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중] I don't want to be horny anymore, I want to be happy

아웃사이트 |  2021.12.16. - 202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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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행복을 발명했다.’ 말인(last man)들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꿈뻑거린다.1”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행복 할 수 있다. 진부한 격언이지만, 매일 행복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재생산되는 오늘에는 새로운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 즐거운 시간, 날마다 새로운 경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위한 물질적, 정신적 가이드들, 그리고 건설적이고 낭만적인 관계를 위한 다양한 상품들이 곳곳에서 판매되고 있다2. 또 한편으론 질병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관리하는 의료기술, 촘촘해지는 사회적 안전망과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의 기술에 둘러싸여 우리는 어느 정도 불확실한 사건들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거나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게 되었다. 향락의 자원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 보이고 고통의 요인들은 상당 부분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소거라는 행복의 기계적 정의를 참조하자면3, 우리의 기반 현실은 행복의 조건에 매우 근접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쾌감이 사라지고 난 자리가 더 큰 쾌감을 필요로 하는 공허의 고통으로 채워지는 것이 우리 몸의 현실이다.4 그러니 행복 기술의 범람 속에서도 우울과 불안이 만연하는 오늘날 행복 빈곤의 역설이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쾌감과 중독의 보상체계는 일찍이 설탕과 커피, 담배와 찻잎을 실어나르던 항로를 타고 신체 바깥으로 확장 되었던 바 있다. 그리고 공리주의적 행복관(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수량적 행복의 가치체계)으로 체계화 된 자본주의의 질서와 함께, 그 그림자처럼 박탈감과 공허함의 절망 또한 확산되어 간 모순에 대해 잘 알고있다. 오늘날의 향락 산업은 다만 조금 더 작고 투명한 가루, 실리콘과 빛의 수송 경로를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경로로 모든 곳에 스며드는 경향으로 관찰될 따름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들이 고통과 희열을 추동하며 현실에 크고 작은 흔적들을 남기는 충격적 사례들을 우리는 작금에 연이어 목격해 왔다. 흥분과 극도의 공포심, 기대심리와 군중심리를 동력 삼아 요동치는 가상화폐의 그래프들이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었다. 질량이 없는 코인들은 이곳의 화석 연료를 태우며 탄소의 흔적을 남기는 등 지구와 지구 아닌 곳,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고 있다5.


올더스 헉슬리가 묘사하였던 쾌락에 속박된 인간들의 세계6는 오늘의 현실에 거의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실로 우리가 두려워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가 즐기고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7. 나를 위한 시간, 나만의 라이프스타일, 즐겁고 건강한 삶을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자라는 감각으로 기만하지만 사실은 정보의 (자본의) 유통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플랫폼에 할애해야 할 관심 노동8의 노동자로서 이중으로 포섭된다9. 일례로, 넷플릭스의 경영자가 자사의 경쟁상대로서 인간의 수면시간을 지목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자. 선택과 클릭, 관심과 시선 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친 충성도까지 정보산업의 네트워크에 포섭되었다. 잠을 자고 책을 보고 운동을 하며 스크린에서 떨어져 시간을 보내는 것. 상상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유희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 다시 연결되는 것. 그럼으로써 중독의 고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시선을 붙들고 마음 속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며 끊임없이 우리의 신경계에 스며들고자 것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단절을(distraction, 향락과 망각을) 향한 우리 자신의 끝없는 욕망이며, 따라서 경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과의 연결이다10. 


육체와 자아의 번뇌를 차단시키고 정보의 유통에 몰입하는 것, 레디메이드의 라이프스타일과 MBTI의 성격유형들로 선택의 무게를 유희적으로 덜어내는 것, 챗봇 사주풀이와 유튜브 타로점으로 존재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향유하는 것으로 책임의 무게와 사유의 소음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날마다 스크린에 떠오르는 감각적인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맛있고 슬프고 오싹한) 것들에 기대어 무거운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다. 자동화된 황홀경(미디어)과 화학적 숭고(도파민)에 중독되어 포르노, 게임, 메타버스, 보조제, 증강제, 진정제 속으로 사라지는 오늘날 말인(last man)의 초상11은 사실 신의 섭리와 사후의 구원과 영원한 안식과 승천에 대한 신실한 믿음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뎌내었던 중세 신앙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말씀은 자본주의라는 신체 없는 권력으로, 저 세상에 기반한 픽션(천국과 지옥의 신화)은 이세상에 기반한 픽션(돈과 복근과 향락과 웰빙)으로, 종교적 교리는 행복의 이데올로기로 전환되었다. 

하나의 꿈에서 또 다른 안식처로, 하나의 가상에서 또 다른 스크린으로 내달리는 정주 없는 여정이 (도피가) 계속된다12. 무겁고 괴로운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탈출(단절)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손에 잡히지 않는 보편적 대의를 위해 목숨과 십일조를 헌납하는 대신, 지금 여기 나의 안녕과 즐거움을 위해 수면시간과 월 구독료를 헌납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언어와 시각, 청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꿈 속으로 사라지려 한다13. 다만 신, 국가, 민족, 인류와 같은 낡은 서사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단위소를 내세우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근대적 명분으로 다시 쓰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그 새로운 천국과 지옥이 개개인의 몸과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인 듯하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지옥이란 무료함과 불편함의 고통이고, 우리에게 가장 달콤한 보상이란 몸과 마음의 안녕과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를 현혹시키는 저 향락과 망각의 장치들이 단지 오래된 도피주의의 새로운 양태일 뿐이라 속단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 말인의 모습이 비록 현실에의 의지 없이 몸 안팎의 가상으로 회피해 버리는 향락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왔지만, 능동적 자기착취와 성과주의라는 오늘날의 현실에 동조하지 않고 철회하는 듯 보이기도하는 이 태도로부터 퇴폐주의 이상의 가능성을 찾을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어진 것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선회할 수 있는 적극적 가능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감지된다. 그러니 스크린에 펼쳐진 새로운 하늘 속으로 스며드는 이 새로운 세대가 도착한 그 곳에서 어떤 새로운 관계와 존재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을지 지켜 보아야 할 일이다. 결국엔 몸이 사는 이곳의 현실 또한 언어의 구조와 이미지의 감각으로 쓰여진 가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가상이라면 가상 또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향락의 기술 속에서 육체의 현실을 망각할지라도 그 즐거움과 고통의 감각을 통해 자기에게 더욱 단단히 연결 되는 것, 그럼으로써 어디에서든 새로이 만들어진 현실 속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여기 전시장의 이미지들이 가리키는 새로운 현실을 향한 가능성일 것이다14. 


2021. 12. 16 — 2022. 2. 6

화요일 - 일요일 12:00 ~ 18:00
월, 공휴일 휴관

기획 : 임진호(out_sight)
참여 작가 : Adam Centko, 박재훈, Keiken, Laura Yuile, Shir Handelsman
포스터 디자인 : Downleit 박재영 X 차지연
구조물 제작 : 노준태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Tue-Sun 12pm ~ 6pm
Mon & Public holidays OFF