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나의 미술 친구들』

총총(권정현)「전시장의 책들 」

전시장의 책들


의외로 ‘책’을 소재로 삼은 작품을 자주 만난다. 일상적 사물 중 하나일 뿐인 책이 다른 사물과는 다르게 작가들의 관심을 끌고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되어 작업의 소재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중에는 구체적으로 특정한 책을 등장시키는 작품도 있다. 그러한 작품 안에서 내가 아는 책 표지를 발견하면 이상하게 다른 사물보다 더욱 반갑고 신기하다. 반면 특정한 책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에 책이라는 사물의 구조와 특징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경우도 있다. 책이라는 일상적 사물을 이렇게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의미를 확장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김혜원,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2021, Watercolor and Gouache, Acrylic Medium on Canvas, 33.3×40.3cm. 사진 제공: 김혜원.

김혜원, <공예의 발명>, 2020, Watercolor and Gouache, Acrylic Medium on Canvas, 34.8×27.3cm. 사진 제공: 김혜원.


김혜원의 개인전 《THICKNESS of PICTURES(2022, Hall1)는 낯익은 장소와 사물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커버 Uncover> 시리즈는 평소에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회화로 옮긴 것이다.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과정은 그저 풍경을 바로 회화로 그리는 것과는 다른 감각을 만들어낸다. 특히 대상의 한 장면만을 보여주는 사진의 정면성이 익숙한 대상을 낯설어 보이게 만든다. 서울 2호선 지하철이나 서울 시내버스의 내외부를 그린 풍경은 익숙한 장면을 생경하게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한다. 그에 더해, 책 표지를 찍은 사진을 그린 시리즈들은 내가 알던 책을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만나게 해준다. <회화의 이해>, <문화연구와 문화이론>처럼 미술인이라면 한번쯤 본 적이 있는 표지부터, 실제로는 본 적이 없지만 특정 시기에 유행하였기에 익숙한 디자인의 책들까지, 익숙한 책의 이미지는 새롭게 다가왔고, 대상으로서 책이라는 사물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책을 그린 회화는 표면적으로는 익숙한 사물을 생경하게 보게 하면서 이질적인 감각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내용적으로도 주제를 암시한다. 주로 미술, 공예, 회화를 키워드로 하는 책들은 이 연작이 회화의 조건과 공예의 구분 같은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책을 읽었다면, 혹은 읽지 않았더라도 표지 유추되는 내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표면적 이미지 이상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이은지, <덩굴(Leaf Climber)>, 2018-2021, 혼합 매체, 가변 크기(三Q 앵글). 사진: 양이언 / 사진 제공: 이은지, 三Q. 


이은지는 특정한 책을 직접 등장시키는 대신에, 책의 구조 자체를 드러내고 확장한다. 이은지는 종이로 이루어진 책을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한다. 종이는 온도와 습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책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고 때로는 윤이 나기도 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시간과 호흡하면서 변화한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이은지는 책을 마치 식물처럼 형상화한다. <덩굴>은 먹을 흡수한 장지가 책장을 뒤덮거나 밖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형태를 하고 있다. 장지가 먹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마치 물을 흡수하는 식물을 닮았다. 부분 부분 다른 농담으로 스며든 먹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상태로 변화한다. 이러한 종이가 기둥과 벽을 감싸며 자라는 넝쿨처럼 책장을 뒤덮고 있는 모습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가, 또 다음 페이지가 이어지는 책처럼 이은지의 작품에서 종이는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전체를 이룬다. 그리고 그 덩어리는 그냥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천천히 호흡하는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조나경, <그리고 미세한 피부의 감각을 느껴라>, 2022, 나무, 종이, 고무줄, 158x52x100cm. 사진 제공: 조나경.


조나경은 책의 구조를 차용하여 대상의 관계와 상태를 드러낸다. 종이 한 장은 그리 무겁지 않지만, 종이가 모여서 책이 되었을 때는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얇은 것이 모여서 두께가 된다. 조나경은 책의 그러한 구조를 가져온다. <그리고 미세한 피부의 감각을 느껴라>는 6.5mm의 얇은 나무 막대와 고무줄로 이루어진 구조물 위에 14g의 얇은 종이로 이루어진 책이 올려진다. 가벼운 종이는 쌓이고 쌓여서 연약한 나무 막대가 지탱하기에는 꽤 무거워진다. 가느다란 나무는 적절한 위치의 페이지를 펼쳐놓음으로써 무게를 양쪽에 분산하여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그 무게를 지탱해낸다. 관객은 책의 페이지를 넘길 수 있으나, 위태로운 구조 때문에 결코 페이지를 넘길 수가 없다. 볼 수 있으나 볼 수 없는 책의 페이지를 기어코 다 넘긴다면, 그리하여 페이지가 모두 한 방향으로 누워서 책이 덮히면, 구조물을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진다. 깃털처럼 가벼운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드는 무게와 연약하지만 정교한 힘의 주고받음으로 그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는 세상의 너무 많은 것들을 닮아 있다. 



*이은지의 작품에 관한 부분은 이전에 썼던 글 「장치(apparatus)로서 책, 그리고 미술가」(《교-차-점 交叉點》 전시 도록, 2021)에서 일부 가져왔다. 






총총(권정현) chongchong (Junghyun Kwon)

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들과 협업하여 전시를 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기획한 전시로는 《믿음의 자본》(서울시립미술관 SeMA벙커, 2021), 《우한나 : 마 모아띠에》(송은아트큐브, 2020), 《팽팽팽 – 탈바가지의 역습》(의외의조합, 2020) 등이 있다. 미술비평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 멤버로 활동하면서 '총총'이란 필명으로 글을 쓴다. 총총이 지향하는 글쓰기와 권정현이 지향하는 글쓰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