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현 『나의 미술 친구들』

총총(권정현)「 움직임을 담은 그림 」


움직임을 담은 그림


모든 회화는 정지된 한 순간을 담아내지만, 때때로 어떤 움직임의 순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회화들이 있다. 분명히 정지되어 있으나 흐르는 것 같은, 바람이 움직이고 물결이 일렁이고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은 그림들이 있다. 정지된 평면 위에 흐르는 시간을 담아내는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간다. 작가들은 그러한 움직임을 담아내기 위해 흑백의 선으로 그 움직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거나, 물감 자국을 남겨서 시간을 드러내거나, 유화 물감으로 투명한 빛을 그린다.


김세연, <상승곡선>, 2022, 광목 천에 목탄, 먹, 오일, 160 x 400cm. 사진 작가 제공.



 김세연, <놓친 흐름> 시리즈, 2022, 석판화, 각 21 x 29cm. 사진 작가 제공.



김세연은 흐르는 구름이나 바람의 움직임을 그린다. 하늘 위에 둥실 떠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의 시간들을 겹쳐서 담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모습들을 모아서 담는다. 움직임의 시간을 모아 담은 이미지는 온전한 형태를 잃어버리고 구상과 추상 사이를 맴돈다. 굵거나 가는 선들이 빠른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김세연은 목탄이나 먹 같은 건식 재료로 선을 그림으로써 형태를 표현한다. 단순한 재료로 선의 굵기, 농담을 바꿔가며 움직임을 그리는 것이다. 더불어 색을 배제한 흑백의 선은 움직임의 형태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김세연은 때로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그리는 라이브드로잉을 하기도 한다. 작가의 손에서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선들은 구름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작가의 움직임까지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나하, <물 속의 팔>,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194 x 112.5cm. 사진: 전병철. 사진 작가 제공. 

이나하, <수영하는 여자>,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 x 130cm. 사진: 전병철. 사진 작가 제공. 



이나하는 첨벙거리는 물의 움직임을 그린다. 헤엄치며 일어나는 물보라, 빛이 반사되며 일렁이는 물결, 수면 아래 수영하는 몸이 겹친다. 청량한 수영장의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몸은 형태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고 수면 아래 일렁이며 언뜻 보인다. 제목은 <물 속의 팔>이지만 어디가 팔인지, 어디가 몸통인지 뚜렷하게 알기 어렵다. <수영하는 여자>(2022)에서도 물과 살은 완전히 뒤섞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뚜렷한 형상이 없는 물결의 이미지는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간다. 이나하는 작업 과정에서 덜 마른 물감이 캔버스 천 위에 눌러 붙거나 밀리게 하여 자국이 남도록 하고, 자신의 회화에 ‘자국회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그림에는 그 내부에서 시간이 이미지로 남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거쳐 간 시간도 물리적으로 켜켜이 남는다. 



김은주, <꽃가루>, 2021, 캔버스에 유화, 27.3 x 22cm. 사진 작가 제공.

김은주, <물빛 모양>, 2022, 캔버스에 유화, 90.9 x 72.7cm. 사진 작가 제공.



김은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움직임을 그린다. 빛이라는 형체가 없는 대상을 입자와 파동이라는 조형 단위로 변별하고 그것의 움직임을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빛은 별, 꽃, 물결 같은 자연물을 비추면서 작가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화려한 색깔의 별, 꽃, 물결이 펼쳐진 화면은 형상과 배경 사이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화면을 흘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꽃가루>(2021)에서는 흐드러지는 꽃잎과 꽃가루가, <물빛 모양>(2022)에서는 방울방울 뭉친 물방물이 빛을 받아 반짝이며 화면을 가득 채운다. 김은주는 아크릴과 유화를 사용하지만, 마치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얇게 색을 표현한다. 그 투명함이 뒤가 비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보이지 않는 빛의 입자를 멈춰 세워 그린 그림은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어떤 풍경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총총(권정현) chongchong (Junghyun Kwon)

학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미술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들과 협업하여 전시를 하거나 책을 만들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기획한 전시로는 《믿음의 자본》(서울시립미술관 SeMA벙커, 2021), 《우한나 : 마 모아띠에》(송은아트큐브, 2020), 《팽팽팽 – 탈바가지의 역습》(의외의조합, 2020) 등이 있다. 미술비평 콜렉티브 ‘옐로우 펜 클럽' 멤버로 활동하면서 '총총'이란 필명으로 글을 쓴다. 총총이 지향하는 글쓰기와 권정현이 지향하는 글쓰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