색톤의 화면에서는 정육면체, 원기둥, 삼각기둥의 세 도형이 아주 조금씩 회전과 정지를 반복한다. 배경과 도형, 화면을 가로지르는 그리드의 색 또한흰색과 검은색을 오가며 조금씩 변화한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일어나는 미세한움직임은 이들이 결코 임의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실은 이 연작의 첫 번째로 구성된 <ABA Diagram>(2016)은이 작품이 어떤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A, B, a, b라는기호, 그리고 몇 개의 숫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도표는 이것이 어떤 구조를시각화한 이미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이 작품의 캡션은 <ABA> 연작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1악장(1931, 두 번째 버전)의 구조에 기반한다고 밝힌다. 작가는 제시부(A)-발전부(B)-재현부(A’)로 구성된 소나타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 구조를 작가가 자신만의 규칙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변환한 것이다. 즉<ABA Video>와 <ABA Video Score>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를 작가의규칙으로 번역한 결과물인 셈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선율의 소나타 곡이 다이어그램으로, 기하학 도형으로, 사물의 움직임과 배치로 새롭게 ‘보여진다’. 비가시적인 시간의 흐름으로서 음악은 작가가 새롭게 만든 세계에서 자신의 규칙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며 가시화 된다. 겉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웠던 이미지가 실은 작가가 구성한 정교한 규칙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은 작업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보이게 한다.



[도판]

박아람, <운석들(Meteorites)>, 2014-2015, 3d 프린트 (FDM), 가변크기. (이미지제공: 박아람)


박아람, <에이포트레이트(Aportrait)>, 2017, 린넨에 연필과 아크릴,160.3×130.3cm. (이미지 제공: 박아람)


박아람, 《타임즈(Times)》 전시전경, 2020. (이미지 제공: 박아람)



회화를 주 매체로 다루는 박아람의 작업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한 규칙을 통해 도출된 결과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처음 본 박아람의 작업은 <운석들>(2015)이었다. 선명한 주황색의 판 위에 올려진 검은색의 조각들은 제목 그대로 우주에서 떨어진 돌멩이들 같았다. 지구로 떨어지면서 대기와의 마찰에 의해 일부가 타 버리고 남은 운석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는데, 박아람의 ‘운석’도 일정하지 않은 형태를 가진 것이 정말 자연에서 나온 돌 같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눈으로 보는 표면적 이미지 뒤에 훨씬 정교한 규칙이 숨겨져있다. <운석들>은 <자석 올가미 측량>(2012)의 방법론으로 제작된 형태를 3D 프린터로 출력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자석 올가미 측량>은 흔히 ‘누끼’를 따는데 쓰이는 포토샵 도구인 자석 올가미(magnetic lasso)를 사용하여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에서 특정 형태를 도출하는 작품이다. <운석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도출한 이미지를 겹친 뒤 3D 프린터를 이용하여 입체의 형태로 출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임의로 만들어진 것 같은 형태의 조각들은 작가가 설정한 방법론,즉 규칙에 따라 계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처럼 특정 규칙에 따라 변수로부터 새로운 값을 도출하는 함수적 제작 방식은 박아람의 이후 작업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에이포트레이트(Aportrait)>

(2017)에서는 자신의 생일, 키, 몸무게, 심박수, 호흡수, 체온 등을 측정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그 수치에 대응하는 붓질의 너비와 길이로 각 수치를 표현했다. 작가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 작품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수치를 규칙에 따라 정량화하고 새롭게 배열함으로써 나타난다. 2020년의 개인전 《타임즈(Times)》에서는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규칙을 만든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의 원색만으로 이루어진 평면 회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추상 색면회화처럼 보이는데, 그 뒤에는 복잡한 규칙이 숨겨져 있다. 스프레드시트 페이지를 평면 삼아서 각각의 셀에 색을 채워 넣는 것으로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를 셀처럼 모듈화된 캔버스에 옮긴다. 이때 스프레드시트의 셀이 행렬과 같은 구조로 가졌다는 점을 고려하여, 각각의 색이 색인처럼다른 색을 지시하고 참조하는 규칙을 적용한다. 그 결과 박아람의 회화는 가장단순한 색과 형태의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서는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이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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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을 가득 메운 풀이 끝에 도출된 답이 ‘1’처럼 단순할 때, 그 풀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단순한 색과 형태의 작품 뒤에 정교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더 아름답게 느끼도록 한다. 비가시적인 구조를 규칙에 의거해 시각화하거나 규칙을 통해 조형 형태를 산출하는 작업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형태 이면에 복잡하고 치밀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놀랍도록 아름답다.










총총(권정현) chongchong (Junghyun Kwon)

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들과 협업하여 전시를 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기획한 전시로는 《믿음의 자본》(서울시립미술관 SeMA벙커, 2021), 《우한나 : 마 모아띠에》(송은아트큐브, 2020), 《팽팽팽 – 탈바가지의 역습》(의외의조합, 2020) 등이 있다. 미술비평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 멤버로 활동하면서 '총총'이란 필명으로 글을 쓴다. 총총이 지향하는 글쓰기와 권정현이 지향하는 글쓰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